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 - 왜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는가?
심기용.정윤아 지음 / 알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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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아모리 개념 자체에 대해선 큰 불만이나 이견이 없으므로 (제 관심사인) 이론적 세부사항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첫째, 조나단 하이트의 도덕감정이론에 관한 오독: 아쉽게도 하이트의 도덕감정이론은 폴리아모리를 설명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에 서있는 사람들을 훨씬 더 강하게 뒷받침한다.


그에게서 감정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본능적인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그게 바람이든 폴리아모리를 향해 가는 진행과정이든) 기분이 나빴다면, 그런 감정이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이트에겐 훨씬 중요한 일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도덕감정이론의 중요한 근거 중 하나로 진화심리학을 인용함으로써 이런 종류의 “감정적 직관”이 생물학적 본능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또 그의 “직관의 6가지 기본 유형”중에 하나는 한 사람 또는 어떤 한 가지에 대한 충성, 즉 loyalty다. 누가 보더라도 폴리아모리는 loyalty에 대한 중대한 위반인데, 한 사람의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고 모노가미를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래서 하이트의 결론은, “보수주의자들이 진보적 급진적 운동에 반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며,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의 감정적 거부감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운동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다.”는 쪽에 기울어있다. 이런 입장과 폴리아모리가 일관성 있게 어울릴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책 초반부에서 삐끗.


둘째, 스피노자의 변용 개념과 폴리아모리의 관계설정: 책에서도 설명되어 있듯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실체인 신을 중심으로 해서 인과적으로 강하게 맞물려있는 세계를 상정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는데, 하나는 그에게 우주의 모든 것은 자연이라는 점 즉 문명사회에 대한 분류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모든 현상이 가치의 측면에서 동등한 값을 갖는다는 점이다.


책의 내용을 인용해서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세계관 속에선 “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 라는 질문에 “꺼져 이 개새끼야”라고 대답하는 것과 “난 네 전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네 모습도 사랑해”라고 대답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위계가 설정되지 않는다. 내게는 이 둘 중에 어떤 대답을 할 선택권이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또 이 두 대답 중에 "그래도 널 사랑해”를 선택해야할만한 도덕적 우월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면, “꺼져 이 개새끼야”라고 말할 이유가 없는 것 만큼이나 “그래도 널 사랑해”라고 대답할만한 이유도 없어진다.


물론 이 책의 필진들은 이 정도만 되어도 사회의 지배이념에 대한 공격으로서 의미있는 이론적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보이나, 문제는 본인들 스스로 지배이념의 반대항에 있는 폴리아모리에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고 싶은 욕망이 슬쩍슬쩍 비친다는 데 있다. “진정성”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수사라고 공격해놓고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서 “진정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한다면”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 같다. 그리고 이 욕망은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 논리적으로 그다지… 잘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셋째, 들뢰즈의 강도 개념과 문명의 문제: 스피노자를 이어받은 들뢰즈의 강렬도intensity 개념은 사람들의 감정을 질적인 언어로 파악하는 우리들의 “문명적” 습관을 양적인 개념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그 철학사적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스피노자를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자연과 문명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의 성격 또한 그대로 물려받는다.


문명이 억압인 것, 맞다. 우리 행위의 양식을 조직하고 그 바깥으로 튀어나가려는 시도를 판옵티콘마냥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문명의 본질이라는 것,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억압으로부터 우리는 단순한 종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역진불가능한 질적 도약을 통해 문명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문명화된” 시선에서 특정한 정도의 강렬도를 가진 감정을 사랑이라고 규정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그에 알맞는 행위의 양식을 조직해 나가거나 기존의 양식을 반복한다.


이 둘은 사실 다른 말이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렇게 사회를 억압과 동일시하고 비판하면서도, 우리는 “문명화된” 사회 안에 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사랑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사랑의 범위를 점점 더 넓혀가고 그 안에 성소수자 운동으로서 폴리아모리도 포함된다는 저자들의 논지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저자들이 그렇듯 나 또한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넷째, 선택의 문제: 그래서 폴리아모리는, (제가 몇 번 말씀드렸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선택의 문제에 부딪힌다. 빨간 옷을 입고 나갔다가 마음에 드는 검은 옷을 보고 구입해서 입는 이유는 빨간 옷보다 검은 옷이 마음에 “더” 들었기 때문이다. 즉, 비교평가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저는 엄마를 더 좋아합니다만) 내 마음을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엄마와 아빠 둘 중에 한 명에게 반드시 상처를 주는 현명하지 못한 대답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연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무도 나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선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라서, 내가 누군가에게 one & only가 아닌 다음에야 결코 충족되지 않는 그런 것이다. 진정한 폴리아모리는 이런 위계 자체를 거부한다지만, 마음씀이란 언제나 상대평가의 개념인 것 같아서… 잘 모르겠다.


이건 사족: 이 책을 읽기 직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읽었다. 7권 마지막 부분에 이런 멘트가 있다. “우리는 맨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모든 것들을 더 좋아하니까.” 그것이 설령 윤리적 사회적 위반을 포함한다고 할지라도, 우정도 사랑도 장난감도 우리는 새것을 더 좋아한다. 이건 폴리아모리로 해결될 문제라기보단, 그냥 인류의 비극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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