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대선이 코앞이지만 정치는 더욱 후퇴하는 느낌이라 투표할 마음이 사라졌다는 마음 많이들 갖고 있을 것이다.

정책과 공약은 안 보이고 포퓰리즘만 난무한다.

찍고 싶은 공약을 가진 자가 없으니 누구를 투표할지 망설여진다.

최고가 아닌 차선을 선택하자는 말도 나돈다.

근데 그게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을까?

이쪽은 죽어도 싫으니 저쪽을 차라리 뽑겠다는 심산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런 유권자들을 정치자들은 환호할지도 모른다.


2. 미백

얼마 전 어느 북플 친구분에게서 보고 담아놓은 책이다.

어렸을 적 나는 무척 까무잡잡했는데 왠지 모르게 그게 너무 싫어서 화장품을 사용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온갖 미백 제품을 다 사용했다. 

미백이 대체 뭐길래~ 화장품을 사용하면 하얘진다니까 그 까무잡잡함이 싫어서 하얗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미백 제품을 사용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피부색 자체가 변화되진 않는다. 욕망일 뿐.

저자는 미백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흑백의 경계와 인종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담론을 제시한다.


3. 만들어진 유대인

한국은 현대 이후에도 민족이란 개념이 뚜렷한 사회이다.

역사학계에서도 과도한 민족성은 경계 및 지양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민족적 혈통을 강조하며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경우는 그동안 너무 많았으니.

유대인이자 이스라엘인이기도 한 저자는 단일 종족으로서 ‘유대인’이라는 신화, 단일 민족국가로서 ‘이스라엘’이라는 신화를 해체하고자 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폭력적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을 통해서 민족이라는 동질성 이름 아래 불평등과 배제의 정치를 강화하는 기능에 대해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4. 반란의 매춘부

공교롭게도 지난주에 이어 오월의 봄에서 나온 책이다.

성노동자이자 성노동자 권리 운동 활동가인 저자들이 쓴 책으로 이들은 매춘을 둘러싼 이분법에 반대하고 있다. 

매춘이 폭력인지 노동인지, 그것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따지는 추상적 논의 속에서 성노동의 현장, 구체적이고 다양한 성노동자의 삶과 목소리는 지워지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 매춘을 해야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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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4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4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메이지 유신에 의해 일본은 비로소 근대국가가 되었고,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서양식 군제와 무기에 의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다. 이 힘을 바탕으로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가 일찍이 꿈꾸었으나 실패했던, 대륙 진출을 재차 도모했다. 그 길목의 초입에 조선이 있었기에, 그들은 가장 먼저 조선 병탄倂呑에 나섰다.
이후 이 땅에서는 열강의 힘과 실리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고 능욕을 당하는 치욕의 역사가 지속되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에다 올림픽에서 메달깨나 탄다고 해서 이런 현실을 벗어났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헛된 착각이고 망상이다.

이들 ‘덴쇼 소년사절단’이 남긴 자취는 무엇이 있을까? 가톨릭 포교를 제외하고 이들이 일본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바로 근대적 인쇄술이다. 효율적인 포교를 위해서는 성서가 필요했고, 성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양의 인쇄술을 들여와야 했기 때문에 이들 사절단에는 처음부터 인쇄술을 습득할 목적의 소년 두 명이 동행했다. 인쇄술은 지체 높은 무사 가문의 소년들이 배울 수 없는 것이므로, 아예 이를 배울 평민 자제를 뽑아 같이 보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져온 구텐베르크 인쇄기로 일본 최초의 인쇄본 일본어 성서가 만들어지게 되니, 일본 근대 인쇄술의 출발 역시 이들 가톨릭 사절단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이 가져온 서양 문물에는 인쇄기 말고도 서양 악기와 항해용 지도 등이 있다.

일본의 소년사절단 파견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들에 의해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가 유럽인들 사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유럽에서 ‘자신들의 이웃나라’에 대해 말하기 이전 조선은 그야말로 ‘고요한 은둔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들로 인해 조선에도 서서히 개국의 여명이 밀어닥치게 되었던 것이다.

적극적인 해외 진출은 일본 조선술과 항해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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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신문이 오배송되는 바람에 보지 못했다가

결국 인터넷으로 보는데 놀라운 기사를 보았다.


뉴욕타임스에서 '간과된 인물들' 시리즈(1851년 이후 사망 당시 제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을 재조명하는 꼭지)에서 차학경을 실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는 코로나19 사태를 충실히 보도하는 매거진으로 떠오른 바 있다.)


제공 이미지: 연합뉴스


차학경은 미국에서 한국계 여성 예술가로 활동했다.

그녀는 부산에서 태어나 열한 살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에서 학위를 딴 뒤 프랑스로 유학을 가 영화 제작과 이론을 공부했고 사진과 영화 등에서 여러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 '딕테'라는 작품에서는 유관순과 잔다르크, 자신과 만주 태생인 어머니, 가족의 삶을 사진과 함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최근 미 대학에서 페미니즘과 아시아계 연구 관련 수업 교재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982년 그녀 나이 31살에 연쇄살인범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녀의 예술활동이 찬란하게 꽃피워보기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니 너무 안타깝고 충격적이었다.


이제라도 뉴욕타임스에서 그녀를 다룬 기사를 실어주어 감사한 마음이다.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 장바구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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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1-12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이런 일이???
연쇄살인범에 의해 더 피워 보지도 못한 인생이네요.

거리의화가 2022-01-12 20:32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기사 읽고 너무 안타까웠어요. 늦었지만 이름을 알게 되어 다행입니다.

수이 2022-01-12 1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캐시박홍이 마이너 필링스에서 차학경 이야기 다룬 후 조금 더 많이 거론되는 거 같아요. 뒤늦게라도 번역본 재출간되면 좋겠어요.

거리의화가 2022-01-12 20:33   좋아요 0 | URL
비타님 알고 계셨군요. 재조명이 되었으니 번역본이 가까운 시일 내 나오면 좋겠어요.

페넬로페 2022-01-12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학경, 이름 기억해야겠어요~~
연쇄살인마에게 살해 당하다니!
너무 맘 아프네요^^

거리의화가 2022-01-12 20:34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하필 그렇게 허망하게 가다니 너무 슬펐어요 저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이름을 기억했답니다. 다행이에요.
 

오랫동안 영국의 상층 계급과 지식분자들은 이 나라가 민족주의라고 하는 병균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다고 확신해왔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민족주의란 식견이 좁은 대륙 유럽인의 사고방식이며 영국인은 언제나 세계주의적 관점에서 사고해왔다. 오늘날에는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영국은 어느 정도는 민족주의가 없는 민족국가였다. 영국은 제국적 민족주의라는 역설로 가득하다.
영국의 민족의식은 18세기 90년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민족의식의 동력은 주로 당시 영국제국이 이룩한 빛나는 성취에서나왔다.173) 영국인(남성)의 눈으로 볼 때 영국의 지고의 지위는 (영국이) 정복한 예술과 무역 방면의 성취 그리고 영국 통치자들이 그신민에게 베푼 여러 가지 선행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물이었다. 영국인의 자의식 속에는 유색인종 —— 반드시 문명과 규칙으로 교화시켜야 할 대상 - 에 대한 우월감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에 대한상대적 우월감도 자리 잡고 있었다(영국처럼 거침없이 해외각지에 세력을 확장한 나라는 없었다). - P1214

북해의 거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이 나라가 제국으로 흥기하던 초기에 세 가지 유리한 요인이 작용했다. ①네덜란드 무역패권의 쇠락과 동인도회사의 상업적 성공. ② 7년전쟁을 통해 세계에 확장된 (1763년의 「파리조약을 통해 국제사회의 인정받게 된) 영국의 세력. ③ 부분적으로 아시아의 부유한 지역에 대한(영국의) 통치권 장악 그리고 이 지역으로부터 들어오는 상당한 재정수입. 이러한 배경 이외에도 영국의 국내 재정은 다른 어떤 나라에비해서도 안정된 상태였고 영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해군을 확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겠다는 확고한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해상에서 나폴레옹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실력을 갖추었다. - P1216

영국이 전 지구적 제국체제를 이용해 추구했던 것은 이기적인 강도형 패권과는 다른 선량한 패권이었다. 영국이 무상으로 제공한공공재(公共財) — 지구상의 모든 해역을 지키는 법과 질서(남은 해적무리의 소탕을 포함하여), 민족과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유재산권, 주거 이전의 자유, 평등주의의 원칙에 바탕을 둔 보편적 관세제도—덕분에 다른 나라들은 최혜국 조항을 통해 자동적으로 자유무역 체제에 참여했다. 최혜국 조항은 전 지구적 자유화에서 가장 중요한 법률제도였다. 최혜국 조항은 한 구성원이 협정에 따라 다른 구성원을 우대할 경우 나머지 구성원에게도 동일한 대우를 하도록 규정했다. - P1224

19세기의 마지막 30, 40년 동안 몇몇 신흥 강국이 국제무대에서 점차로 두각을 나타냈고 영국의 경제적 지위는 기타 국가에 비해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러한 외부 정세의 변화에 직면한 영국 정치가들은 시국의 변화에 순응할 줄 아는 뛰어난 능력을 과시했다. 영국의패권적 지위가 경쟁을 이겨내고 유지되기는 어려웠지만, 달리 말해영국은 이미 모든 사태의 발전을 자신의 생각대로 조종할 수 없게 되었지만, 영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지금까지의 성과를 방어적으로 지켜내면서 새로운 경제적 영토적 기회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중간노선을 성공적으로 찾아냈다. 1차 대전이 끝난 뒤 영국제국은 심지어 국제연맹의 비호 아래 ‘위임통치’의 형식으로(이란, 요르단, 팔레스타인 등) 자신의 세력범위를 다시 확대했다. - P1227

1815-1914년의 시기에, 1870년 이후로 국제무대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약간 약화된 사실을 제외한다면, 팍스 브리타니카는 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 세계에서 가장 큰 식민제국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 나아가 그 식민제국을 다른 강대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 신중하게 확장할 수 있는 능력. 2 경제발전의 차이를 이용하고 협약에 의한 특권(‘불평등조약’)과 ‘다모클레스의 칼’을 동원한 지속적인 개입(‘포함외교’)을 통해 식민제국의 공식적인 판도를 넘어서 유럽 국가체계 밖에 있는 많은 국가(중국, 오스만제국, 라틴아메리카 등)에 대해 강력하고도 비공식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 204) ③ 국제사회에 영국 시민이 아니라도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자유무역체제, 통화체제, 국제법 조항 등)를제공할 수 있는 능력, 영국제국의 독특한 점은 영토적 핵심(‘공식적인 제국‘)이 두 개의 동심원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점이다. 하나는 명확한 경계선이 없이 영국이 그중심에서 ‘비공식적 수단을 통해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공간이며, 다른 하나는 영국이 만들기는 했지만통제할 수는 없는 세계경제와 권력질서의 전 지구적 공간이었다. 영국제국이라는 전 지구적 세력은 이처럼 방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유일한 강대국이었던 19세기 중엽의 수십 년 동안에도 영국의모든 경제활동을 장악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국의 경계를 초월하는 전 지구적 자유무역 정책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제국의 또 하나의 역설이었다. 공업화 시대와 고전적인 ‘팍스 브리타니카‘ 시기의 제국의 중요성은 미국을 상실하기이전이나 1929년의 대공황 이후의 시기보다 훨씬 덜 중요했다. - P1232

제국주의자의 선전이 사실을 베일로 가려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은 ‘민족의 감옥’이라는 비난이 현실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있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하나의 제국 또는 식민지에서 모든 생활은 제국의 구조 또는 식민상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국의 세계를 보다 보편적인 세계사의 관점에서 (이 책의 접근방식과 같이) 이해하려 하지 않고 하나의 폐쇄된독립공간으로 다룬다면 의미가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중간의 길은 찾기 어렵다. 탈식민화 시대의 전통적인 식민주의 비판자들이 식민관계를 보편적인 왜곡 상태로 본 주장은 옳았다. 가상의 정상적인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상적인 식민자나 피식민자 양쪽 모두 인격상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식민 공간의모든 생활을 타율과 강압의 관계로 이해한다면 식민자는 전지전능하다는 환상을 재차 확인해주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 P1235

제국이 강조하는 것은 차이다. 식민시대 이후의 비판자들은 대체적으로 이것이 인류 평등의 원칙에 대한 중대한 침범이라고 공격한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단순히 도덕적 관점에서 판단해서는 안된다. 19세기 후반에 인종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유형화가 강화되고 그것이 인종차별로 흐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P1242

19세기 중반 이후로 제국은 집단의 자기인식 형성의 중요한 무대였다. 이 과정은 여러 제국의 말기에 ‘민족문제‘로서 논쟁의 화두가되기는 했지만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다. 상당한 정도로 성숙된 상태에서 제국에 정복된 몇몇 중요 민족—1882년의 이집트, 1884년의베트남, 1910년의 조선 —은 식민시기가 종결된 후 옛 전통을 회복하고 중단된 민족사를 다시 이어갔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예외에 속했다. 통상적인 경우 제국은 훗날 자신과 맞서게 될 세력을 무의식적으로라도 태어나게 한 적이 없었다. - P1243

제국은 단방향 명령전달 체계였다. 이 명령전달 체계는 강한 의지를가진 현장 결정권자‘의 뜻에 따라 가끔은 느슨해지기도 했다. 제국의 영리한 정치가들은 그들이 내리는 명령을 실행 가능한 범위 내로제한하고 어떠한 가혹한 요구도 최저선을 넘지 않게 했다. 활시위를지나치게 당겨서는 안 되며, 피지배 민중의 눈에 제국이 단순히 공포기구로 비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제국의 통치술의 핵심은 비용과 수익을 최적화하고 피지배 민중에게 제국을 떠나는 것보다 제국 안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 P1244

‘민족‘의 이름으로 단결하는 것은 19세기의 새로운 현상이었고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지녔었다.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지식분자와 그 추종자들은 제국이란 외피 아래서 독립된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한 구상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많은 나라에서 이런 구상은 1919년에서부터 1980년 사이의 어느 한 시점에 현실로 바 1919년에 이집트, 인도, 중국, 조선 그리고 일부 아시아 아프리카국가에서 잇달아 등장한 대규모 항의 활동은 바로 민족주의가 낳은산물이었다. 한편으로 민족주의는 독립되고 안정적인 일부 국가에서도 정체성을 표현하는 주류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프랑스, 잉글랜드/브리튼, 독일, 일본 ‘민족’이라 불렀고 그것과 어울리는 상징체계도 발명했다. 민족마다 다른 민족과의 차이를 찾아내려 노력했고 다른 민족을 경쟁상대로 생각했다. ‘이민족’ 집단과 외래사상에 대한 관용도는 크게 떨어졌다. - P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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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제국은 개방된 ‘야만의 프런티어’가 없는 유일한 제국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제국에는 이민형 식민지도 없었다. - P1181

프랑스의 제국주의는 정치 방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보잘것없는 번식능력을 보여주었다. ‘시민’의 나라가 민주주의를 수출한 적이 없었다. 프랑스의 식민정권은 대부분 극단적으로 독재적인 정권이었다. 훗날 탈식민화 과정에서 서아프리카만 상대적으로 평온을 유지하며 많은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 초기 프랑스 확장사에서 프랑스가 겪은 실책의 사례는 영국보다 훨씬 더 많았다. 1882년, 영국은 프랑스인의 코앞에서 이집트를 빼앗아감으로써 프랑스에게 치욕의 일격을 날렸다. 프랑스의 확장이 낳은 최대의 문화적 효과는 프랑스어의 전파였다. 이 밖에도 식민지에서 새롭게 등장한 교육받은 소수 계층에게는 ‘동화’의 문이 열려 있었다. 종주국 프랑스는 이들 식민지 지식인을 통해 식민지의 급진적인 문화적 변혁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진정한 의미에서 응집력이 있는 제국문화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 P1192

독립 주권국이 최종적으로 지배권을 장악하고, 주로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권력이 방사됨으로써 작동하는 제국 형성의 모형을 ‘초보적’ 제국건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제국건설은 장기적인 전략의 배경을 가진 경우가 거의 없었다. 역사학자 존 실리는 1883년—영국이 치밀한 계획 끝에 이집트를 점령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영국의 정복은 ‘얼빠진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유명한 논평을 내놓았다. 장기적인 계획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실리의 평가는 결코 설득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며 다른 유럽제국에도 같은 평가가 적용될 수 있다. - P1198

‘자발적인’ 복속은—삼각관계의 압박이든 종속관계의 직접적인 인정이든—제국의 확장 방식 가운데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심지어 2차 대전 뒤의 미국 패권체계 가운데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현대 노르웨이의 역사학자 게이르 룬데스타트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일종의 "초청받은 제국"이다. - P1199

대형 플랜테이션과 특허 회사의 활동 지역은 통상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공간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엘베강 동쪽의 융커의 장원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법률은 간접적으로만 작용했다.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심지어 법률로 보호받는 영지를 세울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특허회사가 아시아에서 철저하게 몰락한 뒤로 아시아에는 새로운 반관영 식민 대리기구가 생겨났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였다. - P1201

메이니그의 관점에 따르면 19세기 중엽의 미국은 네 가지 형태—지역사회의 집합체, 연방, 민족, 제국—를 한 몸에 갖춘 국가였다. - P1210

미국의 백인과 흑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외래인’이자 ‘신참자’였다. 문화의 ‘용광로’란 신화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고 민족 전체의 기본인식도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 민족주의의 ‘우리’와 ‘그들’이란 이분법적 인식도 미국에서는 주류가 될 수 없었다. ‘우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통일된 목소리가 없었다. 19세기 미국인은 사회적 차이는 정밀한 계급제도에 의해 결정되면, 인종은 질서의 표준으로서 불가결하나 동시에 불안정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세계관의 장벽이었으며 현실세계에서 각종 격리제도로 구체화되었다. - P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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