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저녁에 진교역(陳橋驛, 하남성 봉구현 동남쪽)에서 유숙하는데, 장사(將士)들이 서로 더불어 모의하여 말하였다.
"주상은 어리고 약하여서 우리들이 죽을힘을 내어 국가(國家)를 위하여 적(賊)을 깨뜨려도 누가 이를 알아주겠는가! 먼저 점검(點檢, 조광윤)을 세워서 천자로 삼는 것만 같지 아니하며, 그런 다음에 북방정벌을 하자."

조서를 내려서 천하를 소유한 호칭을 정하여서 ‘송(宋)’이라고 하였는데, 관장하고 있는 절도(節度)의 주명(州名, 귀덕절도사의 치소는 송주) 때문이었다.

국운(國運)을 정하여 주(周)의 목덕(木德)을 받아서 이어서 화덕왕(火德王)으로 하고 색깔은 붉은색을 숭상하게 하였으며, 납제(臘祭)는 술(戌)을 썼다.

요인(遼人)이 체주(?州, 산동성 혜민현)를 침범하자 자사인 하남(河南) 사람 하계균(何繼筠, 921~971)이 뒤쫓아서 그 무리를 고안(固安, 하북성 고안현)에서 깨뜨리고 말 400필을 얻었다.

야율노호는 태조의 셋째 아들인데 성격이 잔혹하였지만, 서로(舒?, 述律) 태후가 그를 아주 아껴서 태종(太宗, 야율덕광) 시절에 세워서 황태제로 삼고 천하병마대원수를 겸하게 하였다. 태종이 난성(欒城, 하북성 난성현)에서 죽고, 영강왕(永康王, 야율올욕)이 진양(鎭陽, 항주의 치소)에서 즉위하니 이 사람이 세종(世宗)이며, 태후는 야율노호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하였다.
군사가 실패하니 대신인 야율오진(耶律烏珍, 옛 이름은 야율악질)이 야율노호를 마주하고 죄를 헤아리며 지독하고 포학하여 인심을 잃은 것을 헤아리니, 태후는 응답할 것이 없었고, 군사는 드디어 풀어졌다.

시신(侍臣) 가운데 군사가 주(周)에 패하여 삼관(三關)에서 땅을 잃은 것은 계책이 아니라고 추가로 허물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요주가 말하였다.
"삼관은 본래 한(漢)의 땅이니 지금 다시 그들에게 돌려주었는데, 무엇을 잃었는가?"
그가 나라의 일을 걱정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어머니에게, 내 어머니에게, 딸은 나눗셈이지만, 아들은 곱셈이다. 딸은 어머니를 줄어들게 하고, 쪼개고, 무언가를 떼어가지만, 아들은 뭔가 덧붙여 주고 늘려 주는 존재인 것이다.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바로 나의 어머니에게는 그랬다. - P38


친가에 자손이 귀하여 아이가 태어나기를 무척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첫째가 딸로 태어나자 어머니는 좌절하셨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손'이 귀한 집이라 아들을 원하셨던 것이다. 특히 할머니는 노골적으로 어머니를 압박하셨다고. 첫째가 딸이었는데 둘째마저 딸을 낳자 어머니의 심리적 압박은 무척 크셨다. 아마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억울함과 분함이 내게 미쳤을거라고 먈씀하셨었다. 그치만 그때는 내가 기어다닐 때라 기억에 없다. 어머니께서 셋째와 넷째를 아들을 낳자 그제서야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을 것이다. 어쨌든 어릴 적 기억이 나던 때부터는 많은 것들이 남동생들을 위주로 굴러갔다. 서운했지만 표현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결국 감정이 쌓여 폭발했을 때가 있었는데 결론은 딸이 희생해야 하고 첫딸이어서 희생해야 하는 것으로 흘러갔다. 


왕비는 누구의 칭송을 필요로 하는가? 본인의 아름다움 때문에 고난을 겪어야 하는 백설공주는 무엇을 놓고 왕비와 경쟁하는가? 여성들이 펼치는 이 드라마 이면에 남성들이 있다. 왕비는 남성에게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것이며, 가치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은 그런 남성의 관심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이유는, 내가 한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건 나의 어떤 행동이 아니라, 그냥 나라는 존재, 나의 성별과 외모, 그리고 내가 어머니를 완성시켜 줄 기적이 되지 못하고 그녀를 분열시키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P39


어머니께서 나와 내 동생들에게 본의 아니게 강요한 것들은 결국 남성에 의한 것, 가부장제 시스템에 의한 구조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남동생들도 후에 이야기하기를 자신들은 버거워했노라고 넋두리를 했었다.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없었다면 딸을 둘만 낳아 전념하여 키우지 않으셨을까. 

거울이 보여주는 상은 결코 내가 아니고 이미지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에 맞추려고 했기에 탈이 난 적이 많았다.


거울은 모든 것을 보여 준다. 오로지 거울 자신만 빼고. 거울이 되는 일은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신화에 나오는 에코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당신 자신에 대한 것은 어떤 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 나르키소스의 이야기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가 산속 연못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자신의 반영에만 빠진 그가 타인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는 점이다. - P44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 P53


솔닛의 비치에서의 경험을 듣는 것은 놀라웠다. 모르는 사람들이 건넨 제안에 오케이 하고 진행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어떤 일을 계기로 이전에 갖고 있던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다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사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도전에 대한 이야기를 볼 때마다 개인적인 경험이 떠오른다. 몇 년전 상해에 갔을 때 고층 빌딩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꼭대기에 전망대가 있는데 아래는 투명 유리로 되어 있어 밑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사람들은 그 투명 바닥에 누워 인증샷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발을 뗄 수조차 없었다. 너무 무서웠고 사람이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두려움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결국 인증샷은 커녕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서성대다가 내려왔다. 하지만 후회가 되었던지 나중에 두고 두고 생각이 났다. 그때 미쳤다 생각하고 사진을 찍고 내려왔어야 하는데… 도전했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 결국 그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나는 뒤이어서 여러 차례 나를 넘어설 도전의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나를 넘어설 수 있을까. 아직 번지점프도 무서워 도전하지 못한 나는 스카이다이빙을 보면서 ‘나도 할 수 있을까. 어떤 기분일까.’ 꿈꾸기는 하지만 여전히 가능보다는 불가능의 확률에 더 가까워 보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3-12-12 17: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읽어야 하는 책인데...

거리의화가 2023-12-12 17:56   좋아요 1 | URL
이 책 갖고 계시는군요^^ 챕터마다 에피소드들이 달라서 독자를 환기시키네요. 관련 경험이 있으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아질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3-12-14 0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이 귀한 집안이라는 말부터 무슨 얘기가 나올지 뻔히 알게되는 ptsd를 우리는 갖고 있죠ㅠㅠ

거리의화가 2023-12-14 09:44   좋아요 1 | URL
그쵸^^ 아들 때문에 4명씩이나ㅠㅠ 지금도 생각하면 어머니께서 억울함이 많으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이제는 좀 이런 일들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브라질 산타 루시아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9월
평점 :
품절


알라딘 원두 중에서 내 맛을 가장 오래도록 사로잡은 원두는 이것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고소하고 쌉싸름한 원두의 최고봉! 원두의 포장이 새단장을 하여 지퍼백 시스템이 갖춰져 앞으로는 집게 등을 이용하지 않아도 보관이 편리해져서 마음에 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12-11 0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요한 지퍼백 시스템. ㅋㅋㅋㅋ 저도 계속 이것만 사 마시고 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2-11 11:38   좋아요 2 | URL
ㅋㅋ 삼각 원두 봉지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지퍼백 들어가니 참 좋더군요. 이런 고소한 원두들이 더 나와주었으면^^

희선 2023-12-11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지퍼백이 아니었나 봅니다 마음에 드는 원두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지퍼백도...


희선

거리의화가 2023-12-11 11:39   좋아요 0 | URL
네. 예전에는 잘라서 써야 했거든요. 그래서 집게로 집어 보관하거나 보관 용기가 따로 필요했습니다. 알라딘 원두 중 계속 사먹게 되는 원두는 이게 거의 유일한 듯합니다^^

은하수 2023-12-11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맛있어요??
지금 먹고 있는거 영 별로여서..
이거 사놓고 언제 개봉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당장 개봉해봐야겠습니닷!^^

거리의화가 2023-12-11 11:40   좋아요 1 | URL
네. 제 입맛에는요^^ 고소하고 씁쓸한 원두 좋아하신다면 마음에 드실 것 같아요.

건수하 2023-12-11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걸 제일 좋아합니다! 근데 로스팅이 좀 강해서... 이제 좀 산미 있는 원두로 바꿔보려고 해요 :)

거리의화가 2023-12-11 11:41   좋아요 0 | URL
그런데 위를 생각하면 산미가 있든 없든 부담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긴 해요^^; 최근 감기로 고생하기도 했고 커피를 계속 못 마시다 어제, 그제 마셨더니 정말 행복하더라구요. 그래도 위를 생각해서 마시는 양을 줄여볼까 합니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쎄 / 사계절 / 199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고대부터 시작하여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목민들이 세계를 정복한 역사를 모두 다루고 있다. 



그동안 공부를 했다지만 동아시아 근처에 제한한 지역의 범위의 역사에는 그나마 익숙해도 중앙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이북 땅까지의 역사는 지역의 명칭도 익숙해지지가 않고 그들의 역사는 더욱 멀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특히 아랍 세계의 역사와 러시아 세계의 역사까지 흐름을 간략하게 다루고 있어 좋았다. 


또 몽골 제국의 역사도 쿠빌라이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가볍게 치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분열과 소멸의 과정까지 꽤나 상세히 다루는 것이 인상적이었다(총 3부의 내용 중 2부와 3부가 몽골과 후속 제국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분량도 가장 많고 가장 상세하다). 


티무르 제국 중 티무르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칭기스칸에 비해서 유독 박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과연 다른 역사가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 궁금해졌다. 


이 책은 이렇게 기본 입문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물론 최신 고고학 사료의 발굴로 업데이트된 정보들은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2000년대 이후) 공부하고 싶은 제국의 역사는 관련서를 더 읽어 보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아쉬움들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나친 미사 여구가 읽기 피로도를 증가시킨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헤툼 1세만큼이나 분별력 있던 정치가인 모술의 아타벡 바르드 웃 딘 룰루도 자진해서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모술의 앞 부분은 미사 여구인데 이런 것들이 대부분의 서술에 적용되기 때문에 한 눈에 문장이 들어오지 않고 나아가서는 불필요하게 느껴지기도 하며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또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이름들도 간혹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옹칸이라고 쓰는데 책에는 왕칸이라고 적혀 있다던지. 문제는 되지 않지만 읽을 때 걸릴 수 있으므로 그런 부분은 감안해서 읽으시라 하는 이야기다.



내용이 양이 워낙 방대하여 리뷰로 정리하기에는 곤란하고 그렇다고 100자평으로 쓰기에는 아쉬워서 이렇게 간단한 소감 위주로 리뷰를 정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 되찾은 시간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따금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를 구원하는 신호가 온다. 모든 문을 두들기지만 그 문을 어느 것에도 이르지 않고, 그렇지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문, 100년 동안 헛되이 찾았을지도 모르는 문에 알지도 못한 채 부딪치고, 그리하여 문이 열린다. - P28


마지막까지 무척 고민했다. 4점을 주어야 하나 5점을 주어야 하나. 참 잘 쓴다 생각하면서도 중반 이후에는 비슷한 상황과 계속되는 심리 묘사에 ‘이제 그만’ 하는 마음에 지쳐버리는, 이 복잡미묘한 감정을 어찌해야 하는지. 그렇지만 잃시찾 시리즈 마지막 권이고 시리즈를 마무리한다는 의미로 4점은 박하다는 생각이 있어서 결국 5점을 주었다. 


화자는 요양원에서 있으며 외부와 단절하듯 생활하다가 오랜만에 게르망트 대공 부인이 여는 오후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다. 그렇게 게르망트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 과거의 기억들로 이동하며 오랫동안 회상에 빠진다. 


화자에게 과거의 시간은 콩브레, 발베크, 베네치아라는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과 상황에 의해 점철된 기억들이다. 그것은 현재와 양립할 수 없는 과거다. 사실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이며 그는 그저 과거의 기억 속 자신과 주변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그는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양한 문학과 예술 작품을 예로 들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 것 같다.


그때 예술 작품만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임을 내게 가르쳐 준 빛보다 찬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새로운 빛이 내 마음속에 비추었다. 그리하여 나는 문학 작품의 이 모든 소재가 내 지나간 삶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소재는 하찮은 쾌락이나 게으름, 다정함, 고통의 순간에 내게로 와 그래서 내 몸속에 저장되었으나 마치 식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온갖 양분이 보존된 씨앗보다도 더 나는 그것의 용도나 생존 가능성을 짐작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 이렇게 해서 그때까지의 내 모든 삶은 ‘소명’이라는 이름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또는 요약되지 않을 수도 있다. - P79~80


지금이야 프루스트 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문학 작품이 생겼지만 당시만 해도 자신에게 글쓰기 재능이 있는지 문학적 소양이 있는지 끊임없이 되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이러해야 한다는 소신을 통해 거꾸로 작가는 이런 생각을 담으려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생전에는 성공하지 못한 작가였지만 그런 의미에서 떡잎을 가진 저자임에 분명하다.


사실 각각의 독자는 책을 읽을 때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독자이다. 작가의 작품은 독자가 어쩌면 그 책이 없다면 스스로 보지 못했을 것을 볼 수 있도록 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책이 말하는 것을 독자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알아보는 것이 바로 책의 진실을 증명하며,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 반대도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저자의 텍스트와 독자의 텍스트 사이의 차이는 흔히 저자보다는 독자에 의해 결정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순진한 독자에게 책이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난해하고 불투명한 렌즈만을 제공하여 독자가 책을 읽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특징은 독자에게 책을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걸 말해 준다. 저자는 그 일로 모욕을 받았다고 여기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독자에게 “이 렌즈가 잘 보이는지 아니면 저 렌즈가 잘 보이는지 아니면 다른 것이 더 잘 보이는지 당신 스스로가 찾아보세요.” - P99


12권에 이어 작가는 사실주의 문학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사물의 본질만으로는 그 어떤 소통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밝혀진 삶,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는 유일한 삶은 바로 문학이다. 이 삶은 어떤 점에서는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매 순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삶을 밝히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과거는 수많은 음화(陰畵)로 가득 채워진 쓸모없는 것이 된다. 우리의 지성이 이런 음화를 ‘현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그리고 타자의 삶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작가에게서 문체란 화가에게 색채와 마찬가지로 기법의 문제가 아닌 비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체는 의식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에서의 질적 차이의 드러남이며, 예술이 없다면 우리 각자에게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을 그런 차이이다. - P74


하지만 나는 그런 시각에는 앞선 리뷰에도 밝혔듯이 회의적이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 사물이 스치는 기억과 상황이 존재한다면 더 특별하게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물, 사람, 공간만으로 아무 가치가 없는가 그것은 다른 이야기라 생각한다. 


13권에서는 ‘시간’의 진리, 세월이 변화함에 따른 인생의 노화와 죽음의 수용을 보여주는데 이 부분이 놀랍도록 좋았다. 


사교계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세대는 물러나고 세대는 교체되었다. 새로운 세대는 자기들의 문화로 사교계를 변화시키지만 과거의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새로운 세대는 과거의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자연의 순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월은 흘러가며, 젊음은 늙음에 자리를 내주며, 가장 단단했던 재산이나 왕좌도 무너지며, 명성이 순간적이라는 걸 알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방식이, 말하자면 ‘시간’에 휩쓸린 그 유동적인 세계의 사진을 찍는 방식이 모순되게도 그 세계를 고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젊었을 때 알았던 사람들을 언제나 젊다고 생각하며, 반면 나이가 들어서 안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들을 노년의 미덕으로 장식하며, 억만장자의 명성과 군주의 영향력에 아낌없는 신뢰를 보내고 그들이 내일이면 권력을 빼앗긴 채 사라질 것임을 이성적으로는 알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 - P189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도, 우리는 삶의 가장 다양한 풍경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각각의 개인은-나 자신도 그런 개인들 중의 하나이지만-그의 주위뿐만 아니라 타인의 주위에서 그가 이룬 대변화를 통해, 특히 그가 나와 관계하여 연속적으로 차지했던 자리를 통해 내게 시간의 지속을 가늠하게 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이 연회에서 지금 막 포착한 ‘시간’이 그 모든 상이한 면들에 따라 삶을 배열하면서 삶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책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평면 심리학과 대립되는 공간 심리학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했는지. - P303


멀리 지평선에 보이는 것은 신비스러운 위대함의 양상을 띠며, 그리하여 다시는 보지 못할 세계로 닫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바로 다음에 올 세대에게는 우리 자신이 지평선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지평선은 물러가고 끝이 난 것 같은 세계가 다시 시작된다. - P130



영원한 지속은 인간에게나 작품에게나 약속된 것이 아니다. - P323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3-12-10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잃.시.찾, 완독 축하드리고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이 소설이 좋은 부분도 많은데 또 한편으로 공감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완전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도 생루의 죽음과 샤를뤼스의 또 다른 모습, 화자의 글쓰기를 보면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더라고요.

거리의화가 2023-12-11 09:13   좋아요 2 | URL
맞아요 페넬로페님 딱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프루스트의 차별적 언사나 행동은 이해도 안 가고 왜 그렇게 묘사해야만 했을까 하는 순간들도 있었어요. 그러나 빛나는 문장들이 많았고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에서는 배울 점이 있었어요. 나와 다른 성향의 작가란 어떤 걸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미미 2023-12-10 23: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13권은 별 4개를 줘야 하나 고민했어요. 게르망트 공작이나 샤를뤼스에 비해 사교계 여성들의 나이든 외모를 너무 나쁘게만 비하하는 듯해서요. 그래도 좋은 문장이 너무 많아서...ㅜ.ㅜ 그리고 프루스트는 일반적인 남성이 아니니까ㅋㅋㅋㅋ
화가님과 약속 지키려고 부랴부랴 읽었어요. 폭풍 속도로 읽으셔서 따라잡느라 조금 힘들었지만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2-11 09:13   좋아요 1 | URL
미미님 저는 원래 별점 짜기로 유명합니다!ㅋㅋ 5점 정말 잘 안 주는데 마지막까지도 그냥 4점 줘야겠다 싶었습니다만 13권은 마음에 박히는 문장들이 많아 저를 또 사로잡더라구요!ㅎㅎㅎ 저도 그런 부분에서는 기분이 불쾌했어요. 주름을 비하한다던지 뚱뚱한 여인을 경멸하는 시선에서는 차별적으로 느껴져서 싫었습니다ㅠㅠ 프루스트의 대표작이지만 유일작이기도 하니까 완전하기보다는 불완전함에서 오는 미도 존재하지 않나 싶어요.
저와의 약속을 지키느라 무리하신 것은 아닌지ㅠㅠ 얼른 털어버리고 싶어서 주말 내내 붙잡고 있었습니다. 미미님 함께 읽느라 고생하셨어요^^

새파랑 2023-12-11 0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악 별4개냐? 5개냐 저도 고민했었는데 ㅋ 왠지 이렇게 끝? 전 이런 느낌이 있었습니다...

역시 독서 천재화가님~!! 완독 축하드립니다~!! 전 10년후에나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ㅡㅡ

거리의화가 2023-12-11 09:16   좋아요 2 | URL
저는 이렇게 끝날것이라고는 예상했는데 저는 프루스트가 아무래도 가까이 하기에는 거리가 먼 당신이라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더군요^^;
ㅋㅋㅋ 10년 후! 시간이 훌쩍 지나서 재독하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희선 2023-12-11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 읽으신 거 축하합니다 2023년 가기 전에 다 보셨군요 프루스트가 저세상에서 기뻐할 듯합니다 여전히 자기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니 하면서... 프루스트는 건강이 아주 안 좋고 걱정도 많이 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던데, 이 책 쓰느라 힘을 다 썼을 것 같습니다 다 쓰고 뿌듯하게 여겼겠지요 그런 건 생각해줘야 하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12-11 12:55   좋아요 0 | URL
네. 가능하면 올해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읽고 넘어가자 싶었거든요. 질질 끌면 마무리를 못할 것 같았어요. 프루스트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여전히 사랑받고 읽히는 것을 보면 지하에서 분명 웃고 있을 듯합니다.
프루스트가 신체적으로도 약했지만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심리 묘사에 능한가 싶기도 합니다. 비록 작품의 흥행을 보고 가지는 못했지만 이런 작품을 남겼기에 프루스트라는 이름과 잃시찾이 남게 된 것 같네요^^

그레이스 2023-12-14 0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네요
저는 12권!
올해 안에 읽는 건 포기했습니다.
1월까지 갈듯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3-12-14 09:45   좋아요 1 | URL
시리즈를 완독한다는 것은 쉽지는 않은 일이죠. 하지만 언제라도 마치기만 한다면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님 남은 여정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