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여자들에게 : 엉망인 여성해방론
다나카 미쓰 지음, 조승미 옮김 / 두번째테제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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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생명, 그 뿌리를 간직한 자궁이 지금 부활하고 있다. 수컷을 바라보며 다른 암컷과 경쟁하여 교태를 부리는 가운데서만 살 수밖에 없던 여자가 자신의 역사성에서 자신을 해방하려 하는 것이다. 지금 그런 여자가 있다.
암컷의 제 새끼 죽이기, 이런 피억압자의 극한의 자기 표현은 여성해방운동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그 배경에 여자라는 성의 변증법이 있다. 부정적인 자궁에서 긍정적인 자궁으로 이르는 길은 암컷에서 여자로, 여자에서 여자들로 이어질 길이다. - P65

이 책을 읽기 전 공교롭게도 일본의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도쿄대 투쟁 등을 비롯한 사회적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을 함께 읽는 분들을 통해서 이 책의 존재를 얼핏 듣게 되었으니 우연치곤 정말이지 절묘한 타이밍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과연 일본의 우먼리브운동은 어떤 과정에서 시작되고 전개되었는지 이 책을 읽기 전 내가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중반 부분까지 이 책을 읽는게 힘들었다 말할 수밖에 없겠다. 저자의 개인사를 비롯하여 그녀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다행히 후반부에 가니 저자의 주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는 되었다만.

책에서 세 가지 키워드를 뽑아냈다. 첫 번째, 당시 일본의 역사. 두 번째, 당시 일본의 신좌익 운동과 사회적 투쟁이 여성해방운동과 교차되었을 때의 전개와 결과. 세 번째는 여성의 실존적 문제에서 여성해방운동과의 관계. 결국 역사, 사회, 개인의 문제다.

저자의 개인적 고백은 솔직했다. 꽤 많은 여성들이 어릴 적 남성들에게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하지만 같은 여성이자 나를 낳은 어머니에게조차 그 사실을 털어놓는 일을 꺼려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세월이 흘러서 구체적인 기억이 사라진다 해도 그 잔상과 불쾌한 느낌은 여성들을 계속 따라다닌다. 가장 큰 문제는 그 경험이 일회적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여성들의 신체적, 심리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것이다. 그 귀결이 무엇이든 폭력적인 형태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씁쓸함을 남긴다.

나는 어디까지나 내가 저지른 죄상이 무엇인지 전혀 추측조차 못하는 죄인이었다. 나는 열심히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려 했다. 엄마가 자꾸 묻는 바람에 벽에 딱 붙어서. 그런데 뇌리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돼!˝ 하고 무서운 표정을 한 엄마의 말만 남아 있었다. - P103

잘못을 저지른 남성은 그 일을 뉘우칠 리가 없는데(다른 여성에게 범죄를 안 저지르면 다행) 정작 피해를 입은 사람은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괴로워한다. 결국 가장 가까운 어른인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말할 수밖에 없겠으나 그들도 사람이라는 현실이 있다. 게다가 아이를 낳는 것부터 선택해야 하는 여성들은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조차 책임을 더 가져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회적 제도는 여전히 너무나 부족하고 차별적 관행은 개선되질 못하고 있다.

평범한 가정에서는 평범한 부모가 평범하게 아이를 가르친다. 즉 평범한 가정에서는 딸에게 장래에 좋은 아내이자 좋은 엄마가 되라고 한다. 어린 완벽주의자 여자들은 어떻게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좌절하면 자신을 한심하다고 여기고 스스로를 철저히 벌하려고 또 애를 쓴다. 한 되씩이나 되는 밥을 먹고서는 토해 낸다.
강조하고 싶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정이 이상이 된 현실이 바로 이 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P384

저자의 주장이 이해는 가지만 이를 개인과 가정의 문제로만 다루기에는 불합리한 면이 있다. 구조적인 도움도 뒷받침되어야하지 않을까. 얼마 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몇십만원의 원금을 빌렸다가 말도 안되는 이자로 빛더미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접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사회는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1960년대는 미소의 두 강대국이 존재했지만 세계적으로 좌익의 흐름이 우세할 때였고 일본도 그 선상에 있었다. 베트남 전쟁, 한일조약 소식이 들리자 일본의 민중들도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사회당/공산당 데모를 비롯하여 학생 운동도 도처에서 시작되었다.

1969년 1월 18일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체포하는 강제 진압이 일어났다. 그날 밤 나는 밤새 친구와 기동대가 빙 둘러싼 도쿄대 주변을 배회했고 이튿날 오차노미즈에서 벌어진 투쟁에 참가했다.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나는 지금 내가 역사의 모든 것을 묻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 P127

나의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적군파가 생긴 직접적 계기는 1969년 4월 28일 ‘오키나와의 날(오키나와 반전의 날)‘이다. 그날의 패배에 대한 총괄에서 적군파가 나왔다. 앞서 1월 18, 19일에 도쿄대 야스다 강당 투쟁 공방이 극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활발히 활동을 하던 신좌익은 이제 지는 해에 가까워졌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4월 28일 당일에 적이 압도적으로 퍼부은 물량 공세에 신좌익은 박살이 났다.
˝오키나와의 날에 벌인 대중적인 무력 투쟁이 패할 수밖에 없었을 때 자연 발생적으로 도달한 군사적 투쟁의 한계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또 소시민인 투쟁 주체의 한계성 또한 확실히 드러났다.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투쟁의 약점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혁명이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시대도 종언을 고했다.˝
위는 당시 내가 쓴 전단지 내용이다. 생각해 보니 1969년 4월 28일에 신좌익은 그전까지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고서 어쩔 수 없이 풍부한 ‘0‘의 지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는 저녁놀 가운데 적군파와 여성해방운동이 태동했다. 이 둘은 신좌익 운동의 아이들로 태어났다. - P241~242

투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저자는 그 실패를 통한 한계를 느끼고 여성해방운동의 길을 스스로 찾아나갔다. 돌이켜보면 과거 한국의 일제 해방을 위한 투쟁에 나선 이들도 시작이 거창한 대의었음을 인식하고 뛰어든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내가 그 길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겠지. 그러나 보편의 길에 밀려나 있던 여성들이 투쟁의 길에 뛰어들었을 때 저자도 그랬지만 개인으로서의 억압의 경험을 분쇄하기 위해 마냥 뛰어들었던 사회와의 괴리가 쉽게 부수어질 수 없음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을 것 같다. 혁명과 진보를 자처한 남성 동지들도 여성 동지들을 편견으로 대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자신들이 결혼하면 투쟁하는 여성과 살지 않겠다는 소리를 듣고 뒷일을 자처했으나 오히려 같은 남성들로부터 소외당하거나 차별당하는 경험 같은 것 말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도움을 얻어 승승장구한 전범기업과 우익 정치인들의 행보를 문제시삼고 당시 뛰어든 일본 내 많은 이들이 존재했다. 가해자의 후손을 자처한 그들의 용기가 한편으로 대단하다 생각이 들면서도(물론 그들도 가해자로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일부 세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 도움을 주었던 많은 민간인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남성들은 전쟁에 나아갔고, 여성들은 그들 뒤에 있었다. 아시아 각국의 많은 여성들이 일제의 전쟁을 위해 동원되었는데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여전히 문제시되고 있다. 일본 내 여러 민들 간의 차별도 문제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조선인, 오키나와인 등을 향한 차별적 시선은 개인 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예전에 일본 여자들은 나라를 위하고 가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몸과 마음을 다 갖고 있는 총체적인 존재인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정숙한 여자‘는 ‘일본의 어머니‘가 되어 전쟁터 후방에서 침략 전쟁을 지원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전쟁터에서 황군 위안부들은 남성의성을 풀어 주는 역할, ‘신국 일본‘이라는 대의를 지키는 그림자 역할을해야 했다.
앞서 썼듯 위안부 대부분은 본국에서 잡아 온 조선인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일본 국내에서는 남자의 배설 행위일 뿐인 ‘프리섹스‘가 폐지된 집창촌을 대신한다. 한편으로 이런 ‘경제적 동물‘들이 동남아, 대만, 한국에 가서 그 땅의 여자들을 변소 대신으로 삼는다. - P264

나의 어둠과 타인의 어둠 즉 내가 살아가는 모습과 타인이 살아가는 모습이 경합하는 가운데 ‘우리의 내일‘에 빛이 싹튼다. ‘가해자 논리‘는 피억압자 자아를 버리게 할 우려가 있다. 억압자인 동시에 피억압자인 모순 속에 투쟁의 변증법이 숨 쉬고 있는데, 자신을 억압자일 뿐이라고 한쪽으로 기울여 고정하고 굳혀 버리면, 겉으로 내세운 명분밖에 없는 혁명 대의를 사명감으로 갖게 되며, 그런 대의에 나를 바치게 된다. 이런 과정에 ‘가해자 논리‘의 범죄성이 있는 것이다. 내가 실감한 것은 억압자라는 것은 철저히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란 점이었다. 이는 늘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논리였고, 남자들한테 남자다움과 혁명가에 대한 기대를 만족하게 해 주는 논리이다. - P254

이처럼 이 책은 저자가 여성해방운동을 왜 시작하게 되었고, 이를 위한 배경 정보에 의한 개인의 과거사, 이후 현재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며 변화해 왔는지를 그려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저자가 후기에도 밝혔듯이 지금의 독자가 보기에는 너무 뜨거운 열정과 행동으로 비춰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시대와 그 시대는 다르고 개인의 경험도 다르며 당연하듯 그 때는 저자의 나이가 어렸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리라.

여성해방운동은 여성 스스로가 자립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고, 여성 간의 대화를 통해 연대해나가야 한다 저자는 말하고 있다. 몇십년이 흐르는 동안 일본의 현실이 바뀌었고 여성의 현실도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일본 현대 여성해방운동의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어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변소로부터의 해방‘ 등 뒤에 실린 자료는 참고 자료로도 잘 활용할 수 있을 듯하다).

여성해방이란 여자들이 힘을 모아 여자가 살기 힘든 현실을 깨부수는 것이며, 동시에 서로 갈등하고 미워해온 여자와 여자의 관계성 속에 에로스를 되살리면서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자에게 에로스는 나의 자궁, 즉 나의 자연과 내가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나온다. 소통은 ‘여자인 것‘에서 오는 아픔과 대화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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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28 1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다 읽어내신걸 축하드리고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중간 넘어가는데 지금까지도 이 책읽기가 제게는 수월치 않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저자가 뭐랄까, 너무 .. 맹렬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결이 저랑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도 부지런히 읽어서 완독하도록 하겟습니다. 다시 한 번 고생하셨습니다!!

그나저나 이 책을 선택한 게 거리의화가 님께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이었네요!! 씐나요!! >.<

거리의화가 2024-11-29 05:48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도 이 책이 수월치는 않으셨군요^^; 맹렬하게 느끼신 점 저도 백 번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나저나 선정하시는 책이 이번에도 제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어찌 이리 딱딱 골라오십니까? 다음 달에도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