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원 - 난쟁이 인류 호빗에서 네안데르탈인까지 22가지 재미있는 인류 이야기
이상희.윤신영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회가 생겨 요 몇 달 동안 과학책을 손에 쥘 기회가 많았다. 과학에 관심’만’ 많은 하드코어 문돌이인 내겐 정말 좋은 일이었다. 그 중엔 유명하지만 읽다가 포기한 책도 있었고(예를 들어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유명한 저자의 좋은 책도 있었다. 그 중에서 누군가에게 선물해야 할 책을 고른다면 나는 단연 이 책, 『인류의 기원』을 고를 것이다.


가장 첫 손에 꼽아야 할 이유는 글이 정말 편하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도 한 몫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문장이 짧다’ 정도로 요약될 좋은 글의 형식적 기준 같은 것을 아득하게 넘어서있다. 분명히 한 줄 한 줄이 정보로 가득한 글임에도, (DNA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는 부분을 설명하는 딱 그 부분만 제외하면) 내가 무언가 모르고 지나가고 있다거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 이런 문장이라면, 저자와 편집자가 전하고 싶은 내용은 다 전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로 편안하게 글을 쓰려면, 저자/편집자/에디터 셋 중에 하나는 자신의 혼을 갈아넣어야 할 것만 같다. 교정/교열로 돈을 벌고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역시나 공식적인 기관(출판사나 잡지사 등)에 소속되어 일하는 사람들의 실력은 이 정도구나 하면서 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다.


또한, 다른 많은 과학책이 그렇지만,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읽는 사람은 스케일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다. 이른바 인간의 근본문제를 다룬다는 어떤 학문이 있다고는 하지만(굳이 철학이라고 덧붙이진 않겠다),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숫자의 단위에 압도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고인류학은 그 모든 학문들 중에서 가장 소규모인 편에 속하지만(우주력으로 따지면 12월 31일에서도 저녁 쯤이나 되어야 시작되는 일이니까), 역설적으로 이게 정말 과학적 관점에서의 ‘인간’의 일(더 정확히는 호모속(!)의 일)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책에 비해서도 더욱 놀라운 부분이 있다. 인류의 역사는, 표준적으로 인정되는 철학의 역사의 딱 1000배다.


앞 문단에서 언급했듯, 이 책은 현재 성인인 사람들(30대 이상)이 교과서에서는 본 적이 없었을 이야기가 꽤 많다. 데니소바 인 연구결과라든가(이건 정말 이 책에서 처음 봤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밝혀진 호모속(! 특히 네안데르탈인)과 현대 인류 사이의 관계, 저자의 지도교수가 지지하는 학설인 인류 기원 다지역 연계설 같은 것이 그렇다. 외모차별이 기본 옵션인 한국사회에서 누군가는 꽤 많이 들어봤을(이른바 ‘개그’ 프로그램에서 많이 나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어디에선가 단어로만 들어본 것 같은 성과를 조금이나마 더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것도 내겐 큰 도움이 되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같은 문돌이들에게 인류학이란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을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이라는 인상이 강한데, 이 책을 통해 고인류학이라는 분야를 접하면서 그 선입견을 깰 수 있었다.


이 책에 등장한 수많은 빽빽한 정보들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 챕터 하나를 꼽아보라면, 나는 12장을 꼽을 것이다. 정말로 인상적이었고, 정말로 새로운 정보였으며,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협력과 이타적 태도는 인류를 둘러싼(특히 내가 주로 공부하는 윤리학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그래서 관련된 책도 많이 찾아보았고 정보도 많이 축적해놓았다고 자부하는 편이다. 게임이론에 기반한 수학적 모델링도 알고 있었고, 최후통첩 게임 같은 심리학 실험은 관련 책에서 너무 자주 인용돼서 약간은 지겨울 지경이고, 유전자 수준에서 협력하는 다른 동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간의 협력을 증명하는 생물학자들의 논증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증명과정은 정말 듣도보도 못한 방식이었다. 고인류의 두개골의 어금니 구멍이 뚫려있는지 막혀있는지 여부로 협력의 역사를 증명하다니! 이 정보는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수다를 떨 때(혹은 언젠가 수업을 하게 될 때) 써먹으리라 다짐했다.


그럼에도 이 분야가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연구하고 밝혀야 하는 분야라는 것 또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과학적 태도’를 강조하면서도 사회적 편견의 개입에 계속 노출되었던 이 학문의 역사가 그 문제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외부 사회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고대인들을 식인종으로 취급했는지 보여주는 첫 챕터, 자신들을 인류의 기원으로 만들고자 했던 (이른바) 강대국들의 다툼, 피부색과 인종에 관한 연구, 고인류 화석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쟁, 인류 기원에 관해 서로 대립하는 학설의 지지자가 서로를 인종주의자라고 비난하는 학계의 풍경, 인류의 사회화와 아이의 양육의 계기를 둘러싼 아버지 가설과 할머니 가설의 경쟁에 이르기까지. 한 편으로 1과 10만 주어진 상황에서 2,3,4,...,9라는 배열을 만들어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이념을 드러내게 되는 학자들의 처지가 짠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연구 성과를 지켜보고 배우기만 하면 되는 입장에선 사회와 연구가 맺는 이런 관계 자체도 매우 흥미로웠다.


인류의 기원은 정말 좋은 책이다.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아서 좋고, 글이 편해서 좋고, 이 책을 읽은 뒤에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좋다. 책이 갖춰야 할 삼박자를 다 갖춘 셈이다. 이 책을 같이 읽어보았으면 했던 글쓰기클래스 수강생이 첫 수업만 듣고 개인사정으로 수강을 취소한 바람에 내겐 아픈 기억이 생겼지만(...), 그 분이 이 글을 본다면, 정말 꼭 말씀드리고 싶다. 이 책, 반드시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