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은 “여기서 신의 실존 및 영혼과 신체의 구분이 증명되다”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제로만 본다면 이전의 형이상학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성찰》이 이전의 철학들과 크게 다른 점은 오히려 책의 구성, 문체, 기술 방식 및 철학적 방법론 등에 있다. 이것들을 통해 이전의 형이상학적 주제들은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거듭났으며, 그 이후로는 누구도 그 이전의 철학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참되다 믿었던 것들 가운데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내가 생각 없이 경솔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성찰을 거친 타당한 근거들에 따라 하는 말이다. 그러니 무언가 확실한 것을 발견하길 원한다면, 앞으로는 이런 논증에 대해서는 명백히 잘못된 논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동의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무언가 확실한 것을 만날 때까지, 아니,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인식할 때까지 계속 나아가자.
이제 내가 보는 모든 것을 거짓으로 가정하자. 위조된 기억이 재현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결코 실존한 적이 없다고 믿자. 나는 아무런 감관도 지니고 있지 않으니, 몸이니 모양이니, 펼쳐있음, 운동, 장소는 키메라[같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참된 것일까? 아마도 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누구인지는 몰라도 의도적으로 항상 나를 속이는, 대단히 능력 있고 아주 교활한 사기꾼이 있다. 이제는 그가 나를 속인다 하더라도 나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있다. 실컷 속인다 하더라도, 내가 나는 무엇이다, 하고 생각하는 한, 그는 결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것을 대단히 충분히 숙고한 뒤 마침내 이러한 공리를 확립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는 내가 소리 내어 말하든 정신으로 파악하든 언제든지 피할 수 없이necessario 참이다.
나는 발견한다. 생각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나와 나누어지지 않는다.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얼마 동안? 물론 내가 생각하는 동안. 다시 말해 [이런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내가 모든 생각을 그만둔다면, 그와 동시에 내가 있다는 것도 완전히 멈추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나는 오로지 피할 수 없이 참된 것만을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엄밀히 말해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이전에는 말뜻을 몰랐던, 정신이나 영혼이나 지성이나 이성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참된 것, 참으로 실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것인가? 말했다시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정신보다 더 쉽게 혹은 더 명백하게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다시피 물체들 역시 엄밀하게 말하자면 감각이나 상상력이 아니라 오직 지성으로써 지각되며, 만져지거나 보여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식되는 까닭에 지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실체라는 사실로부터 어떤 실체의 관념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것이 무한 실체의 관념은 아닐 것이다. 무한 실체의 관념은 정말이지 무한한 실체로부터만 비롯될 것이다. 또한 나는 무한한 것을 참된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한한 것을 부정함으로써 지각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내가 마치 정지를 운동의 부정으로, 어둠을 빛의 부정으로 지각하듯이 말이다. 그렇기는커녕 나는 무한 실체가 유한 실체보다 더 많은 실재성을 담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무한한 것, 즉 신에 대한 지각이 유한한 것, 즉 나 자신에 대한 지각보다 어떤 면에서는 먼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 만일 내게 더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없어서, 내 결함을 이것과 비교함으로써 깨닫지 못했다면, 내가 의심하고 욕구한다는 사실, 즉 내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내가 전적으로 완전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내가 과연 어떻게 알았겠는가?
삶의 모든 시간은 무수히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고, 이 낱낱의 부분들은 어떤 식으로도 서로 기대어 있지 않으며, 어떤 원인이 나를 이를테면 다시 이 순간에 창조하지 않는다면, 즉 나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내가 방금 전에 실존했다는 것으로부터 지금 실존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사실 시간의 본성에 주목하는 사람에게는 명백한바, 무엇이든 낱낱의 순간을 지속하는 어떤 것을 보존하는 데에 드는 힘과 작용은, 아직 실존하지 않는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에 드는 것과 똑같다. 따라서 보존과 창조는 자연의 빛에 따라 밝혀지는 것 가운데 하나지만, [실재적으로는 구분되지 않고] 단지 이성적으로만 구분될 뿐이다
많은 부분적 원인들이 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참여했다. 이 원인에서는 신에게 귀속되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의 관념을 받았고, 저 원인에서는 다른 완전성의 관념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모든 완전성은 우주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신이라고 하는 하나의 장소에 모두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단일성, 단순성 곧 나뉘지 않음이야말로 내가 신 안에 들어 있다고 파악하는 주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모든 완전성 가운데 단일성의 관념은 내가 다른 완전성들의 관념들을 얻게 된 어떤 원인이 없었다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원인이 나로 하여금 이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할 수 없었더라면, 이것들이 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나뉠 수 없다는 것 또한 인식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바대로 신한테서 얻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 없이 올바로 인식하며 이런 경우에는 내가 그르칠 리도 없다. 그렇다면 나의 오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물론 이 한 가지에서, 즉 의지가 오성보다 더 넓게 열려 있는데도 내가 의지를 지성의 한계 안에 가두지 않고 오히려 인식하지 않은 것들에까지 확장시키는 일에서 비롯된다. 이런 것들에 대해 의지는 차이 없다는 투로 있기 때문에 참되고 좋은 것에서 쉽사리 벗어나며, 그리하여 나는 속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한다.
판단을 내릴 때 지성이 맑고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까지만 의지가 확장되도록 묶어둔다면, 우리가 오류를 범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맑고 또렷한 지각은 의심할 바 없이 어떤 것이고, 따라서 어떤 것도 아닌 것으로부터는 비롯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의 작자는 반드시 신이다.
상상하는 데에는 내가 인식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 어떤 특별한 마음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마음의 노력이야말로 상상력과 순수 지성의 차이를 훤히 밝혀주는 것이다
물체는 본성상 언제나 나뉠 수 있음에 반해, 정신은 전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신, 곧 오직 사유하는 것으로서의 나 자신을 살펴볼 때, 나는 내 안에서 어떤 부분들을 구분할 수 없고, 오히려 내가 완전히 하나이자 통합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로는, 신체 전체와 정신 전체가 통일된 듯 보이긴 하지만, 발이나 팔이나 무엇이든 다른 신체 부분이 잘려 나간다 하더라도 정신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없다. 나아가 의지 기능, 감각 기능, 이해 기능 등이 정신의 ‘부분’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하나의 동일한 정신이 의지하고, 감각하고,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신체의 모든 부분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뇌로부터, 혹은 아마 뇌의 어떤 작은 부분, 이른바 ‘공통’ 감각이라는 것이 들어 있는 부분으로부터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