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무엇일까.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도 그토록 담담한 이유는.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그토록 그의 곁에서 벌어지는 이유는. 이 책의 주인공 스티븐스의 직업은 귀족 달링턴 집안의 집사다. “집사”라는 단어와 그의 역할이 아마도 앞에 제기된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될 것 같다. 적어도 스티븐스는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그는 집사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내기 위해 집사의 역할을 벗어난 행위를 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래서 충격적인 사건을 담담하게 대했으며, 그가 봉사했던 귀족이 각종 사건에 연루되었기에 그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에 봉사”한다고 믿게 되었다.


이 책에서 직접 쓴 단어를 빌려 말하자면, 두 가지 화두가 그의 삶을 지배한 것 처럼 보인다. 첫째는 품위다. 스티븐스는 품위있는 집사란 무엇인지 고민했고, 품위있는 집사인(혹은 그렇다고 그가 생각한) 아버지의 길을 밟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리고 아마 본인은 그 근처쯤 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 여성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하고, 여행이 끝나면서 끝난다. 그 여성은 십수 년 전 달링턴의 저택에서 같이 일하다가 그만둔 사람이다. 이 여행은 여행인 동시에 회상이기도 한데, 여행과 회상은 모두 품위라는 개념에 대한 그의 고민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앞에서 품위있는 “집사”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이것이 스티븐스의 고민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품위있는 “집사”란, 자연스러운 듯 어색하다. 이 부분을 다른 명사로 바꿔보면 더욱 그렇다. 품위있는 “사람”, 품위있는 “삶” 같은 것들. 그리고 스티븐스는 이런 종류의 고민을 한사코 거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고 수긍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다른 종류의 품위에 관한 질문을 아예 던지지 않는 쪽에 가깝다. 이런 태도가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서도 일을 하던 품위, 반유대주의와 파시스트적 생각에 물들어 유대인 하녀들을 내쫓은 달링턴에게 저항하지 않은 품위, 달링턴의 결정적인 비행이 폭로되었음에도 그가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그의 품위를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자신이 생각하는 품위 개념에 대해 그다지 의심하지 않는 그는 이 책에 등장하는 여정을 통해 흔들리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 뒤에 어떤 일이 펼쳐질 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정말 흔들린 것인지, 어떤 다른 생각을 했던 것인지 짐작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집사”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가 놓쳐버린 것들은 분명하다. 아마도 “사람”으로서의 품위로 요약될 수 있을 것들이겠지. 자유라든가, 감정이라든가, 선택이나 저항같은 것들. 하지만 그의 여행에서 등장하는 그 어떤 사람도, 이런 “삶”의 품위를 세련되게 설명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이야기가 끝나도록 선선하고 건조한 입장을 유지한다(그리고 이 “선선하고 건조하다”는 형용사는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 즉 문체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형용사일 것 같다).


그는 “사람”으로서의 품위를 좇는 것을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비난하는 입장에 서있다. 직업의식, 이른바 프로페셔널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의 대립은 품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이 소설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다.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다는 말은 어떤 행위의 묶음을 가리키는가?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다”는 세 단어는 모두 너무나도 추상적이어서, 실제로는 이 각각의 낱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각자 이 말의 뜻을 해석하고 실천한다. 스티븐스에게 이것은 집사로서 집안을 잘 관리하고 행사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 꼼꼼하게 하인들을 통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했다. 달링턴의 유대인 하녀 해고 지시가 부당하며 거부해야 한다는 켄턴의 말을 단칼에 물리치면서까지 그렇게 했다.


이것이 프로페셔널리즘인가? 우리는 비슷한 프로페셔널리즘이지만 약간은 다른 역할을 배트맨의 알프레드에서 찾을 수 있다. (다크나이트 트릴로지, 특히 다크나이트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그는 주인의 (정치적) 행보가 위험하며 조커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경고한다. 체험이 되었든 깨달음이 되었든 브루스 웨인은 그의 말을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집사이면서 동시에 “현명한” 노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집사”의 롤모델이라고 부를만하다. 스티븐스의 눈에 알프레드는 어떻게 비쳤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의도인지, 어쨌든 이 소설에서 아마추어리즘은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목소리로 튀어나온다. 켄턴의 행동에서, 여정에서 만난 정치활동가에게서. 그래서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들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불완전하고 위태로워 보이며,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도망간 것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스티븐스가 섬기던 달링턴, 그가 세계에 봉사한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어준 매개체인 그 달링턴은 미국 외교관 루이스로부터 외교에서의 아마추어라고 비판받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공개석상이나 경제적 계산이 아닌 흑막과 비밀회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아마추어 외교관이었다. 그리고 스티븐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휴가 다운 휴가를 얻어 여행을 가게 된 계기도, 그를 집사가 아닌 고용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인 패러데이에 의해서 가능했다. 이쯤되면 그가 강조한 프로페셔널리즘, 그가 반대한 아마추어리즘의 경계가 대체 어디였는지 흐릿해진다. “집사”라는 직분은,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말을 붙일 만한 직업이긴 했던 것일까? 아마추어는 누구이며, 무엇일까.


책을 덮으며 생각해보니, 품위와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의문을 제기하기에 집사라는 직업은 꽤 적절했던 것 같다. 정치적 주체성은 지워져있지만 기능적 주체성은 극한에 치달아있는, “훌륭한” “집사”라는 직분이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미묘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집사”라는 직업군에 대한 이미지나 정보가 없는 문화권에서 살아온 나 같은 독자가 포착하기 힘든 어떤 이미지도 있을 것 같다. 근대 한국의 역사적 풍경을 다루는 소설에서 많이 등장하는 "마름"이라는 지위를 대입시켜보면 약간은 그림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 둘은 완전히 같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끝내 그 두 가지 의문이 명쾌하게 해소되지 않은 채 소설은 마무리된다. 작가는 등장하는 여러 입장 중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선선하고 건조하게 이 모두를 그려내고 있다. 이 방법은, 우리 모두가 삶 속에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해결해야만 하고 그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말하려 의도적으로 채택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을 내 주변의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으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당신의 품위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의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서.


PS. 이 독후감을 작성하기 전, 이 책을 주제로 독서모임을 한 번 가졌습니다. 이 글에 들어있는 아이디어의 상당수는 그 모임에서의 토론을 통해 구체화되었거나 모임에 참석한 다른 분들에게서 얻어온 것입니다. 정의당 강동구 당원협의회 내의 독서소모임 [산책]의 11월 정례모임에 참석해주신 모든 당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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