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글쓰기 클래스 수강생의 교정/교열을 거친 글입니다]


고장난 열차가 달려오고, 나는 내 옆에 있는 뚱뚱한 사람을 밀어야만 열차를 멈출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로에 있는 다섯 사람이 죽는다. 널리 알려진 트롤리 사고실험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뚱뚱한 사람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일수록 실험 참가자들은 뚱뚱한 사람을 밀어내는 것을 주저하거나 더 큰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이것이 정보의 구체성 탓인지, 아니면 그 뚱뚱한 사람은 어쨌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시민이기에 죽음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상식 탓인지, 한 번쯤은 의문을 가져볼 수 있겠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주인공과 사형수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사형제도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과 사고실험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사형제도에 관한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 볼 수 있다. 사형수가 내 친구라면, 적어도 내가 친구라고 느낄만큼 그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사형이 적절한 처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언젠가 집행될 것이라는 사실이 예정되어 있다면. 아마 반응은 두 가지로 갈라질 것이다. 아무리 내가 많이 “알고” 있어도 그 새끼는 죽어도 싼 놈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의 “진짜 이야기”를 들은 뒤에는 그 어떤 누구도 한 삶의 끝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고 느끼거나.
 
공지영은 이 소설 속에서 너무나도 명백하게, 조금 나쁘게 말하자면 노골적으로 후자의 편을 들고 있다. 모니카 수녀는 세상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해 기도했던 역사 속의 모니카와 비슷하게) 아이들에게 헌신하듯 여러 가지 수완으로 사형수를 대한다. 수녀의 조카인 유정은 윤수의 죽음을 직접 대면하면서 조금이나마 염세적인 태도를 벗어나고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윤수의 웃음은 “조소”에서 함박웃음으로 그리고 다시 속죄의 눈물로 변화한다. 사형수가 맞이할 죽음과 우리의 생명의 끝인 죽음을 동치시키며, 이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 속에서 치유의 공간을 만들어간다. 그 대척점에 있는 사형제는, 복수라는 끔찍한 제도로 표현된다.
 
나는 이것을 ‘구체성의 승리’ 라는 단어로 줄여서 말하고 싶다. 그것이 설령 범죄에 관한 이야기이고 아무리 흉악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적어도 이 소설 속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사형수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신문이 보여주는 “가짜 이야기”들은 추상적 영역에 머물러있다. 추상적 사고방식은 참과 거짓을 나누고, 착한 사람과 나쁜 놈을 가른다. 하지만 구체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죽음 앞에 서서 선과 악이 한끗 차이로 바뀐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 게다가 사형제를 폐지하자는 것이 그 사람들을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자고 말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죽음에 대해 한사코 반대하지만,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죽음을 매개로 맺어진 관계라는 점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자살하려던 유정과 그를 돌보는 모니카, 사형수가 된 윤수와 그를 보러 온 모니카와 유정, 살인사건 가해자 윤수와 피해자의 어머니인 삼양동 할머니, 죽음을 염려하는 유정의 엄마와 유정… 이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고 달가워하지 않음에도, 죽음이라는 테마는 소설의 문제의식에도, 등장인물들의 성격에도, 그리고 이 소설 속의 세계 전체에도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죽음으로 내달리는 세계를 드러내며 죽음에 반대하다니. 운명 같은 것인가? 나는 아직 대면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가끔은 내 삶의 경계를 짓는 짙은 커튼을 걷어버리는 상상을 하곤 한다. 생물학적 죽음이 되었든, 사형제가 되었든, 자살이 되었든. 내 커튼을 걷는 일에도, 남의 커튼을 치워버리는 일에도, 우리는 어쨌든 신중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런 정보도 갖지 못한 장소로 다른 사람을 떠밀어버리는 것 만큼 끔찍한 일은 또 없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게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소설 속의 윤수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복수는 감정의 일시적인 해소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나, 세계를 파괴하는 일에도 봉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체성의 세계로 들어가 더욱 면밀하게 이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공지영의 이 소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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