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국가들과 공국들이 황제파(기벨린)와 교황파(겔프)로 갈라져 권력 다툼을 벌였다.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을 의미하는 ‘기벨린’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영지 비벨링겐Wibellingen에서 유래했다. 비벨링겐의 이탈리아식 발음이 기벨리노Ghibellino였기에, 오늘날 영어식 발음인 기벨린을 황제파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다.

겔프와 기벨린이라는 이름이 이탈리아에 들어온 것은, 12세기 중엽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가 이탈리아를 공격했을 때이다. 그의 지지자들은 ‘기벨린’으로, 이에 맞선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겔프’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눈독을 들였던 북부 이탈리아의 상업도시들이 자연스럽게 황제에 맞서 교황을 지지했고, 교황에게 위협을 많이 받았던 농업 지역들이 전통적으로 황제를 지지했다.

샹파뉴 정기시의 쇠퇴는 11~13세기 십자군 시대를 규정지었던 국제 교역의 큰 틀이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새로운 구조와 특성을 지닌 국제무역이 등장하고 있었다. 십자군 시절의 이탈리아 상인이 지중해와 유럽 여러 시장을 돌면서 상품을 판매하는 ‘여행상인(순회상인)travelling merchant’이었다면, 이후의 이탈리아 상인은 직접 여행을 하지 않고 고향에 머물며 서신을 통해 현지 대리인의 상업 활동을 지시하는 ‘정주상인sedentary merchant’으로 변모했다. 그런 점에서 정기시 쇠퇴의 결정적인 요인이 새로운 사업 방식의 도입, 즉 서신을 통한 사업 관리 방식의 도입이었다는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제2기는 무엇보다도 ‘해상혁명nautical revolution’의 시대였다.
4 이 해상혁명의 핵심은 수송비를 낮추기 위해 좀 더 튼튼하고 큰 선박을 건조하는 것이었다. 나침반의 사용과 추측항법의 도입, 해도海圖의 제작과 같은 항해술의 발전 또한 해상혁명의 중요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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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지중해와 그 너머 아시아 세계의 교역 구조뿐만 아니라 서유럽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직물 산업의 지리적 구조조정, 금화 주조와 같은 화폐시장의 변화, 봉건 왕조의 수도 파리와 같은 대규모 소비 시장의 부상, 상업이 안정되고 규모가 확대되면서 이윤율 하락 등의 변화들이 있었다.

13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활동 영역이 지리적으로 더욱 확대되어 아시아 시장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로 가는 해로를 개척한 15세기 말보다 한 세기 이상이나 앞서서 이탈리아 상인들은 인도와 중국 시장을 직접 경험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바로 몽골제국 덕분이다.

아시아로 가는 선교사나 외교사절들은 상인들과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이용한 길은 대체로 상업 노선과 일치했다. 제노바 상인들은 도미니쿠스와 프란체스코 수도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럽 상인들이 상관을 세우거나 꽤 활발하게 장사를 했던 곳은 킵차크한국의 카파, 타나, 사라이, 일한국의 수도 타브리즈, 흑해의 타나에서 대도로 가는 교통로에 위치한 우르겐치, 사마르칸트, 알말리크, 대원제국의 수도였던 대도, 중국 남부의 광주, 천주, 항주, 양주(양저우)와
††같은 항구도시들, 인도 북부의 델리, 인도 서부 해안에 위치한 카가, 타나, 퀼론 등의 항구도시들이었다. 이 도시들은 주교 관구管區가 설치되어 있거나 수도회가 활동하던 지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15세기 중엽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Alfonso V의 주문으로 베네치아 출신 수도사 마우로Mauro가 제작한 지도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이 꽤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콜럼버스와 다가마 이전에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이렇게 자세하게 그려 낸 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몽골 평화시대에 베네치아 상인과 선교사들이 아시아를 직접 보고 얻은 지리적 정보 덕분이었을 것이다.

15세기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등 이탈리아 상업도시들은 원료 공급지와 판매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팽창주의 정책을 선택했다. 그 결과, 중간 규모의 도시들은 주요 도시들의 위성도시로 전락했다. 베네치아는 15세기 초 북서부 이탈리아로 팽창해 베로나·파도바·라벤나를 정복했고, 피렌체는 300년 동안의 긴 싸움을 끝내고 1406년 피사를 병합하면서 막강한 해상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전까지 제노바 상선을 주로 이용해야 했던 피렌체는 이제 자국 선박을 이용해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피렌체 정부는 베네치아 모델을 본떠 피렌체 정기 선단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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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등은 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중세 이탈리아 상인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고 원활한 상업 활동을 방해하는 여러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변화해 갔다. 15세기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상인은 12세기의 전형적인 이탈리아 상인과 질적으로 달랐다. 12세기 이탈리아 상인이 상품을 가지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큰 수익을 노렸던 모험적 성격의 ‘여행상인’이었다면, 15세기 이탈리아 상인은 해외 각지에 주재원을 두고 현지에서 일어난 상업 거래를 복식부기로 작성된 회계장부와 서신으로 보고받으며 꽤 큰 자본을 투자해서 안정적인 규모의 이윤을 도모했던 정주상인이었다.

중세 말 이탈리아 상인들이 취급한 품목은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수송비가 비교적 비싸 원거리 수송이 불가능했을 거라 여겨지는 여러 가지 농산물과 제조업 생산 원료, 완제품까지도 활발하게 거래되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들로 밝혀지고 있다. 이탈리아 상인이 주도했던 중세 지중해 무역에서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상호의존하게 만들었던 것은 직물 산업이었고, 그 원료가 된 면화와 인디고, 명반은 동서를 하나로 묶어 주는 매개체였다는 아불라피아의 지적은 직물 산업의 원료와 완제품이 향신료 못지않게 이탈리아 상인들의 주요한 거래 품목이었음을 말해 준다.

베네치아는 시리아·이집트와의 교역에, 제노바는 비잔티움제국과 소아시아 반도와의 교역에 집중했다. 당연히 취급하는 상품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향신료가 있었다면, 제노바 상인들에게는 명반이 있었다.

명반은 주로 지금의 터키 일대인 소아시아 반도에서 생산되었는데, 명반의 주요 고객은 모직물 산업이 발달한 플랑드르와 잉글랜드 등 북서유럽 지역이었다. 결국 제노바는 소아시아에서 생산된 명반을 대량으로 대서양까지 수송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선박을 건조해야 했다. 또한, 가급적이면 직항로를 선택하여 수송비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동지중해에서 명반을 선적하고 대서양으로 향하는 제노바 선박은 가능한 한 본국을 거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 결과, 15세기 제노바 본토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던 반면 동지중해에 위치한 제노바 식민지들은 크게 번성했다. 이로 인해 재정수입이 줄어든 본토 정부는 이제 제노바 상인들의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간여하거나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명반은 중세 말 제노바의 경제적 명운을 결정한 상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베네치아의 행운은, 오스만튀르크가 소아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최종적으로 비잔티움제국을 몰락시킨 후 제노바의 명반 수급이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상황에 처하면서 찾아왔다. 물론 이때도 일부 제노바 상인들이 오스만제국 내에 위치한 명반 광산 대부분을 임차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명반 교역에서 제노바 상인이 누렸던 독점적인 지위는 이제 무너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오스만 술탄은 포카이아를 점령한 후 제노바 상인들을 내쫓고 명반 광산 채굴권을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양도했다.

베네치아 정부는 동지중해에서 들어오는 모든 상품을 우선적으로 베네치아 본섬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이를 엄격히 시행했다. 이러한 정부 정책이 잘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본섬과 가까운 곳에 소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방에서 베네치아로 들어온 향신료, 면화 등은 대부분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독일로 팔려 나갔다.

소란초 형제상회는 15세기 초엽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규모의 중개무역상으로서, 베네치아 도시국가의 귀족이었던 소란초Soranzo 가문의 네 형제들이 함께 만들었다.(형제들의 이름은 도나도Donado, 자코모Giacomo, 피에트로Pietro, 로렌초Lorenzo이다.)
1 이탈리아어로 ‘프라테르나Fraterna’라고 하는 ‘형제상회’는 당시 베네치아에서 가장 일반적인 사업 형태였다.(‘프라테르Frater’는 라틴어로 ‘형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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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와 부자 또는 삼촌이나 조카 등 혈연관계로 얽힌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자금을 출자하고 역할을 분담하여 안정적인 결속력을 자랑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동시대의 일반적인 이탈리아 상인과 달리 소란초 상회가 집중 투자한 상품은 바로 면화였다. 그렇다고 소란초 형제상회가 다른 상품을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12 다만, 그들의 핵심 사업이 시리아 현지에서 원면(가공하지 않은 솜)을 구입해 베네치아에서 유럽 상인들에게 되파는 것이었다는 뜻이다. 소란초 상회의 사업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도 다양한 종류의 면화에 분산투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마스, 트리폴리, 아크레, 알레포, 라타키아(시리아 북부의 항구도시) 등 시리아의 여러 면화 생산지에 대리인이나 동업자를 두고 그들에게서 원면을 확보했다. 가장 중요한 거래처였던 하마스에서는 형제 중 한 명이 직접 면화 구입을 담당했다.

소란초 형제상회가 면화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문상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상업과 수송에 대한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과 후원 덕분이었다. 제노바 상인의 경우, 상품을 구입하고 이를 수송할 선박을 찾는 일을 모두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상품의 안전한 수송을 감시하는 관리자를 선박에 동승시키는 사소한 일까지 모두 자비와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반면에 베네치아 상인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정기적인 수송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고, 상품에 꼬리표와 선적 송장만을 동봉해서 보내면 끝이었다. 상품의 안전한 수송은 정부와 정부 주도의 정기 선단 운영자들이 보장해 주었다.

베네치아는 기존 갤리선의 속도를 그대로 살리면서 화물 선적 능력을 증대시킨 새로운 형태의 갤리, 즉 ‘갤리 상선’을 건조했다. 당시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 갤리선을 ‘대형 갤리’라 불렀다.
갤리선은 국가 소유였지만 ‘인칸토incanto’라 불리는 경매를 통해 투자자와 선장을 모집했다.

정부의 체계적인 후원과 지원 덕분에 베네치아 순례 선단은 전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성지순례 여행 상품이 베네치아 정부가 제공한 순례 선단이었다는 사실을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매년 수백 명의 독일인과 영국인, 프랑스인, 이베리아인, 이탈리아인들이 이 순례 선단을 이용해 성지를 다녀왔고, 그중에는 이를 여행담으로 펴내는 이들도 있었다.

대리인들은 매일 일어나는 모든 거래를 일기장journal의 ‘차변debit’과 ‘대변credit’란에 나누어 이중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일기장의 내역을 다시 좀 더 큰 장부인 원장ledger에 옮겨 적었다. 일기장이 시간순으로 거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면, 원장은 동일한 사업이나 인물에 관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함께 묶어서 정리한 장부였다. 한 마디로, 거래의 분석을 용이하게 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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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복식부기로 작성된 회계장부 덕분에 본국에 있는 상사의 대표는 해외시장에 파견한 대리인의 모든 상업 거래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소란초 형제상회가 활동하던 15세기 초가 되면 이탈리아 상인들 대부분이 정주상인으로 거래를 주관한다. 본국에 거주하면서 해외에 파견한 대리인들의 활동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정주상인 입장에서는 모든 거래 내역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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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이탈리아 상인들은 복식부기로 된 회계장부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티니의 최종 유언장은 그가 돈과 구원은 함께할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에 굴복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구원을 얻고자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증했다.
†다티니가 참회를 한 것은 임종 직전이 아니라 죽기 10년 전쯤이었다. 당시 가난한 사람에게 모든 재산을 나눠 줄 좋은 방법을 찾던 그는 산 파비아노 수도원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수도원장은 두 가지 제안을 했는데, 첫 번째는 프라토 근처의 ‘라 사카’라 불리는 언덕 위에 있는 약간의 땅과 수도원을 사서 그것을 마음에 드는 교단에 기부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유산 관리를 프라토 성직자들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라포는 이 제안을 듣고 분개했지만 유언장은 그대로 작성되었다. 이후 2년 동안 라포는 다티니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라포는 성직자들은 탐욕스러운 늑대라 여겼고, 그들에게 돈을 맡기면 헛되이 탕진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결국 다티니는 1400년 유언장을 수정했다. 바뀐 유언장의 핵심 내용은, 유산 관리를 성직자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성직자에 대한 불신이 상당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제노바의 쇠퇴 과정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제노바는 완전히 무너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스만제국이 중세 후반 제노바 상인들의 핵심 사업 무대였던 비잔티움제국을 무너뜨리자, 다수의 제노바 상인들은 북서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로 상업 거점을 옮기며 살아남았다. 이렇게 이동한 제노바의 인력과 자본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새로운 대륙을 찾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노바 상인들은 16세기 들어 은행과 금융업에서 새롭게 두각을 나타냈다. 제노바 상인들은 이전까지 지중해 무역에서 엄청나게 벌어들인 자금력을 기반으로 점차 국제적인 은행가로 변신해 갔다. 16세기에는 에스파냐와 손을 잡고 아메리카에서 나오는 은 거래를 담당했다. 18세기 초 제노바의 해외투자 규모는 유럽에서 네덜란드 다음으로 컸다.

브로델은 18세기에도 제노바는 다시 한 번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활기찬 모터 역할을 했으며, 이탈리아 통일운동 시기에는 산업을 창조하고 근대적인 해군을 만들었으며 이탈리아 은행도 제노바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1530년대 이후 지중해를 통한 베네치아의 향신료 무역이 다시 한 번 활력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16세기 중엽에는 15세기 최고 전성기 수준 또는 그 이상의 향신료가 베네치아로 수입되었다. 인도 항로를 경유한 향신료 무역이 지중해 향신료 무역을 영구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결국 베네치아는 인도 항로 개척 이후 한 세기 이상을 잘 버텨 냈던 것이다.
게다가 16세기 말에는 향신료가 베네치아 무역과 경제의 전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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