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개정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주말 독서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을 주관하는 큐레이터 한 분과 함께 미술관 두 곳을 갔다왔다. 금호미술관과 선재아트센터. 각각 전시가 진행중이었다. 심드렁하게 본 것도 있었고, 생각해볼만한 것도 있었으며, 시각적으로 신기해서 충격을 준 것도 있었다. 그 중에 정말 모르겠던 것은, 포켓볼에 쓰는 솔리드 8번 공을 몇 개 늘어놓고 설치미술이라고 하는 작품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어떤 남자들은, 바닥에 구 모양의 물체가 놓여있으면 걷어차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하지만 작품이니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미술인지 머릿 속에 드는 의문에, 그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적절한 해답을 주는 것 같다.


이 책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어떤 인공물을 미술로 분류하는 행위는, 맥락의존적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문화로서의 맥락의 공고함에도 불구하고, 만약 작가가 무언가 만들어놓은 뒤 예술로서의 맥락을 잘 설명하기만 한다면 어떤 인공물도 미술이 될 수 있다. 저자인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인공물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다양한 맥락들이 어떤 식으로 변해왔는지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그것을 잘 드러내주는 인공물을 보여준다. 이 맥락에 포함되는 미술과 그 주변의 문화적 산물들은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다. 작품, 주체성, 기예, 미학, 작가, 학계(미술계/아카데미), 박물관/미술관, 미술사, 대중문화, 동시대 미술이 그 산물들이다.


스타니스제프스키는 이 모든 산물들에 대해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이 대체로 18~19세기 사이에 생겨난 것이라는 점을 논증한다. 18세기 중반에 아름다움에 대한 합리적 분석이라는 근대적 모토 아래 미학이 생겨났고, 아름다움을 담는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이 생긴 다음에야 미술작품이 분류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분류된 작품들의 변천을 선형적으로 엮어 만들어진 미술사책이 처음 출판된 것이 18세기 중반이었다. 이런 작품은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창조적 영감을 지닌 천재가 만들어낸다는 미학이론은 19세기 초반 낭만주의의 소산이며, 이런 작품이 세계 전체를 재창조해내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작품의 창조란 유아론적인 근대적 주체의 표현이다. 창고의 잡동사니를 근대적 지식체계에 따라 분류해 전시하면 박물관, 그 중에서도 순수예술로 분류되는 인공물을 꺼내 전시하면 미술관이 된다. 최초의 공공박물관은 1820년대에 생겼다. 이 모든 작업은 프랑스의 절대왕정시기부터 각 국가에 형성/설립되기 시작한 학계(아카데미)에서 전문적으로 훈련시킨 인사들이 수행한다. 그리고 20세기의 미술은 이 모든 것의 전복과 이종교배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가 아는 한, 이런 설명은 미술/미술계/미학의 역사에 대한 표준적 방식이다. 아주 낯선 주장이나 논증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에 대한 정석적 설명보다는 미래의 예술의 기능과 역할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가 미술작품이라고 이해했던 것들을 그 인공물이 생산된 시기의 사회/문화/경제적 맥락 속으로 융해시키고, 그것이 실제로 어떤 기능을 했는지를 다시 묻는다. 그에게 미술의 본질은 아름다움, 특히 시각적 아름다움의 표현에 국한되지 않는 것 같다. 작품이란 생각의 표현이다. 그 생각이란 자신의 만들어낸 인공물이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의 동의어다. 이 단계에서 미술은 다른 ‘사상적’ 인공물들, 예를 들어 철학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같은 것들에 개입하는 장치로서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그래서, 이것은 미술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나는 저자의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특히 미술이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라는 표준적 설명에 덧붙여진, “주체가 되는 강력한 방식으로서의”(이 책의 마지막 문장) 예술이라는 아이디어가 특히 그렇다. 미학의 역사만 보더라도, 아름다움이 인간이 소중하게 여기는 다른 가치들로부터 독립된 어떤 것이라는 믿음은 저자가 설명하듯 그리 오래된 발상이 아니다. 그래서 미술이 아름다움이라는 제한된 영역을 넘어서 세계 전체를 대면하고 창조하는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저자와 비슷한 듯 하면서 결이 약간은 다른 내 생각은 이렇다. 나는 미술이 이렇게 거창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어쩌면, 미술은 애초에 아름다움이라는 거창함에 관한 무엇도, 주체에 관한 무엇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미술이 아닌 다른 인공물을 대할 때 그러하듯, 대체로 모든 인공물들을 창조하는 동기는 재미, 즉 유희에 대한 욕망인 것 같다. 물론 유희에 대한 자신의 욕망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재미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 여기에 덧붙여져야 되는 것이 이른바 생각, 즉 이 인공물의 재미에 대한 설명이다. 그 설명이 반드시 아름다움만 고려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굳이 아름다움을 배제하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다. 문제는 재미이고, 재미에 대한 이유니까. 나는 이런 완화된 태도가 오히려 아름다움과 올바름과 참됨을 하나로 통합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취향판단(의 한계)에 조금 더 부합하는 것 같다.


재미를 설명해야 하다니, 이것만큼 재미없는 작업이 또 있을까!(물론 나는 설명충이므로 이런 것이 재미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저자 스타니스제프스키가 말한 “주체가 되는 작업”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과 크게 떨어져있는 발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공물에 대해서 생각을 늘어놓는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저 재미를 설명하는 것만으로 나 스스로를, 내 인공물을, 내 생각을 문화적 맥락 안에 자리매길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재미를 추구하며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쉽고도 짜릿한 일인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