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漢)은 당(唐)이 혼란한 틈을 이어받아서 여기에서 50년 거주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중원에 있는 나라에 많은 연고가 있어서 간과(干戈, 전쟁)가 미치지 아니하였으니 우리 역시 아무 일 없는 가운데 교만하였습니다. 지금의 병사들은 기고(旗鼓, 전쟁)를 알지 못하고 인주는 살아남을는지 망할는지를 모르니, 청컨대 군사적 대비태세를 정비하고 또한 송(宋)과 왕래하며 우호관계를 맺으십시오."

유창(劉?, 942~980)은 채용할 수 없었다. 이에 이르러 처음으로 두려워하여서 소정현을 초토사로 삼았다.

병문(幷門, ?州, 山西省 太原市, 北漢)과 우호적으로 왕래하는 것만 못하니 군사를 발동하여 남쪽으로 내려오게 하면 우리는 황화(黃花)·자오곡(子午谷)에서 군사를 내어 이에 호응할 것인데, 중원은 앞뒤로 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니 관우(關右, 함곡관 서쪽)의 땅은 위무만하여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왕소원이 그 말을 그렇다고 생각하여 촉의 주군에게 권고하여 손우(孫遇)·조언도(趙彦韜)·양견(楊?) 등을 파견하여 납환(蠟丸)14의 백서(帛書)로 샛길로 가서 북한(北漢)의 주군15에게 주고 이미 포(褒, 陝西省 勉縣 西老城)·한(漢, 四川省 廣漢市)이 군사를 늘렸다고 말하면서 북한(北漢)과 약속하여 황하를 건너 같이 거사하기로 하였다. 손우 등이 도하(都下)에 이르렀는데, 조언도가 그 편지를 숨어들어 가져다가 바쳤다. 조언도는 흥주(興州, 陝西省 略陽縣) 사람이다.

황제가 행영(行營)에 유시하였다.

"이르는 곳에서는 여사(廬舍)를 불태우거나 이민(吏民)을 내몰아 노략하거나 분묘를 파헤치거나 상자(桑?, 뽕나무)를 잘라 채벌해서는 안 되는데, 어기는 자는 군법을 좇아서 일을 처리할 것이다."

제장들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두가 도륙하려고 하였지만 오직 조빈(曹彬, 931~999)만은 이를 금지하여 마침내 그치었으니, 그러므로 협로(陜路)의 군사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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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조금도 범하는 것이 없었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였다.
"내가 그 적당한 사람을 얻어서 맡겼구나!"
조빈에게 조서를 내려서 그를 포상하였다.

왕전빈과 최언진(崔彦進, 922~988)·왕인섬(王仁贍, 917~982) 등이 밤낮으로 연회를 열고 술을 마시고는 군무(軍務)를 돌보지 않으면서 부하들을 풀어 놓아 자녀와 재화(財貨)를 약탈하니 촉 사람들이 이를 고생스러워 했다. 조빈(曹彬, 931~999)이 누차 군사를 돌릴 것을 청하였으나 왕전빈 등은 듣지 않았다.

오대(五代)의 방진은 더욱 강하여 부곡을 인솔하여 장원(場院, 곡식을 털거나 말리는 평탄한 장소)을 주관하게 하면서 두텁게 거두어 스스로를 이롭게 하였다.
그 가운데 삼사(三司)에 속한 것에는 높은 관리를 보임하여 그곳에 가게 하여 정해진 액수 외의 것들을 보내어 번번이 자기에게 들여보내고 혹은 사사롭게 뇌물을 받아서 이름하여 공봉(貢奉)이라고 하면서 은상(恩賞)을 내려주기를 바랐다.
황제가 처음에 즉위하여서는 오히려 앞의 제도를 따랐기에, 주목(州牧)이나 태수(太守)가 내조(來朝)하게 되면 모두가 공봉이 있었다. 조보가 재상이 되기에 이르자 그 폐단을 개혁하여 없애기를 권하고 여러 주에 명령을 내려서 탁지경비 외에 무릇 금백(金帛)으로 군사들의 실비를 돕게 하고 모두 도하(都下)로 보내어 점유하여 보류할 수가 없었다.

가을 7월에 황제는 서천(西川)의 행영에 어떤 대교(大校, 장교)가 백성의 처의 유방을 잘라내어 그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궁궐로 오게 하여 큰 저자에서 그 목을 베었다. 가까운 신하들이 구하려고 하는 것이 자못 절박하였으나 황제는 이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군사를 일으켜서 조문하면서 치는 것인데 부인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잔인하기가 여기에 이르렀는가? 마땅히 속히 법대로 조치하여 그 억울함을 보상하여야 한다."

12월 초하루 정유일에 처음으로 며느리는 시부모를 위하여 3년 자최(齊衰)·참최(斬衰)하도록 하여 하나같이 그 지아비를 좇게 하였다.

개봉윤인 조광의가 금중에서 모시고 연회를 열었는데, 조용히 폐하의 복장이 지나치게 초솔(草率)하다고 말하니, 황제가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너는 협마영(夾馬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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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살던 때를 기억하지 않느냐?"

애초에 황제는 지금 사용하는 기원(紀元)으로 고치면서 재상에게 명령하여 전 시대에 없었던 연호를 서로 가리어 올리도록 하였다. 이미 촉을 평정하고 났는데, 촉의 궁인들로 액정에 들어 온 자가 있어서 황제는 그 염구(?具, 화장도구)를 보다가 옛날 거울을 얻었는데 그 뒷면에 ‘건덕(乾德) 4년에 주조함’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황제는 크게 놀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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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내어 재상들에게 보이니 모두가 대답할 수 없었다.
마침내 학사인 도곡(陶穀, 903~970)·두의(竇儀, 914~966) 등을 불러 이것을 물으니 두의가 말하였다.
"이 물건은 반드시 촉(蜀)의 물건일 것입니다. 옛날에 위(僞) 촉왕인 왕연(王衍, 前蜀 後主, 901~926)이 이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마땅히 이는 그 시절에 주조한 것일 것입니다."

"밑에 있는 어리석은 백성들은 비록 숙맥(菽麥, 콩과 보리)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만약에 번후(藩侯)들이 어루만져 길러주지 아니하고 힘껏 가혹하고 심각하게 시행하였다면 짐은 끊어서 그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조보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폐하께서 백성을 아끼심이 이와 같으니 바로 요(堯)·순(舜)의 마음 씀입니다."

윤달(윤8월)에 잃어버린 책을 구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무릇 관리와 백성들 가운데 서적을 가지고 와서 헌납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관(史館)으로 하여금 그 편목(篇目)을 살펴서 사관 안에 없는 것이면 이를 거두어들이고 책을 헌상한 사람은 학사원으로 보내어 관리의 이치를 시험 쳐서 묻게 하고 직관(職官)으로 벼슬하는 일을 감당(堪當)할 사람을 보고하라."
이 해에 《삼례(三禮)》의 섭필(涉弼)·《삼전(三傳)》의 팽간(彭幹)·학구(學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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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주재(朱載)는 모두 조서에 호응하여 책을 헌상하니 서부(書府)에 나누어 두라고 명령하고 섭필 등에게 과명(科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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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사하였다.

"백성들 가운데 뽕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어서 가꿀 수 있고, 황무지인 밭을 개간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세를 징수하지 않고 보좌하여 오도록 권고할 수 있는 사람은 상을 받는다."

조보는 평소에 두의가 강직한 것을 꺼려서 설거정(薛居正, 912~981)·여여경(呂餘慶, 927~976)을 끌어들여 참지정사로 하였고 도곡(陶穀, 903~970)·조봉(趙逢, ? ~975)·고석(高錫, 936~985) 등은 또 서로 무리를 지어 붙어서 함께 두의를 배척하여 황제의 뜻을 중간에서 끊었다. 이에 이르러 죽자 황제는 가엽게 생각하여 말하였다.
"하늘이 어찌하여 나의 두의를 빨리 데려간다는 말인가!"
우복야를 증직하였다.

요주는 비록 야율이뢰합의 말을 다 좇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를 아끼는 것이 특별히 심하였다. 일찍이 가을 사냥을 따라나섰는데, 사슴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한 마리의 수사슴을 불러 왔다. 요(遼)의 법에는 수사슴으로 뿔이 양쪽에 난 것은 오직 천자만이 쏠 수 있었는데, 요주가 야율이뢰합에게 그것을 쏘라고 명령하니 활시위 소리와 함께 쓰러지자 요주는 크게 기뻐하며 하사하여 준 것이 두터웠다. 이에 이르러 연회를 열었는데 아주 기뻐하며 다시 금으로 된 사발과 가는 실로 짠 비단, 그리고 새끼 밴 말 100필을 하사하였으며 좌우에 있던 사람으로 관직을 받은 사람이 아주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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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한반도 정전체제의 동아시아적 맥락과 평화체제 전환의 요건



1953년 7월 27일 조인된 한국 정전협정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군사분계선을 따라 폭 2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는 것, 이 협정 발효 후 3개월 이내에 전쟁 참여국들이 정치회의를 소집해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책을 마련할 것, 그리고 한반도에 새로운 무기체계를 반입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 P242

정전협정 제4조는 "양측 관련 정부들에 대한 권고"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정전협정의 서명 및 발효 후 3개월 안에 양측 군사령관들은 양측 관련국 정부들에게 양측이 각기 임명한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고위급 정치회의를 개최해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국문제의평화적 해결 등을 협상을 통해서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정전협정의 제5조 63항은 이 협정의 모든 조항이 1953년 7월 27일 밤 10시부터 발효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4조 규정대로라면1953년 10월 말까지는 정치회의를 소집해야 했다.
그러나 정치회의 소집은 지연되었다. 북한 측이 한국전쟁 당사자가 아니었던 소련과 인도의 참석을 주장했다. 미국은 반대했다. - P243

문제의 핵심은 (미군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유엔군의 남한 주둔을 배경으로) 유엔이 남북한 모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이었다. 공산 측은 유엔의 중립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선거를 포함한재통일 과정에서 유엔의 역할을 거부했다. 6월 15일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자유선거와 유엔 감독"이라는 두 가지의 기본 원칙을 공산측이 거부하기 때문에 회의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성명을 내고 회의장을 떠났다. 공산 측은 회의 계속을 주장했다. 한국문제에 관한제네바회의는 그것으로 끝났다. - P245

미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협상을 반대하고 프랑스에게 "자유세계"를 위한 전쟁을 계속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거부했고 협상을 진행했다. 결국 군사분계선을 북위 17도선으로 타협해 인도차이나 전쟁이 공식 종결된 것은 1954년 7월 21일이었다.
이 협정은 한편으로 한국의 경우처럼 남북 분단을 전제한 군사분계선을 결정한 정전협정이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베트남의 남북 통일정권을 세우기 위한 선거를 규정한 평화협정이기도 했다. - P246

한국 정전협정 제13항은 한반도에 새로운 무기체계를 들여오지 않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1957년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한 측에 이 13항을 무시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1958년 미국 - P247

전술핵무기들과 이것들을 발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미사일 체계를 한국에 배치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합참의장 래드포드에게 핵무기 중심 미국군사전략 재편을 의미하는 ‘뉴룩‘ (New Look)을 추진하라고 지시한것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2년 11월이었다. 이에 따라 작성된 국가안보회의 문서(NSC 162/2」)는 향후 재래식 분쟁에서도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해 대응한다는 ‘대량보복‘ 전략을 담았다. 그것이 한국 정전협정 조인 3개월 뒤인 1953년 10월이었다.

미국이 대량보복전략을 동아시아에 적용해 오키나와 한국타이완·필리핀·괌에 핵무기를 대량 배치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말이었다. - P248

미국은 한반도 정전체제의 군사화를 주도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인도차이나에서는 제네바 평화협정의 무력화를 주도한다. 그 배경에는 한국전쟁을 통해 공식화된 미일동맹체제를 바탕으로 동아시아공산주의 봉쇄의 보루로서 일본을 재건한다는 청사진이 있었다. - P249

박정희 정권이 선택한 것은 독자 핵무장 모색이었다. 미국은 핵무장 확산 방지 차원에서 박 정권의 핵무장 기도를 좌절시킨다. 대신 미국은 한반도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핵무기의 존재를 사실상 공개하고, 북한에 대한 핵무기 선제사용 위협을 공식화했다.
미국은 또한 한국·일본·필리핀 · 타이완 등 동맹국들의 안보 불안을 잠재워야 했다. 1976년 한국에서 ‘팀스피릿‘라는 이름의 한미연합 군사훈련이 시작된다. 이 훈련의 규모는 해마다 늘어갔다. 미국은 한국과 미사일협정을 체결해 북한을 직접 위협하는 한국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개발계획을 승인한다. 이로써 한미동맹은 한반도에서 핵무기와 미사일 분야에서의 군비경쟁을 선도했다. 이것이야말로 1990년대초부터 국제화된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의 진정한 뿌리였다. - P254

1990년대 초부시 행정부와 1993년 출범한 클린턴 행정부의 중국가능성이 커진다.
정책은 중국을 미국 중심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통합시켜서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1995-96년 타이완에서 독립론이 퍼지면서 타이완해협에서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미국 신보수주의 정치세력 내부에중국의 잠재적 도전을 미연에 꺾어야 한다는 중국봉쇄론을 확산시켰다. 이들 신보수주의적 중국관은 2001년 이후 부시 행정부의 대중국정책에 반영된다. 그 핵심은 공화당 보수혁명이 1990년대 중엽부터 추구한 국가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이라는 목표와 결합해 2002년 ABM협정 폐기로 이어진다. 그 결과 미국과 러시아 관계에서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 사이에도 새로운 차원의 군비경쟁이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P257

김대중 정권에 이어서 2003년 초 역시 진보 정권인 노무현 정부가출범했지만, 부시 행정부가 북미 제네바합의를 폐기해 북미 간 신뢰관계가 완전한 파국에 도달한 이후였다. 북미 간 신뢰가 회복되어야만 가능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성에 의한 북한 핵문제 해결은 이미 기대하기 어려웠다. 2005년 6자회담에 의한 9·19공동성명이 성립했다. 부시 행정부의 국무부는 이에 서명했지만 재무부는 북한에 금융제재 조치를 발동했다. 성명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미국외교에 대한북한의 불신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2006년 북한의 제1차 핵실험은 그 귀결이었다. - P263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대화가 파국을 맞은것은 김정일 정권의 화폐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벌어진 혼란, 그리고 이듬해인 2010년 3월에 발생한 천안함(天安艦) 침몰사태 때문이었다. - P264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북한붕괴론에발 하나를 담근 것이었다. 2009년 말에서 2010년 초에 김정일 정부가 시도한 화폐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북한이 경험하고 있던 대혼란, 뒤이은 김정일 사망으로 들어선 김정은 세습정권의 리더십에 대한 광범한 의심, 그리고 김정은 정권이 시도한 많은 미사일 발사 시험의 실패는 북한붕괴론을 부추겼다. 그것이 이 시기 미국의 전략적인내 정책의 무시할 수 없는 근거였다. - P265

미국의 대북정책은 ‘트럼프판 전략적 인내‘의 노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전쟁도 해법이 아니지만 평화협정 협상도 대안이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현상유지 전략에 가깝지만, 북한에 대한 기존의 강력한 제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태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추구하는 반중국 동맹네트워크 유지와 동아시아 지역에서의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매우 친화적이다. - P276

미국과 국제 사회를 향해 평화조약 협상의 명분과 전략적 불가피성을 당당하게 밝히며 설득하는 더 적극적인 한국의 외교가 시급하다. 그 핵심은 미국이 사실상 ‘북한의 비핵화 선행조치 요구‘가 뒤섞인 ‘막무가내식 빅딜‘을 내세울 때, 한국은 포괄적이면서도 단계적 동시행동의 일정표를 담은 일괄타결로서의 평화조약 형태의 ‘합리적인 빅딜‘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는 일이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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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테바는 현대 사회가 운명적으로 살아왔던 거주지를 상실함에 따라 인간을 뒷받침해주던 본래적 장소와 인간의 정체성 자체가 파괴될 위협에 처해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차적 안정성의 파괴가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성을 승화하고 상징화할 수 있는 최종적 지표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을 둘러싼 욕망과 억압으로 인한 문제에 문을 열었다면, 클라인은 어린아이든 성인이든 간에 심리적 공간의 파괴와 정신적 삶의 멸절로 이어진 광기(정신병) 분석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가 최초 모성과의 대상 관계에서 도출한 아브젝시옹을 문화해석의 열쇠로 삼고 있다면, 리쾨르는 상징 해석과 성스러움이라는 종교적 경험을 통해서 전체성에 대한 시각을 열어준다. 두 대가가 모두 비천함과 성스러움은 인접해 있으며 그 수렴점이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로써 자기중심적인 근대적 자아의 빗장을 열고 타자를 향해 걸음을 옮길 것을 조용히 주장한다. 이러한 사유는 현대인의 메마른 감성에 대한 치유와 새 시대의 영성(靈性)을 위한 지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브젝시옹은 있음과 없음의 경계선에 대해 그가 만든 개념이다. 그런데 아브젝시옹이라는 개념이 최초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숙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어머니는 생물학적 어머니를 겨냥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존재의 기반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현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할 때 그 고향은 기술 문명에 대비되는 자연이었지만, 크리스테바에게 고향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문화에 의해 은폐되고 왜곡된 모성이다.

대표적인 지적 기능은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은 주로 ‘속성판단’과 ‘존재판단’이라는 두 종류가 있다. 속성판단은 어떤 사물이 어떤 특수한 속성을 지녔나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판단이고, 존재판단은 어떤 것의 표상Vorstellung이 현실계에 실제로 있다는 것을 주장하거나 반박하는 판단이다.

‘부정’의 메커니즘은 나의 본능을 충족시켜줄 대상 상실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아가 대상을 내부에서 축출하거나 거부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부정성’은 최초 사유하는 자아의 정립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자아가 본능의 만족에 붙들려 있는 한, 사고하는 주체로서의 성장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통해 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생의 초기에 유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배척하는가를 아브젝시옹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브젝시옹은 원초적 상실에 대한 부정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사고는 항상 원초적 부정을 부정하는 부정Verneinung의 토대 위에서 등장한다. 즉, 주체는 대상이 상실되었을 때에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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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퇴근해보니 커피와 함께 이 책이 도착해 있었다(커피는 ㅈㅈㄴ님께 땡투했습니다^^).


수하님께서 서문의 일부를 올리셨길래 설마 하며 목차와 서문을 잠시 읽었는데 머리가 띵했다.







부랴부랴 크리스테바로 검색해보니 몇 권의 책이 나왔는데 그 중 저자의 정보가 전혀 없어서 아래 책이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브젝시옹'이란 단어 자체를 몰라서 또 검색해보니 이런 책이 나오더라.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은 1부만 크리스테바와 관련되어 있지만 <공포의 권력>과 관련된 내용이라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첫 번째 책은 전자책으로 급하게 주문했는데 두 번째 책까지 주문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세권 다 어떻게 읽겠나ㅠㅠ 아무튼 그동안 여성주의 관련해서 읽어온 책들 중 가장 어려워보인다는 것. 


한달 안에 읽는 것이 가능할지. 그래도 어떻게든 읽어가봐야지. 읽는 분들 모두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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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1-04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은주 선생님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도 약간 도움이 될 것 같고요,
제가 주문한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석학들의 이론을 알기 쉽게 정리한 인문학 입문서 시리즈를 번역한 거라고 해서 (평도 좋길래) 주문을 했어요. 그런데 책이 원래 얇기도 하지만 <공포의 권력> 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아브젝시옹‘ 부분은 21페이지밖에 안되네요 ^^;; 라이브 이론 책은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해뒀는데 거기까지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사실 <공포의 권력>을 읽을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어요)

읽으시다가 정보 공유 부탁드립니다 ^^

거리의화가 2024-01-04 17:18   좋아요 1 | URL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조금 읽어봤는데요. 프로이트 이론부터 설명을 시작하는데 예시를 들어 설명해줘서 크게 어렵지 않네요. 저자가 말하기에 <공포의 권력>이 워낙 어려워 해설서를 써야겠다 생각해서 썼다고 합니다. 이 책이 <공포의 권력> 읽기 전 참고도서로 좋을 것 같아요(다만 2부는 다른 철학자의 내용입니다). 라이브 이론 책은 저도 크리스테바가 어떤 사람인가만 확인하고 다 읽지는 못할듯!ㅎㅎ 읽다가 관련 내용 올려보겠습니다.

건수하 2024-01-04 17:54   좋아요 1 | URL
화가님 감사합니다 ^^ 올려주시는 글 기다릴게요 :)

다락방 2024-01-04 1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여러분 제가 무슨 짓을 한걸까요. 저 진짜 시작도 못하겠네요. 아브젝시옹 때문에 미치겠네요? ㅋㅋㅋㅋ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이라니. 저도 여러분들이 관심 있어 하신 책들 다 담아 사야할까요. 생각하는 여자~는 이미 읽었지만 기억이 전혀 안나니(크리스테바..부분이 있었던가요?) 다시 읽어야겠고 말입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여러분의 정보 공유 저도 기다리겠습니다. 아놔...Orz

거리의화가 2024-01-04 17:26   좋아요 1 | URL
ㅋㅋ 다락방님.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아직 완전 앞부분이지만 일단 시작은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네요. 아<공포의 권력> 주석에 달려 있는 아브젝시옹 내용은 읽어봐도 뭔 내용인지 모르겠더라구요ㅠㅠ 휴... 아무튼 계속 읽고 공유할 것 있으면 올려보겠습니다.

단발머리 2024-01-04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저도 상호대차 신청했어요. 며칠내에 책 받고 먼저 읽고 ‘공포‘ 쪽으로 가려고요.
우리, 정보 공유 앞으로도 많이 해야할 듯 해요^^

다락방 2024-01-04 14:27   좋아요 3 | URL
저는 방금 샀습니다. 아브젝시옹~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1-04 14:33   좋아요 2 | URL
👏👏👏👏👏

거리의화가 2024-01-04 17:18   좋아요 2 | URL
와! 단발머리님, 다락방님 두분 다 멋지세요! 내용 읽어보니 이 책 참고도서로 괜찮을 듯합니다^^ 화이팅!
 

제3장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신냉전, 그리고 그 너머





청일전쟁과 미국-필리핀전쟁, 그리고 뒤이어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도발한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러시아를 대신해 중국의 동북지역을 장악하면서 ‘동아시아 제국체제‘가 성립했다. 동아시아 제국체제의 새로운 주체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두 신흥 제국이었다. 이들은 동아시아에서 각각 타이완과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필리핀에 대한 식민 지배를 발판으로, 서로 갈등하면서도 권력정치적 흥정을 통해 상호적응하고 협력했다. 극동에서 러시아의 힘을 견제하는 가운 - P184

데 중국을 경영한다는 두 개의 결정적인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였다.
갈등하되 흥정하며 협력하는 제국주의 카르텔의 질서였다. 이 카르텔의 표지는 동아시아 경영을 위한 일련의 비밀협정들 외에도 미일두 나라 사이에 형성된, 1940년 전후까지 ‘순진한 무역관계‘로 포장되어온 전략적 경제동반자 관계였다. 동아시아 제국체제의 또 다른축은 기왕에 홍콩과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 지배를 굳히면서이를 기반으로 중국에 대한 공동 경영에 참가하는 영국·프랑스·네덜란드와 같은 유럽 제국들이었다. - P185

트럼프주의는 부유층의 과두정 지향과 중하층 백인사회의 인종주의와반세계화 포퓰리즘의 연합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으로노동계층의 지지에 의존하는 민주당도 중하층 노동자층의 지지를회복하기 위해 그들의 정치적 요구에 민감해진다. 반세계화 포퓰리즘은 공화당도 민주당도 거스를 수 없는 미국 정치의 추세가 되었다.
반세계화 포퓰리즘으로 표상되는 미국 정치 내부의 반자유주의적경향과 포용성의 약화가 대외경제정책에서 개방성의 후퇴와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P201

바이든의 반세계화는 중국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와 유럽의 동맹국들에 대해서도 무역장벽을 들이대는 더 편협한 보호무역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이 경향을 ‘반도체도, 배터리도, 바이오도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요구와 함께, 이들 산업에 대한 산업보조금 정책으로 구체화했다. 주요 산업의 국적(籍)회복을 추구한 것이다. ‘리쇼어링‘(Reshoring)이라는 명패를 단 신중상주의(neomercantilism) 시대가 부활했다. - P202

요컨대,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분명 ‘조약‘ 수준의 평화협정체제를 구성함으로써 북한 비핵화와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을교환하는 틀을 마련한다는 상호이해에 근거해 진행된 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실제 공동선언의 내용도 북미관계 정상화를 포함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성을 먼저 밝히고 북한 비핵화 의무를 그 뒤에 배치했다. - P209

「2022 타이완 정책법안(The TaiwanPolicy Act of 2022) 전문(前文)에서는 "타이완의 안보를 증진하고, 지역 안정을 확보하며, 타이완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침략을 억지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중국이 타이완에 적대적 행동을 할 경우 중국에 "강력한 제재" (severe sanctions)를 가할 것을 경고했다. 이 법의 본문에서는 타이완의 민주정부를 "타이완 인민의합법적 대표자"로 정의하고, 미국과 타이완의 "강화된 방위 동반자관계"를 규정했다. 또한 타이완을 "주요 비(非)나토 동맹국" (a majornon-NATO ally)으로 지정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이 법에 향후 4년간 타이완에45억 달러 규모의 방위능력 증강을 지원하도록 명시했다. - P217

한반도의 평화협정은 현재에 없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자는 문서다. 핵무기와 핵전쟁 위협으로 고통받는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기 위한 새 질서의 청사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평화협정은 평화과정의 입구로서의 위치가 주어져야 한다. - P233

평화협정 협상에서 떠오를 주요 안건으로는 남북 간 군비통제 문제가 있고, 그것은 거의 합의 불가능한 문제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우리를 짓누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도 창의적으로 다양한 방식의평화협정을 모색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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