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사피엔스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한동안 열풍이 불었던 책을 이제야 읽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잘 읽힐만한 좋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좋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은 뒤에야 이 책을 읽게 되어서, 약간은 싱겁고 실망한 부분도 있다.)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의 연대기다. 이 말을 강조해둘 필요가 있는데, 인간의 역사 이상의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기록과 함께 시작된다. 기록에는 문자가 동원된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가 발명되기 전, 기록되지 않았지만 인간이 살았던 것은 분명한 시대를 선사시대/신화의 시대라고 부르곤 한다. 그러나 사피엔스의 연대기는 신화로도 기록되지 않은, 정말로 까마득한 옛날로부터 시작한다. 인간, 그러니까 호모 ‘속’이 다른 종들로부터 분리되었던 그 시기 말이다. 연대로 따진다면 대충 백만 년 단위다. 호모 속은 자연계에서 결코 강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호모 속이 여러 종으로 분화해 에렉투스, 하빌리스, 네안데르탈, 사피엔스가 된 뒤 한참 동안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호모 속이, 그 중에서도 물리적으로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던 사피엔스 종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추기까지, 다섯 번의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렇다. 상상력의 생물학적 토대를 갖춘 인지혁명, 공동체의 관점에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농업혁명,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을 가능케 한 원칙으로 작동한 제국(주의)체제, 사물의 표준을 확립함으로써 교환의 생활 생태계를 만든 화폐(와 상업 혁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식과 정보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바꿔놓은 과학 혁명.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른 모든 사건들이 그렇지만, 하라리의 관점에서 이 사건들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인류가, 아니 호모 사피엔스 종의 개별 구성원들이 이 역사의 과정을 뒤집어 과거의 생활방식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상상력이라는 능력을 얻게 된 이상, 모든 인류는 로빈슨 크루소가 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개인의 관점에서는 노동량은 늘어나고 소득은 줄어들고 생활의 반경은 줄어들었지만, 농사를 지은 뒤에 수렵채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 속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제국 체제의 성립 이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제국 체제의 수장이 되고 싶어했지 체제를 해체하는 아나키적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진 않았다. 화폐의 이점은 단순한 물물교환체제의 장점을 압도했다. 그 어떤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장벽도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렇게 사피엔스는 뒤돌아볼 새도 없이(또는 뒤돌아볼 수도 없이) 지금의 위치까지 달려왔다.


이 다섯 번의 혁명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역사 이전에 이미 상당한 정도로 진행된 과정이었다. 나머지 세 가지는 이른바 “고전”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또는 문화인류학/고고학 연구를 통해서 해독할 수 있는 문자기록을 살펴보며 읽어낼 수 있는 과정이다. 내 눈에 더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었던 부분은 앞의 두 가지 혁명, 선사시대 이야기였다. 최근 몇 십년 동안 이 시기에 대한 연구성과는 말그대로 “풍부하게” 쌓였다. 이전의 인류학자들이 범했던 인종주의적 편견도 어느 정도 극복된 상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시기에 사피엔스가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 수 없기 때문에(말 그대로 자료가 없으므로!) 상상이 더 많이 개입할 수도 있다. 압도적으로 많이 인용된 각주 속에서, 독자는 놀라운 연구성과와 그에 경합하는 상상력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추측컨대, 상당수의 한국어 독자에게 이 책의 초반부 이야기는 기존에 알던 것과 많이 다를 것이다. 농업혁명으로 인간은 더욱 불행한 상태에 빠졌다는 것, 수렵채집 생활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고되지 않았다는 것, 그 시기에도 이미 인간은 꽤 대규모의 사회를 구성할 만큼 충분히 인지적으로 발달해 있었다는 것, 그 덕분에 만년 전에도 인간은 그 때부터 생태계의 파괴자였다는 것. 그간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바뀐 “고대 사피엔스의 상”을 압축적으로 전해준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 사피엔스의 삶이 우리의 삶의 모습과 결코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는 서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전반부는 매우 훌륭하다.


이 책의 후반부의 강점은 전반부의 풍부함과는 사뭇 다르다. 주석이 양이 대폭 줄어들고, 대신 하라리가 나름대로 정리한 인류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쉴틈없이 펼쳐진다. 인용표시가 없는 이유는 개별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정확하게(선사시대에 대한 서술처럼 “과학적으로”) 하려면 끝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기존에 알고 있던 엄청난 사건이든,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그가 보기에 아주 의미가 있는 사건이든, 그의 서술 앞에서는 대체로 공평하게 똑같은 정도로 “후려쳐진” 상태로 책 속에서 펼쳐진다.


이런 축약은 “사피엔스의 역사”를 서사적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저자의 목적에 잘 물려들어간다. 그 생물학적 토대는 이미 선사 시대에 모두 갖추었지만, 어쨌든 그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세 가지 혁명, 즉 제국(주의)체제와 화폐(와 상업) 혁명 그리고 과학혁명에 대한 그의 설명이 그렇다. 이 세 가지는 처음에는 각자의 이유와 목적을 갖고 시작되었지만, 과학혁명의 발생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피엔스의 종적 변화라는 한 차원 더 높은 목적을 위해 기능을 수행한다.


광범위한 단일통치체제만을 의미했던 제국 체제는 정복 사업을 통해 과학적 지식의 확장에 이바지한다. 과학적 지식의 확장은 기술 수준의 향상을 불러오고, 재화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려 자본을 증식시킨다. 자본 증식에 의한 상업의 발전은 다시 제국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하라리가 지적하기에, 이런 상호 피드백이 바로 전근대적이고 고립된 제국체제와 근대적 제국의 차이다. 역사 속에서, 특히 근대 이후 일어났던 모든 커다란 사건은 이 근대적 피드백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피드백을 설명함으로써, 예전에는 개별적인 것처럼 보였던 각 사건의 독특한 의미가 드러난다.


이렇게 흩어진 구슬을 하나의 서사에 꿰어놓은 하라리의 필력에 감탄하는 동안에도, 그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는 독자의 몫이다. 인문사회과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의 후반부에 언급되는 여러 사건과 그 함축에 관한 논의가 그렇게 몹시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상업이 인류 사회에 주는 충격, 제국의 의미와 그 합법성, 과학혁명의 실제 진행과정. 이 모두는 지금 이 시대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이 고민하고 있는 커다란 주제들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후려쳐진 하라리의 설명의 일부 또는 전체에 반대할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중에 특히 제국주의에 다소간 유보적인 그의 시선이 못내 아쉽고 불편했다. 우선 단일통치체제와 탄력적 국경 그리고 다문화주의 조합으로 구성된다는 제국 체제에 대한 다소 느슨한 규정은(내가 아는 한 이것이 “제국” 개념에 대한 최근의 트렌드다), 제국 체제에 대한 또 다른 통찰을 제공해주기도 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유형의 제국 체제에 대해서는 눈이 어두워진다. 이 통찰과 맹점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그 “또 다른 제국체제”인) 일제의 피해자의 후손이라는 우리의 위치 때문이다. 하라리와 비슷한 수준의 거시적 관점에서 일본의 제국주의는 아마 서유럽과 영국/미국의 유형과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도인의 경험이 우리와 같을 수 없고 그래서 독립운동의 방법론에서 간디와 김구의 차이가 벌어지듯, 영국과 일본의 제국주의가 완전히 같다고도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부분은 현재 연구자들이 열심히 파고 있으니, 나같은 한량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것 같긴 하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서 단번에 떠오르는 게임이 있을 것이다. 농업, 명상, 종교, 화폐, 신학, 관료제, 시장경제, 자연과학, 차차 테크트리를 밟아서 미래 기술까지. 바로 시드마이어의 문명이다. 물론 그 게임이 다루는 시대는 이 책이 다루는 시대에 비해 훨씬 좁긴 하다. 기원전 4천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 책이 주는 역사에 대한 희열과 몰입감만큼은, 세계 3대 폐인게임 중 하나라고 불리는 그 게임에 못지 않다는 말만은 남겨놓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