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가족,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성에 관한 윤리적 담론은 인류가 “가치”에 관한 개념을 가장 오래도록 결부시켜온 역사적 형성물이다. 번식은 본능이고 성차는 자연의 산물이라는 생물학에 기반한 편견에서부터 전통으로 확립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문화적 합리화에 이르기까지, 사실 성 담론은 인류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을 억압하는 기능을 아주 충실하게 수행했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공격받고 해체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가 채 300년이 되지 않았으며, 이 진보는 페미니즘의 등장 및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스스로가 페미니스트임을 표방하고 있진 않지만, 러셀의 『결혼과 가족』은 그 움직임에 작은(어쩌면 큰) 보탬이 된 책이 아닐까 싶다.
밀의 『여성의 종속』이 그러하듯, 러셀 또한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도덕지상주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담론들을 공격하고 성의 해방을 주장한다. 우선 그가 누누이 강조하는 “인간의 성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관한 지식”의 교육의 중요성이 그러하다. 쾌락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고 (러셀이 주로 개신교 신자들이라고 범주화하는) 억압적인 사람들이 아이들의 도덕교육을 맡는 순간, 아이들은 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배울 기회를 영영 박탈당한다.
러셀은 이런 기회박탈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좇아 행위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투명한 공개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인으로서의 최소한의 합리적 판단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그런 정보들을 바탕으로 연애시장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게끔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기에, 도덕주의자들이 우려하는 타락과 방탕의 문제는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이 억압은 단순히 당사자의 불행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어린이들이 성에 관해 갖게 되는 잘못된 죄책감을 시작으로, 성에 대해 미숙해서 벌어지는 젊은 세대의 연애의 불행,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의 불행, 결혼을 통해 구성된 가족 안에서 부모의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 채 성장하는 아이의 불행, 나아가서 그런 불행한 자들이 구성하는 사회 전체의 불행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런 사회적 불행의 결과는, 정말 불행하게도 여성에 대한 억압이다. 우리의(더 정확히는 러셀이 아는 한에서의 서양의) 역사는 여성에 대해서 온갖 종류의 압박이 주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나 현재(러셀이 살았던 시기에) 문제되는 것은, 강한 금욕주의가 사실상 여성에게만 강제되는 형태로 실천되어 왔다는 점이다. 남성들은 그들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이유로 각종 암묵적 장치들(성매매)을 통해 성적 방탕과 타락이 사실상 용인되었다. 반면 여성의 경우에는 그들이 지켜야 할 제1의 가치로 정숙(순결/정조, chastity)이 내세워지기에, 한 편으로는 남성과 동료가 되어 사회생활을 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정조 관념이 없는 사람이라며 지탄을 받는 사회생활을 영위한다. 여기에다 도덕적 덕목을 지키려는 것은 남자, 유혹해서 그를 파괴하는 팜므 파탈은 여자라는 도식까지 더해지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전 인구의 절반이 겪고 있는 끔찍한 불행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러셀의 진단이다.
러셀의 평가는 이렇다. 이 모든 종류의 구식 도덕지상주의와 금욕주의는 우리 사회의 현대적 변화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이런 여성 억압은 그 자체로 옳지 못하다”는 주장과는, 약간은 결이 다르다. 이런 종류의 도덕적 신념이, 단지 현대 사회의 물질적 조건에 잘 어울리지 않기에(적합하지 않기에) 행복을 증진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발상은, 그가 책에서 직접 인용하고 있는(행정서류상 그의 양아버지이기도 한)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의 논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그가 내놓는 정책적 제안은, 밀의 입장에 비해 한 발 더 나아간다. 혼인 이외의 성관계는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없다는 것, 당사자간 합의 하나면 이혼이 성립하게끔 법을 고쳐야 한다는 것, 초등학교 때부터 성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알려주는 교육을 장려할 것 등이 포함된다. 나아가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행되는 성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의무교육 이상의 보편육아, 아동수당 지급, 육아휴직과 복직의 보장 등을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핵심은 이런 제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정책이기 때문에 시행해야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의 삶의 형태에서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잘 어울리는(적합한) 제도이기 때문에 시행해야 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즉, 그는 어떤 도덕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한, 자신이 제시한 것과 같은 정책들은 필연적으로 시행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아동노동을 금지하고, 의무교육을 시행하며, 아이들의 독립된 재산권을 인정한 것을 발전의 역사로 이해한다면, 여기에서 더 나아간 발전이란 (러셀의 표현에 따르면) “아버지의 역할로 간주되던 것을 국가가 완전히 대체하는” 공동체로 변모하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1929년에 출판된 것이고, 그래서 어쩔 수 없는 한계 같은 것이 있다. 여성성과 남성성, 그리고 각각에 속하는 어떤 특성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 같은 것이 그렇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 동시대의 거의 모든 페미니스트들 또한 여성성과 남성성을 대체로 고정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들의 해방의 논리는, 여성성으로 간주되었던 여러 특성들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 가치를 높게 매겨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논리를 남성이 반복한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봐줘야할지는, 약간은 의문이다.
현재 시각에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우생학’과 관련된 몇몇 주장이다. 예를 들어, 그는 정신적인 이상이 있는 사람은 아이를 낳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는 충분히 진보적인 것이다. 단순히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정부가 아이를 낳을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프로이트의 논리를 일부 받아들여 정신적인 이상이라는 것이 상당수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기에, 그가 인정하는 제한의 폭은 더욱 줄어든다. 그럼에도 현재 시각에서 보았을 때, 우생학의 주장을 일부나마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거슬릴 수 있는 부분이 될 것이다.
그의 예측, 그리고 그의 정첵적 제언은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요약해놓은 러셀의 발상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이 책이 출판되고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상당히 많다. 이유는 가지각색일 것이다. 여성의 권리 신장을 싫어하는 사람, 어떤 종류의 문화를 성적인 문란과 퇴폐라고 생각하는 사람, 현재 사회의 질서가 자연의 섭리이므로 그것을 비판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이라도, 러셀이 자신의 글 전체를 정리하며 사랑은 육체적 결합과 정신적 결합이 등비를 이루는 조합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결론 부분만큼은 꼭 한 번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결국 그는, “사랑이란 대지에 뿌리를 내리며 동시에 하늘로 가지를 뻗어야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