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영국의 상층 계급과 지식분자들은 이 나라가 민족주의라고 하는 병균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다고 확신해왔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민족주의란 식견이 좁은 대륙 유럽인의 사고방식이며 영국인은 언제나 세계주의적 관점에서 사고해왔다. 오늘날에는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영국은 어느 정도는 민족주의가 없는 민족국가였다. 영국은 제국적 민족주의라는 역설로 가득하다.
영국의 민족의식은 18세기 90년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민족의식의 동력은 주로 당시 영국제국이 이룩한 빛나는 성취에서나왔다.173) 영국인(남성)의 눈으로 볼 때 영국의 지고의 지위는 (영국이) 정복한 예술과 무역 방면의 성취 그리고 영국 통치자들이 그신민에게 베푼 여러 가지 선행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물이었다. 영국인의 자의식 속에는 유색인종 —— 반드시 문명과 규칙으로 교화시켜야 할 대상 - 에 대한 우월감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에 대한상대적 우월감도 자리 잡고 있었다(영국처럼 거침없이 해외각지에 세력을 확장한 나라는 없었다). - P1214

북해의 거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이 나라가 제국으로 흥기하던 초기에 세 가지 유리한 요인이 작용했다. ①네덜란드 무역패권의 쇠락과 동인도회사의 상업적 성공. ② 7년전쟁을 통해 세계에 확장된 (1763년의 「파리조약을 통해 국제사회의 인정받게 된) 영국의 세력. ③ 부분적으로 아시아의 부유한 지역에 대한(영국의) 통치권 장악 그리고 이 지역으로부터 들어오는 상당한 재정수입. 이러한 배경 이외에도 영국의 국내 재정은 다른 어떤 나라에비해서도 안정된 상태였고 영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해군을 확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겠다는 확고한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해상에서 나폴레옹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실력을 갖추었다. - P1216

영국이 전 지구적 제국체제를 이용해 추구했던 것은 이기적인 강도형 패권과는 다른 선량한 패권이었다. 영국이 무상으로 제공한공공재(公共財) — 지구상의 모든 해역을 지키는 법과 질서(남은 해적무리의 소탕을 포함하여), 민족과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유재산권, 주거 이전의 자유, 평등주의의 원칙에 바탕을 둔 보편적 관세제도—덕분에 다른 나라들은 최혜국 조항을 통해 자동적으로 자유무역 체제에 참여했다. 최혜국 조항은 전 지구적 자유화에서 가장 중요한 법률제도였다. 최혜국 조항은 한 구성원이 협정에 따라 다른 구성원을 우대할 경우 나머지 구성원에게도 동일한 대우를 하도록 규정했다. - P1224

19세기의 마지막 30, 40년 동안 몇몇 신흥 강국이 국제무대에서 점차로 두각을 나타냈고 영국의 경제적 지위는 기타 국가에 비해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러한 외부 정세의 변화에 직면한 영국 정치가들은 시국의 변화에 순응할 줄 아는 뛰어난 능력을 과시했다. 영국의패권적 지위가 경쟁을 이겨내고 유지되기는 어려웠지만, 달리 말해영국은 이미 모든 사태의 발전을 자신의 생각대로 조종할 수 없게 되었지만, 영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지금까지의 성과를 방어적으로 지켜내면서 새로운 경제적 영토적 기회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중간노선을 성공적으로 찾아냈다. 1차 대전이 끝난 뒤 영국제국은 심지어 국제연맹의 비호 아래 ‘위임통치’의 형식으로(이란, 요르단, 팔레스타인 등) 자신의 세력범위를 다시 확대했다. - P1227

1815-1914년의 시기에, 1870년 이후로 국제무대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약간 약화된 사실을 제외한다면, 팍스 브리타니카는 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 세계에서 가장 큰 식민제국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 나아가 그 식민제국을 다른 강대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 신중하게 확장할 수 있는 능력. 2 경제발전의 차이를 이용하고 협약에 의한 특권(‘불평등조약’)과 ‘다모클레스의 칼’을 동원한 지속적인 개입(‘포함외교’)을 통해 식민제국의 공식적인 판도를 넘어서 유럽 국가체계 밖에 있는 많은 국가(중국, 오스만제국, 라틴아메리카 등)에 대해 강력하고도 비공식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 204) ③ 국제사회에 영국 시민이 아니라도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자유무역체제, 통화체제, 국제법 조항 등)를제공할 수 있는 능력, 영국제국의 독특한 점은 영토적 핵심(‘공식적인 제국‘)이 두 개의 동심원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점이다. 하나는 명확한 경계선이 없이 영국이 그중심에서 ‘비공식적 수단을 통해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공간이며, 다른 하나는 영국이 만들기는 했지만통제할 수는 없는 세계경제와 권력질서의 전 지구적 공간이었다. 영국제국이라는 전 지구적 세력은 이처럼 방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유일한 강대국이었던 19세기 중엽의 수십 년 동안에도 영국의모든 경제활동을 장악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국의 경계를 초월하는 전 지구적 자유무역 정책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제국의 또 하나의 역설이었다. 공업화 시대와 고전적인 ‘팍스 브리타니카‘ 시기의 제국의 중요성은 미국을 상실하기이전이나 1929년의 대공황 이후의 시기보다 훨씬 덜 중요했다. - P1232

제국주의자의 선전이 사실을 베일로 가려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은 ‘민족의 감옥’이라는 비난이 현실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있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하나의 제국 또는 식민지에서 모든 생활은 제국의 구조 또는 식민상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국의 세계를 보다 보편적인 세계사의 관점에서 (이 책의 접근방식과 같이) 이해하려 하지 않고 하나의 폐쇄된독립공간으로 다룬다면 의미가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중간의 길은 찾기 어렵다. 탈식민화 시대의 전통적인 식민주의 비판자들이 식민관계를 보편적인 왜곡 상태로 본 주장은 옳았다. 가상의 정상적인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상적인 식민자나 피식민자 양쪽 모두 인격상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식민 공간의모든 생활을 타율과 강압의 관계로 이해한다면 식민자는 전지전능하다는 환상을 재차 확인해주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 P1235

제국이 강조하는 것은 차이다. 식민시대 이후의 비판자들은 대체적으로 이것이 인류 평등의 원칙에 대한 중대한 침범이라고 공격한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단순히 도덕적 관점에서 판단해서는 안된다. 19세기 후반에 인종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유형화가 강화되고 그것이 인종차별로 흐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P1242

19세기 중반 이후로 제국은 집단의 자기인식 형성의 중요한 무대였다. 이 과정은 여러 제국의 말기에 ‘민족문제‘로서 논쟁의 화두가되기는 했지만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다. 상당한 정도로 성숙된 상태에서 제국에 정복된 몇몇 중요 민족—1882년의 이집트, 1884년의베트남, 1910년의 조선 —은 식민시기가 종결된 후 옛 전통을 회복하고 중단된 민족사를 다시 이어갔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예외에 속했다. 통상적인 경우 제국은 훗날 자신과 맞서게 될 세력을 무의식적으로라도 태어나게 한 적이 없었다. - P1243

제국은 단방향 명령전달 체계였다. 이 명령전달 체계는 강한 의지를가진 현장 결정권자‘의 뜻에 따라 가끔은 느슨해지기도 했다. 제국의 영리한 정치가들은 그들이 내리는 명령을 실행 가능한 범위 내로제한하고 어떠한 가혹한 요구도 최저선을 넘지 않게 했다. 활시위를지나치게 당겨서는 안 되며, 피지배 민중의 눈에 제국이 단순히 공포기구로 비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제국의 통치술의 핵심은 비용과 수익을 최적화하고 피지배 민중에게 제국을 떠나는 것보다 제국 안에 남아 있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 P1244

‘민족‘의 이름으로 단결하는 것은 19세기의 새로운 현상이었고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지녔었다.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지식분자와 그 추종자들은 제국이란 외피 아래서 독립된 민족국가를 세우기 위한 구상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많은 나라에서 이런 구상은 1919년에서부터 1980년 사이의 어느 한 시점에 현실로 바 1919년에 이집트, 인도, 중국, 조선 그리고 일부 아시아 아프리카국가에서 잇달아 등장한 대규모 항의 활동은 바로 민족주의가 낳은산물이었다. 한편으로 민족주의는 독립되고 안정적인 일부 국가에서도 정체성을 표현하는 주류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프랑스, 잉글랜드/브리튼, 독일, 일본 ‘민족’이라 불렀고 그것과 어울리는 상징체계도 발명했다. 민족마다 다른 민족과의 차이를 찾아내려 노력했고 다른 민족을 경쟁상대로 생각했다. ‘이민족’ 집단과 외래사상에 대한 관용도는 크게 떨어졌다. - P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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