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튀프론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20
플라톤 지음, 강성훈 옮김 / 이제이북스 / 201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플라톤은 『에우튀프론』에서 에우튀프론에게 집요하게 묻는다. “경건함은 무엇입니까?” 그 집요함과 경건함이라는 주제, 둘 다 중요하다. 이 두 가지 모두, 좁은 의미에서는 철학의 영역에서, 넓은 의미에서는 학문 전체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태도이자 소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사람들은 정의내리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 그건 그래서 그렇고. 이런 정의는 그 한계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는 한, 모든 무엇은 모든 저것이라는 식으로 쉽게 전체를 가리키게 마련이다. 이런 정의는 보편이라는 형식을 띠지만 실제로는 그런 정의를 만들어낸 사람의 편견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보편성을 획득하기란 정말 어렵다.


에우튀프론은 이런 난관에 부딪힌 사람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가, 항변도 해보았다가, 말도 돌려보았다가, 급기야는 “에라, 모르겠다”며 도망을 가버린다. 심지어 자신의 의견이 사회 다수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렇다.


반면에 사람들은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꺼려한다.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귀기울여 듣고, 자신이 이해할만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고,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들어 반응을 얻어낼 수 있는 말을 건네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단계에서라도 삐끗하면, 엉뚱한 답변이 돌아오거나 상대방의 분노를 사게 마련이다.


소크라테스는 성공적으로 질문하는 사람일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에 대한 내 평가는 다소 박한 편이다. 집요함 하나만큼은 높이 살 만 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대화상대가 이런저런 말을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것처럼 보이는 만큼이나, 소크라테스 또한 상대방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알면서도 이상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에우튀프론 본인도 긴가민가 하는 부분에선 트릭을 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 책의 핵심으로 꼽히는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받는가, 사랑하기 때문에 경건한가?' 에 대한 논의 부분이 그렇다. 상대를 논쟁에서 넉다운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기술을 걸어본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전면적으로 다루는 주제인 ‘경건함’에 관한 두 사람의 생각은 한 번쯤 음미해볼만하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말하듯, 이것은 “신들조차도 합의할 수 없을지 모르는” 유형의 문제다. 호오, 취향, 미추 등, 아마 뭉뚱그리면 가치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대체로 상황에 맞춰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게 마련이고, 실제로 이것은 우리 삶에 큰 도움이 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반성하지 않는 삶에, 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논리적/실천적) 일관성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설사 그것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다가 에우튀프론 마냥 다이달로스의 순환논증에 빠져 허우적댈지라도 이런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현실에서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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