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핵심은 이정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면이 이런 파멸을 불러오기에이르렀으며, 그 측면이 얼마나 어둡고 강한 것이기에 이성의 자기교정 능력마저 상실하게 만들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는 곧 근대적 이성의 대변자라고도 할 수 있는 계몽사상)을 그 결과가 아니라 원리에 있어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일이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신화는 이미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계몽은 전(前)이성적 사유인 신화를 극복하고 이성의 빛으로써 수립된 사유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 명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곤란하다. 열쇠는 이들의 ‘변증법‘ 개념에 있다. 이들에게 변증법은 헤겔적 변증법이 아니라 개념의 동일성이억압한 비개념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이 억압한 개별적인 것을 드러내는작업이다. 그래서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 아래의 모순된 것들을 계몽으로통일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몽이라는 개념이 억압하고 있는 그 아래 - P590
의 모순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때 우리는 계몽 아래에서 이제까지 그것의대립항으로 여긴 신화를 발견하게 된다. 반대로 신화에서는 계몽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계몽=신화‘라는 등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계몽과 신화는 동일한 것도 아니고, 어떤 동일한 것으로 ‘지양‘되는 것도 아니다. 양자는 (양 속의 음, 음 속의 양처럼)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대 안에 똬리를 틀고 있으며, 서로 적대적 공모()의 관계를 형성한다. - P591
니시다는 국민 개인과 국가/민족 사이에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의 관계 ‘를 부여한다. 국가/민족이야말로 행위적 직관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자각의장소인 것이다. 이는 곧 신민 개인과 천황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다. 개인에게 일본과 천황이야말로 ‘절대 타자‘인 것이다. (뒤에서 논할 레비나스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니시다에게는 이렇게 황실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자이자 ‘영원의 지금‘을 중심으로 이런 관계를 맺어온 전통이 바로 ‘일본정신‘이고 또 ‘국(國)‘이다. 그리고 일본만이 이런 전통을 이어온 국가인것이다. - P602
미키는 일본에 남아 있는 봉건성 그리고 개인주의의미발달이 일본 파시즘을 특징짓고 있다고 보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로서일본적인 것에는 "형태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즉, "무형식의 형식"이 일본적 성격이라는 것이다." 니시다의 무 개념은 이런 성격의 한 정식화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 문화는 유연함과 포용성을 갖추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온갖 것들이 병존하는 상황을 빚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 사상/문화의 이런 성격은 오히려 당시 파시즘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 P609
도사카가 생각한 사물의 성격 = 특성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와 달리 정태적으로 파악되기보다 동태적으로, 즉 역사적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적 실천과 맞물려 드러난다. 도사카는 이 성격 개념을 ‘문제‘ 개념으로 잇는다. 도사카의 문제론은 미키의 그것을 이으면서도 유물론의 방향을 취한다. - P613
아나키즘은 노동조합주의/집산주의와 상호부조론의 이념, 자주적 관리에 의한 운영, 평의회에 입각한 정치, 총파업이라는 직접 행동, "일하면서공부하는" 삶 같은 원리들을 고수하고자 한 흐름이었다. 그리고 이런 원리들은 특히 파리 코뮌과 러시아의 소비에트에서 그 구체적/역사적 모습을드러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은갈등하기 시작했고(이러한 갈등은 동북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논의가 되었고, 이른바 ‘아나-볼 논쟁‘으로서 전개되었다.), 결국 러시아에서의 아나키즘 운동은 점차 고갈되기에 이른다.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은 공히 자본주의의 소유적 자유를 비판하고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다. 양자는 반(反)자본주의자유주의의 이념을 공유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의당 중심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의 잠정적인 쟁취)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양자는 곧 충돌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 P618
푸코는 권력이라는 것에 실마리를 두고서 타자들의 사유를 전개했다. 그래서 그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배제, 감금, 수용 등에 관한 고고학적 진실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유를 보다 고유하게 해준 측면은 그가 권력을 담론/지식과 연계해서, 담론 구성체와 비-담론(/신체) 구성체 사이의 비관계의관계에 주목해서 분석한 점에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인식론도 정치철학과전에 없던 관계를 맺으면서 일신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사유의 근저에 깔린 궁극의 관심사는 주체의 문제였다고 생각된다. - P640
"자기자신은 자기의식의, 동일자의 팽창과 귀환의박동으로 환원 불가능한 비틀림이다. (...) 자기-자신은 스스로와 같지 않음이며, 존재에서의 결핍이며, 수동성 또는 인내이다."(AE, 169) 레비나스의윤리적 사유는 자기타자화의 사유이다. 윤리적 주체성이란 곧 ‘같은것 안의 다른것‘이다. 박해받는 타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볼모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행한 것 때문이 아니라 타인들이 겪은 것 때문에 피고인이 된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타자를 위한 대신함, 책임짐을위한 자기타자화의 윤리학이다. - P658
데리다의 사유는 ‘불가능한 것‘의 사유이다. 그것은 바깥의 바깥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이 동일자의 바깥에만 존재한다면, 동일자를 초월해 있다면,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각종 동일자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동일자 내부의 불가능한 것이다. 내부의 내부는 웜홀을 통해 외부에 이어져 있다. 내부의 내부로서의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고 그것을 통해서 동일자를 변화시켜나가는것, 여기에 탈구축의 철학이 있다. - P660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자신이 벌여놓은 짓을 도외시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려 하는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다. 기술중심주의에 휘둘리는 포스트휴머니즘이 아니라, 윤리적 주체로써 무너져가는 세상에 맞서는 새로운 휴머니즘인 것이다. 생태적 가치의 추구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핵심은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다. 우리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상당수가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일 뿐이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중심주의를타파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어떤 인간들이 악업을 저지르고 어떤 인간들이 그것과 싸우느냐 하는 데에 있다. 이 점을 전제하고서 자연-인간관계를 논해야 하는 것이다. - P688
오늘날의 주요 저항 주체는 지식 계층, 성적·신체적 소수자들, 노동자들이 주요한 세 축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저항주체들은 과거의 역사에처럼 어떤 단일하고 일사불란한 대오를 형성하고있지 않다. 그래서 문제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연대를 이룰 수 있는가에 있다. 현대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으며, 때문 - P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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