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론주의 개요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지음, 오유석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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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관한 내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책의 제일 끝부분에서부터 시작한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자신이 이 책에서 전개한 여러 방식의 회의주의적 논증과 다른 학파의 주장에 대한 논박이,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일어날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미약한 논증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희박한 논증조차도 그에 알맞는 대상이 있다. 바로 강한 도그마다. 사람들이 강하게 믿는 교의일수록 그 교의를 벗어난 생각에 대한 고려 또한 희박할 수 밖에 없다. 섹스투스의 눈에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한 정도의 강박증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흔하게 반박될만한 주장에는 흔한 반박으로, 간단하게 반박되지 않을 만한 주장에는 희박한 주장으로 응수한다는 대책이 등장한다. 즉, 그의 철학적 활동은 강박에 대한 치료로서의 회의주의적 태도다.


그래서 섹스투스는 태도로서의 회의주의(아카데미아 학파)와 교의로서의 회의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의심하고, 편한 것은 믿어버리는 일상의 타성 속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의심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 나온 것처럼, 회의주의의 영단어인 스켑티시즘의 어원은 그리스어 "탐구" 즉 스켑테스타이다. 즉, 회의란 부정이 아닌 탐구다. 나의 내면과 세계의 다양한 사물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하고 잠정적 결론을 끊임없이 수정해가며 자신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것에 냉소적이라는 의미의 퀴니코스("시니컬하다cynical"의 어원), 역설적으로 무지를 도그마로 삼아버리며 불가능이라는 단정을 설파한 신아카데미아학파와 피론 회의주의는 다르다. 이 셋의 구별의 지점은 그 온건함과 비교조적 차분함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을 모두 포괄하는 회의주의적 태도가 파괴적인 것은 분명 사실이다. 인간은 역사 전체를 통틀어 인간(또는 개인, 또는 공동체) 너머의 권위를 요청하는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그것이 도그마라는 사실 자체를 망각할 정도로. 마치 그것이 없으면 이 세계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열정적으로 달려들고, 자신이 무언가 발견했다고 선언하곤 한다. 이런 사변적 탐구엔 끝이 없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것을 철학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쓸데없을 정도로 자세하고 많이) 배우곤 한다. 그리고 이런 신념의 반대급부에는, 이런 형이상학적 권위가 없다는 게 증명되면 당장에라도 세상을 무너뜨려버리겠다는 욕망이 마음 속 깊이 숨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권위에라도 기대지 않으면 이런 종말론적 열망을 꺼뜨릴 수 없다는 뜻에서, 철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무너지는 세계의 미학은 거울쌍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묻는다. 판단을 유보하면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주장하듯 마음의 평화가 올까? 오히려 탐구라는 이름으로 삶 전체에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가 영위하는 인간적 삶은 가능할까? 인간적 삶을 떠받치는 많은 근거없는 믿음들이 "그래보인다"는 표현 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릴테니 말이다. 계약서인 것처럼 보일 뿐 계약서가 아니라면 누가 계약을 지킬까. 그리고 그 뒤엔,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우리가 지금까지 영위해온 삶은 규정과 변화와 그에 따른 타자화라는 구덩이가 놓여있는 양식이었다. 그리고 피론주의적 세계라는 다른 한 편엔 무정부주의가 놓여있는 것만 같다. 내 입장에서야, 뭐 그게 꼭 나쁜 것만 같지도 않고.


결론을 지어보자. 이론적인 배경이나 영향을 떠나서 읽으면, 우리의 삶 전체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 전체에 대한 기나긴(어쩌면 끝이 없을) 탐구의 과정이라는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견지하기 힘든) 교훈같은 것이 든 책이었다. 그리고 내게 개인적으로는, (내가 집중해서 공부하고 있는) 근대 철학의 각종 문제들을 둘러싼 다양한 (이른바) 회의주의적 논변의 원형을 확인한, 좋은 공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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