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에 의해 일본은 비로소 근대국가가 되었고,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서양식 군제와 무기에 의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다. 이 힘을 바탕으로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가 일찍이 꿈꾸었으나 실패했던, 대륙 진출을 재차 도모했다. 그 길목의 초입에 조선이 있었기에, 그들은 가장 먼저 조선 병탄倂呑에 나섰다.
이후 이 땅에서는 열강의 힘과 실리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고 능욕을 당하는 치욕의 역사가 지속되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에다 올림픽에서 메달깨나 탄다고 해서 이런 현실을 벗어났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헛된 착각이고 망상이다.

이들 ‘덴쇼 소년사절단’이 남긴 자취는 무엇이 있을까? 가톨릭 포교를 제외하고 이들이 일본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바로 근대적 인쇄술이다. 효율적인 포교를 위해서는 성서가 필요했고, 성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양의 인쇄술을 들여와야 했기 때문에 이들 사절단에는 처음부터 인쇄술을 습득할 목적의 소년 두 명이 동행했다. 인쇄술은 지체 높은 무사 가문의 소년들이 배울 수 없는 것이므로, 아예 이를 배울 평민 자제를 뽑아 같이 보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져온 구텐베르크 인쇄기로 일본 최초의 인쇄본 일본어 성서가 만들어지게 되니, 일본 근대 인쇄술의 출발 역시 이들 가톨릭 사절단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이 가져온 서양 문물에는 인쇄기 말고도 서양 악기와 항해용 지도 등이 있다.

일본의 소년사절단 파견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들에 의해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가 유럽인들 사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유럽에서 ‘자신들의 이웃나라’에 대해 말하기 이전 조선은 그야말로 ‘고요한 은둔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들로 인해 조선에도 서서히 개국의 여명이 밀어닥치게 되었던 것이다.

적극적인 해외 진출은 일본 조선술과 항해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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