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19] A New Kind of King

영국에 Ricard I세는 Richard the Lion hearted로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Richard는 자국의 소유권을 팔아 넘기고 군대를 모아 crusade를 떠난다(???). 프랑스로 간 그는 왕과 Austria의 영주에게 함께 힘을 모으기를 요청하나 Austria의 영주는 거부하고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버린다. Richard는 자국의 군대만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했으나 Saladin 군대는 예상보다 끈질겼다. 이 때 고향에서 남동생인 John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게 된 그는 발걸음을 돌린다(소유권 포기 아니였니?). Austria로 지나가려던 Richard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 영주, 사람들은 죽은 줄 알았으나 Blondel이 감옥을 뒤진 끝에 그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알린다. Austria 영주가 요청한 막대한 배상금을 내고 Ricard는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가 쳐들오는 바람에 사망한다. 그렇게 John이 영국의 왕위를 이었다.

John은 프랑스 전투에 막대한 돈을 썼기 때문에 세금을 늘려야 했는데 이를 귀족들에게서 받아낼 생각을 한다. 이에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이렇게 civil war가 발발했다. 1215년 여름 Runnymede에서 Magna Carta 서약이 발표되는데 이는 지휘권자가 어떠한 행위를 하기 전에도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에 기초했다. 오늘날의 의회민주주의에 의회, 상원/하원도 이 법률의 기본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영국왕 John은 귀족들에게 세금을 걷어갔지만 귀족들은 소작농과 농노들에게 돈을 뜯어갔기 때문에 점점 사람들의 삶은 팍팍해졌다. 이 때 로빈훗의 전설이 시작된다. 로빈훗은 부자들의 돈을 뺏어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우리 역사에서 보면 홍길동이나 임꺽정 같은 의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존재다. 로빈훗이라는 캐릭터가 지금까지 살아남고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은 그만큼 그 시절이 살기 힘들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CH20] The Diaspora

한 유대인 학자가 있었다. 이름은 Yohanan ben Zakkai. 그는 예루살렘이 운명에 처했음을 느끼고 관을 사들여 그 속에 들어간 다음에 죽은 척 한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예루살렘 바깥으로 피신시킨다. 수백년 간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유대 회당에서 예배를 하고 토라를 읽는다. 유대인들은 스페인에 정착을 많이 했는데 상대적으로 이슬람 교도들이 유대인들에게 좀 더 친절했기 때문이다. 랍비와 토라 때문에 유대인들은 존속할 수 있었다.

Cordova의 똑똑한 랍비 이야기. Cordova의 수장은 주위의 경계의 말을 듣고 유대인들을 내쫓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테스트로 가장한 자신의 명령을 전한다. "유대인들은 3개의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첫 번째는 "하늘에 별이 얼마나 많이 떠 있을까?" 두 번째는 "진실과 거짓 사이의 거리는?" 세 번째는 "종이 한 면에는 'Stay'라고 적혀 있고 다른 쪽 면에 'Go'라고 적혀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그대로 행해야 한다."

랍비의 첫 번째 대답은 "Five million, four hundred thousand, three hundred and two." 세워봤다며 당당하게 이야기하는!ㅋㅋ 못 믿어도 할 수 없음. 어차피 못 세워볼 것 아닌가.

두 번째 대답은 "The truth is what you see with your own eyes. A lie is what another tells you to be true, but which you canno see. The distance between your eyes and your ears is the width of one hand."

세 번째 대답은 랍비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좀 뜸을 들이더니 종이를 씹어 먹어버린다. "내가 선택한 종이는 없어졌지만 그 반대쪽은 아직 있다. 어느 쪽이든 나는 반대 쪽을 선택할 것이다." 결국 랍비의 대답이 인정되어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대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CH21] The Mongles Devastate the East

세계 서쪽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람들이 싸우는 동안 동쪽에서는 다른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몽골인들이 먹을 게 떨어지면 말의 혈관을 통해 피를 섭취하고 다하면 봉합한 뒤 말을 다시 탄다는 것이 신기했다(몽골족이 그런다기보다는 유목민들의 생활 방식이 맞을 것이다). 아무튼 칭기스칸은 1167년에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부족의 리더가 되지만 몽골은 여러 부족이 존재했으므로 이를 또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고 드디어 "텡그리(하늘 신)가 나를 선택했다!" 선언한 뒤 대칸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서쪽을 먼저 정벌하는데 특히 이슬람 세력에게는 테러에 가까웠다(이슬람인에게는 공포에 가까웠을듯). 1227년 칭기스칸이 병을 얻어 죽고 추종자들에 의해 시신이 옮겨졌으나 현재까지도 무덤의 위치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다.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1260년 중국 정복을 완성한다. 중국군이 화약을 쓰는 바람에 당황했으나 결국 중국을 굴복시키고 원 왕조를 세운다. 몽골이 정복하지 못한 것은 일본이었다. 두 차례나 호기롭게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향하려 했으나 바람(신풍 = 가미카제)의 방해로 실패로 끝났다. 이 때 일본으로 가기 위해 고려의 노동력과 기술력이 사용되었다-_-


[CH22] Exploring the Mysterious East

유럽 사람들은 중국을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중국으로 통하는 실크 로드를 이용하여 상인들이 중국에 있는 상품들을 바깥으로 실어 나르면서 유럽 사람들도 중국의 문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쿠빌라이 칸은 유럽과의 무역이 중국에 이득이 됨을 알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는 이탈리아 상인인 니콜로의 아들이다. 마르코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중국으로 이미 떠나 그가 15살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대칸은 그에게 로마의 성유(holy oil)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그는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떠나고 마르코 폴로가 여행 중간에 병이 드는 바람에 쉬었다가 두 부자는 베이징에 도착한다. 두 사람은 칸을 만나고 그들은 20년간을 중국 곳곳을 여행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가 남긴 여행 기록은 책으로 남아 당시의 상황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여정을 마치고 이탈리아에 돌아간 두 부자는 남루한 옷 때문에 거지라 오해받고 쫓겨날 뻔했으나 옷 속에 감춰둔 온갖 보석류들을 꺼내놓자 그제서야 받아들여졌다고.

쿠빌라이 칸 이후에 몽골은 분할되어 힘이 쇠약해진다. 중국에는 명 왕조가 들어서고 강력한 황제인 Yongle(영락제)가 즉위한다. 그는 1421년 베이징에 수도를 대표하는 궁전을 지으라 주문하고 14년간 작업이 이어진다. 무거운 돌을 수도까지 옮기는데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궁전을 둘러싼 석벽은 30 피트 높이로 지어지고 석벽 안에는 9999개의 건물들이 만들어진다. 이 건물들은 돌로만 만들어지지 않고 쌀과 라임으로 붉은 벽돌을 이어붙이게 함으로써 몇 백년을 끄떡 없이 유지할 수 있게끔 했다. 황색은 중국 황실의 상징색이며 건물들은 황금 용과 노란 벽화, 지붕도 온통 황색 타일로 칠해졌다. 이 영역은 외부에서 전혀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Forbidden City라고 불려진다. 


[CH23] The First Russians

The Rus(루스족=Rurik)는 콘스탄티노플 북부에 살았다. 원래는 슬라브족이 살던 곳인데 루스족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들은 결혼을 하며 자연스레 인종 간 결합이 되었다. 그들은 항해술이 뛰어나서(바이킹의 후예) 배를 타고 나가 콘스탄티노플에 몇 주에서 몇 달을 오가며 항해했다. 루스족의 지도자는 그곳을 오가는 것보다 공격해 무너뜨리는 것이 싸게 먹힌다 판단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비잔틴 군대에는 Sea fire(oil that kept on burning even when it was spread out on water)라는 비밀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결국 공격에 실패한다. 러시아 왕자 블라디미르는 콘스탄티노플에게 화해의 선물로 6천명의 러시아 병사를 선물한다. 블라디미르는 비잔틴의 공주와 결혼을 하고 정교회로 개종을 한다. 오늘날 러시아 국명은 이 Rus에서 온 것이다.

원래 러시아는 하나의 부족이 아닌 여러 부족이 결합된 곳이었다. 이반(Ivan)은 모스크바의 왕자였는데 그 대에 몽골로부터 자유를 얻고 다른 러시아 지역도 통합하면서 이반 대제(Ivan the Great)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는 훌륭한 왕이었으나 손자는 그러질 못했던 것 같다.(Ivan the Terrible) 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자신을 차르(tsar)라고 부르고 러시아를 더 부강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내가 죽은 후 정신 이상이 된 후에 비밀 경찰을 만들어 무고한 자들 포함하여 배반자들을 처형하는 등의 행동을 한다. 러시아 귀족들은 그의 아들이 얼른 성장해서 왕위를 잇기를 바랐다. 어느 날 이반과 아들이 싸우다 화가 난 이반이 그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후 그는 급 정신을 차리고 속죄의 삶을 살았다고…


[CH24] The Ottoman Turks Attack

투르크인(the Turks)은 몽골군의 추격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마을을 공격하고 음식을 약탈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슬림 상인들과 교역하면서 무슬림이 되었고 비잔틴 제국 변경 지역에 정착했다. 투르크 왕국은 점점 커져 왕을 술탄으로 부르고 비잔틴 제국을 넘보기 시작한다. 1444년 메흐메드(Mehmed)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명하고 군대는 유일하게 육지에 닿아 있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포를 이용하여 공격했지만 그럼에도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은 방법을 바꾸어 북쪽 성벽을 확보하기 위해 북쪽 항구(The Golden Horn)에서 서쪽 벽까지 육지 길을 만들어내 결국은 모든 방향에서 공격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하필 일식이 발생하는데 비잔틴 제국이든 오스만 터키든 이 현상을 전쟁의 끝을 의미한다고 인식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마침내 열렸고 내부의 것들은 사라졌다. 하기아 소피아 교회는 모스크로 변했고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이 사라진 날이자 로마의 치세의 종언을 고하는 날이었다. 

술레이만은 1520년 오토만 제국의 술탄이 되었다. 그는 솔로몬왕의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는 터키 사람들에게 적용할 법을 만들려 했다. 비잔틴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가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법률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을 따르고 거기에 새 법을 따르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감독을 했다. 스파이 체계를 갖추고 변장을 한 뒤 잠행을 나가 자신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법은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였다. 그는 술탄에서 나아가 칼리프(종교 지도자)까지 된다. 다행히 사람들은 이를 따랐다. 꿈에서 황금 사자가 자신에게 달려들어 물어 뜯히고 깨어나 예루살렘을 보호하지 않아 발생한 일임을 느끼고 the Lion Gate를 예루살렘에 세운다. 이는 지금도 있다. 비록 로마 밑으로 내려가지 못했지만 술레이만은 자신의 치세 때 오스만 터키를 가장 강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즉위한 아들이 정사를 잘 돌보지 않아 점점 국력이 약해졌다. 이후 300년 간 유지된 터키는 더 이상 술레이만 때만큼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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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1-28 1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원서읽기, 응원하는 1인입니당~~~
그리고 부럽습니다.(히죽~~)

거리의화가 2024-01-29 16:31   좋아요 2 | URL
페크님 감사합니다^^ (히죽~~)이 이모티콘인 줄 알았어요!ㅎㅎ 응원 받았으니 더 열심히 읽어야겠네요^^

희선 2024-01-29 0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 공부도 하고 세계사를 다시 살펴보기도 하겠습니다 저는 세계사 다 모르는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1-29 16:32   좋아요 1 | URL
저도 세계사는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요. 빈 구멍들이 많다는 걸 읽으면서 느낍니다. 희선님 감사합니다^^
 

1부

수급이 빈곤네트워크의 의무통과점이 되었다고 내가 생각하는 까닭은, 정부 정책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서사,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모두 수급(기초법)을 경유해 그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공공부조의 수급자로 구획되면서 가난은 특정한 양식과 문법 안에 고이고 말았다. 빈곤을 우리 시대의 정치적 핵심 의제로 삼는 일은 그렇게 점차 요원해졌다. 빈곤이 ‘우리의 삶‘에서 ‘저들의 문제‘로고립되면서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빈곤을 끝 - P27

장내자는 결의를 압도해버렸다. - P28

의존성 논의가 복지 영역에서 특히 만연한 것은 사회복지야말로 후술할 사회적 빈곤‘ 의제와 조응하여 등장한 지식과 기술의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복지학 발전의 주요 참조국인 미국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전해온 사회공학과 개척 서 - P66

사를 중심에 둔 선별적 역사 서술이 결합하면서 자율적 개인과 독립을 이상으로 삼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자립‘을 숭배하고 ‘복지 의존welfare dependency‘을 경멸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시선을 부과하는 담론 권력으로자리 잡고, 이들의 사회 안전망을 최소화하는 정치 전략으로 작동해왔다.(O‘Connor 2001; Fineman 2004)이러한 흐름에 맞서, 진보적 사회복지학자들은 의존의 보편성을환기하며 복지 의존에 씌우는 혐의를 거둘 것을 호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지 의존을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증진할 수 있는 기초"
로 재정의하는 움직임(김병인 2017 88)이나 돌봄 윤리의 선언만으로 의존이 문제가 된 현실에 균열을 내기란 불가능하다. 복지가 직업화·제도화·산업화를 거치며 ‘성장한 역사란 뒤집어보자면 사회복지 체제 구축에 관여해온 종사자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 ‘의존해온 역사다. - P67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금융의 일상화로 투자가 주업이 된 사람들이 허다하고, 기술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임금노동의 비중은 계속 줄고 있지만, 빈곤 통치에서 임금노동이 갖는 위상은 여전히 견고하다. 노동이라는 기준이야말로 근대 빈곤 통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강제노역에서 근로연계복지에 이르기까지, 빈곤 통치의 역사는 인간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과 제도를 구축해온 과정이다. 여기엔 멀쩡한 노동자라면 수급을 신청할 이유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빈곤 통치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운동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계급은 물적 관계이지만 ‘노동자‘는 수많은 정체성 가운데 하나로 탈구된 지 오래이다 보니(신현우2022: 71) 이상적인 노동자의 ‘자격‘에 대한 암묵지를 발견하기도 어렵지 않다. - P105

인류학자들은 집home 을 건조물이나 자산에 국한하지 않고 일종의 희망이자 미래로, 세계에서 자기 자리place를 확보하려는 지속적노력과 꿈의 표현으로 봤다. 사람들은 집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물질성, 감정, 사회적 관계, 거주 실천의 교차 속에서 부단히 만들고, 이 실천 속에서 소속, 안전, 가치의 감각을 조율한다.(Samananiand Lenhard 2019 7) 이는 홈리스, 이주자, 난민에게 분명 더 위태롭고 고된 노동이다. 이 장에서 나는 가난한정으로서의 집‘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달리에서끼쳤는가를 살핀다. 집이 수많은 행위자의 실천이 매개된 결과라면, 과정으로서의 집을 기술하는 작업이란 이들의 실천이 더 너른공간과 더 긴 시간대에 걸쳐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었는가를 살피는 일이다.(Brun and Fábos 2015)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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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남아시아사 1권을 읽고 현재 2권을 읽고 있는 중이다. 1권과는 다른 느낌이어서 흥미롭게 읽어내려가고 있다.


오늘은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와 미얀마의 만달레이 부분을 읽었는데 '스투파'가 나오길래 검색을 했다.

그러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인도 미술 관련 전시(<스투파의 숲, 신비로운 인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공동기획으로 하는 전시이고 흔치 않은 주제의 전시인 것 같아서 호기심이 갔다.

작년 12월에 오픈을 해서 올해 4월 중순까지 한다. 아쉽게도 얼리버드 기간이 끝나 이제는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이 아니면 정가지만 착한 가격이라 상관 없다. 


미리 다녀온 사람의 후기를 찾아 보면서 구성도 흥미롭지만 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신경 쓴 조명이나 배치도 눈에 들어왔다. 

만약 검색을 하지 않았다면 전시를 지나치고 놓쳤을 것이다. 

예전에는 주기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전시를 보고 강연을 듣기도 했는데 이제는... 


이번에 가게 된다면 몇 년만에 가게 되는 것이라 여행하는 느낌으로 가게 될 것 같다. 




인도 미술을 아예 모르기 때문에 가기 전에 인도 미술 관련 책을 읽어보고 가는 것이 관람을 더 즐겁게 하는 방법이겠지.


이 시리즈는 진작 찜해둔 것인데 우선 순위에 밀려 아직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1권을 읽고 마음에 들면 이어서 읽어봐야지.










이번 주 내내 춥더니 그나마 오늘 낮에는 햇빛 때문에 살 것 같구나.

햋빛 쬐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고 어제 발매 된 곽진언 음반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금요일! 금요일은 어쨌든 금요일이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대출을 3권 빌렸는데 1권만 완독하고 1권은 진행중이고 1권은 아직 시작도 못했다. 

일주일 연장했는데 대출 기간이 또 임박...! 역시 도서관 대출은 2권까지가 적당한 것 같다. 3권 넘어가면 힘들군...


이 책들 포함해서 주말에는 열독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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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1-26 14: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곽진언의 앨범이 새로 나왔군요!
전시회 소식도 솔깃합니다. 정말 찾아보지 않으면 놓치는 전시, 공연들 많지요. 알고싶지 않은 광고는 넘치는데ㅎㅎ화가님 좋은정보 공유해 주셔서 감사해요.

거리의화가 2024-01-27 20:50   좋아요 1 | URL
네^^ 싱글은 몇 번 나왔는데 이렇게 모아서 내는 것은 오랜만이어서 반가웠네요^^
전시회 가본지가 어느새 1년이 다되어가서(서울 나가기가 왜 이리 힘든지ㅋㅋ) 아무튼 이번에 마음 먹고 가보려고 합니다.

페넬로페 2024-01-26 15: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시회 다녀와야 겠어요.
4월까지이니 날씨 따뜻해질때요~~
곽진언의 노래도 좋고요.
생각 같아서는 도서관에서 책 한 권만 빌려다 읽고 바로 반납하는 것이 젤 좋을 것 같은데 가면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주말 독서 화이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4-01-27 20:56   좋아요 2 | URL
날씨 따뜻할 때 전시회 좋겠어요^^ 저도 또 전시회 가본지가 좀 되어서 나들이 하는 기분이 될 것 같습니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1권은 이상하게 안 빌리게 되더라구요. 최소 2권 이상을 빌리게 되는데 가끔 함께 읽는 책들이 많을 때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 반납할 때는 정말 안 빌려야할 것 같아요. 집에 쌓인 책을 좀 치우려면!ㅋㅋㅋ

건수하 2024-01-26 2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공포의 권력>을 다 읽은 분의 여유가 느껴집니다...

스투파가 뭔지 몰라서 찾아봤어요. 인도네시아에서 ‘보로부두르‘ 라는 사원에 갔던 적이 있는데 거기 한 가운데 있던 게 스투파였나봅니다.
괜히 반가워서 댓글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4-01-27 20:55   좋아요 1 | URL
스투파가 끝이 뾰족한 불탑이라고 하더라구요ㅎㅎ 인도네시아 가보신 적이 있으시군요. 부럽습니다! 굉장히 넓은 나라라 갈 곳이 많더라구요.
주말에 <공포의 권력>을 읽기는 힘들 것 같았습니다. 완독을 했다기에도 찜찜함이 남지만ㅠㅠ 어쨌든 감사합니다 수하님!^^
 

계미 23

정월에 漢나라 군대가 宛물을 포위하였다. 春陵 戴侯의 曾孫 劉玄이 平林의 군중에 있으면서 이름을 更始將軍이라 하니, 이때 漢나라 군대가 이미10여 만이었다. 劉氏를 세워 사람들의 기대를 따르고자 하였는데, 南陽의호걸들과 王常 등은 모두 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新市와 林의 장수들은 방종한 것을 좋아하여, 의 위엄과 명철함을 두려워하고 劉玄의 나약함을 탐해서 먼저 함께 계책을 정하여 劉玄을 세웠다. 劉玄이 황제에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조회 받을 때에 부끄러워 땀이 흘렀으며 손을 들어올리고 말을 하지 못하니, 이로 말미암아 호걸들이 실망하여 대부분 복종하지 않았다. - ≪後漢書 齊武王傳≫에 나옴-3월에 偏將軍 등이定陵,
순행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王은 물과 尋을 보내서 군대를 징발하여지방을 평정하게 하고, 또여러 맹수인 호랑이. 표범무소 · 코끼리 등속을 몰고 가서 군대의 威武를.
돕게 하고는 이름을 百大軍이라 하여 군대를 풀어 昆陽을 포위하였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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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권8 본기 제8 경종 야율현 편


- 보령 2(970) 가을 7월에 우피실상온 야율현적을 북원추밀사로 삼았다.
-> 야율현적을 경종이 아낀 이유가 속자치통감에 상세히 나옴

- 보령 3(971) 봄 정월 갑인일에 우이리필(형부 관원) 해저가 사람을 보내 적렬(덕열륵부) 포로를 바치자, 조서를 내려 ‘공이 있는 장사들에게 하사하라.‘고 하였다.
-> 속자치통감에는 해저가 아니고 야율희달이라고 나옴

- 보령 3(971) 가을 7월 신축일에 북원추밀사 야율현적을 서북로초토사로 삼았다.
-> 야율현적에 대한 자세한 평가가 속자치통감에 나옴

신해일(10일)에 처사인 산조(酸棗, 河南 延津) 사람 왕소소(王昭素, 904~982)를 국자박사로 삼았는데 치사(致仕, 벼슬을 그만 둠)하였다.

왕소소는 젊어서 돈독하게 공부하였고, 지행(志行)을 갖고 있어서 황제가 그 이름을 듣고 불러서 편전에서 접견하였다. 그때 나이가 이미 70여 세였는데, 황제가 물었다.

"어찌해서 벼슬하지 않는가?"

왕소소는 사과하며 능력이 없다고 하였다. 건괘(乾卦)를 강론하게 하였더니 ‘구오비룡재천(九五飛龍在天)’34에 이르자 얼굴을 가다듬고 말하였다.

"이 효(爻)는 바로 폐하의 오늘날 일에 해당합니다."

증거를 끌어 와서는 이어서 미언대의(微言大義)의 뜻을 넌지시 간언하였다. 황제는 아주 기뻐하며 치세(治世)와 양신(養身)의 술책을 물으니 왕소소가 말하였다.

"치세는 백성을 아끼는 것만한 것이 없으며, 양신은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황제는 그가 말한 것을 아껴서 병풍 사이에 써 두고, 한 달이 넘게 남겨 두었는데, 자주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구하니 그러므로 이러한 명령을 한 것이다. 나이 89세에 집에서 죽었다.

요(遼)에서는 야율현적(耶律賢適, 928~980)을 북원추밀사로 삼았다. 야율현적은 일찍이 요주(遼主, 경종)를 번저(藩邸)에서 모셨었는데, 목종(穆宗, 재위; 951~969)이 포학하자 요주가 한광사(韓匡嗣, 918~983)·니리(尼?, 女里, ? ~978)와 더불어 노닐면서 말하다가 목종을 나무라는 말에 미치자, 야율현적은 일찌감치 의당 멀리하고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목종의 시기(猜忌)를 면할 수 있었는데 야율현적의 힘이었다. 요주가 처음으로 서자 대부분 제왕 가운데 혹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을 싹틔우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하고 몰래 야율현적을 심복으로 삼았으니, 그러한 연고로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황제가 일찍이 유사에게 명령하여 명주(?州, 河北省 永年縣 東南)방어사 곽진(郭進, 922~979)을 위하여 집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무릇 정당(庭堂)에 모두 기와를 사용하였다.

유사가 말하였다.

"오직 친왕·공주만이 비로소 이러한 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화가 나서 말하였다.

"곽진은 서산(西山)에서 요새를 장악하고 10년을 넘게 있으면서 나로 하여금 북쪽을 돌아보는 걱정을 없게 하였는데, 내가 곽진을 보는 것이 어찌 딸보다 적겠는가! 빨리 가서 공역을 감독하고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남당주(南唐主)가 다시 편지를 써서 남한주(南漢主) 유창(劉?, 942~980)에게 중국에 귀순하라고 깨우쳐 주고 급사중 공신의(?愼儀)를 파견하여 사자로 가게 하였다. 유창이 편지를 받고 크게 화를 내고 드디어 공신의를 가두고 역을 통하여 남당주에게 답장을 써서 보냈는데 아주 불손하였다. 남당주는 그 편지를 올려 보내자 황제는 비로소 그를 칠 것을 마음으로 결정하였다.

소사온이 죽자 요주(遼主)는 황후 때문에 도적을 잡는 일을 아주 급히 서둘렀는데, 신축일(3일)에 국구(國舅)인 소합제(蕭哈濟)와 소합리(蕭哈里, 海只)가 소사온을 죽이기로 모의하였다는 상황을 찾아내서 모두 복주(伏誅)하고 그의 동생인 소신도(蕭神覩)를 황룡주(黃龍州, 吉林省 四平市)로 유배 보냈고, 곧 역시 그를 주살하였다.

전흠조는 요(遼)와 만성(滿城, 河北省 保定市에 속함, 河北省 中部 太行山 동쪽 기슭에 위치)에서 싸웠는데 요의 기병이 조금 물러나자 이긴 기세를 타고 수성(遂城, 河北省 保定市 徐水縣)에 이렀다. 전흠조는 흐르는 화살을 맞고 말에서 넘어지자 기사(騎士)인 왕초(王超)가 말을 전흠조에게 주니 군대는 다시 떨쳤다. 아침부터 포시(?時, 오후 4시)까지 죽이고 상처를 입힌 것이 아주 많았으며 밤에는 수성에 들어가서 지켰는데, 요나라 사람들이 그곳을 포위하였다.

며칠이 되자 전흠조는 성 안에 식량이 적은 것을 헤아리고 군사를 정돈하여 남문을 열고 그 한쪽 귀퉁이에서 포위를 뚫고 나갔다. 이날 저녁에 보채(保寨, 보호 받을 수 있는 영채)에 도착하였는데, 군대 안에는 화살 하나도 잃지 않았다. 북방으로 말이 전해지기를 3천 명이 6만을 깨뜨렸다고 하였다.

계해일(25일)에 주문이 도착하니 황제가 기뻐하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거란이 자주 변경에 들어와서 노략질하는데 내가 20필의 비단을 가지고 거란 사람의 머리 하나를 사려고 한다면 그들의 정병은 10만 명에 불과하니 비용은 단지 견(絹) 200만이면 적은 다 없어질 것이다."

이로부터 변방의 대비를 더욱 닦았다.

남한의 도통 이승악(李承渥)이 군사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봉화봉(蓬華峯) 아래에 주둔하면서 코끼리를 훈련시켜서 진을 치도록 하여, 매 코끼리마다 10여 명씩을 실었는데 모두가 병장기(兵仗器)를 잡고 있었고, 싸우게 되면 진(陣)의 앞에 두면서, 큰 것으로 군대의 위엄을 삼았다.

반미가 군사들 가운데 있는 경노(勁弩)를 찾아서 그것을 쏘게 하자 코끼리는 달아나면서 올라 탄 사람을 흔들자 모두 떨어졌고, 도리어 이승악의 군사들을 밟으니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다.

신미일(5일)에 군사가 백전(白田)에 도착하였는데, 남한의 주군이 소복(素服)을 하고 나와서 항복하니 반미는 승제(承制)하여 그를 풀어 주었다. 드디어 광주(廣州)로 들어가서 종실(宗室)·관속 97명을 포로로 잡고, 남한의 주군과 더불어 모두 용덕궁(龍德宮)에 묶어두었다.

유보흥은 처음에는 백성들 사이에 숨었지만 후에 마침내 그를 붙잡았다. 환관 100여 명이 옷을 잘 차려 입고 뵙기를 청하자 반미가 말하였다.

"이렇게 탁인(?人, 환관)이 많은데 나는 조서를 받들어서 죄진 사람을 치려했으니,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명령을 내려서 그들을 모두 목 베었다.

신축일(8일)에 요(遼)에서는 야율현적(耶律賢適, 928~980)을 서북로(西北路)병마도부서로 삼았다. 야율현적은 충성스럽고 굳세며 아름답고 민첩하고, 정성을 미루어 다른 사람을 대우하니 비록 한가한 휴식시간에도 정치를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관청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감히 구차하거나 게으른 일이 없었으며 몇 년 동안 쌓아 온 옥사를 모두 해결하였다.

요(遼)의 세종은 야율찰극(耶律察克, 察割, ? ~951)에게 시해되었는데, 요주(遼主)는 그때에 네 살이어서 어떤 사람이 양탄자로 싸서 쌓아 놓은 장작 밑에 숨겨 두어서 죽음을 면하였다. 뒤에 영흥궁(永興宮)에서 자랐는데, 보부(保傅, 보모와 스승)가 된 사람들이 모두 은덕을 베풀었다. 9월 을사일(13일)에 요주(遼主)가 부부(傅父)·보모(保母) 등에게 호구와 우양(牛羊)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또 잠저(潛邸, 등극 전의 저택)시절의 급사(給使)였던 사람들을 탑마부(塔瑪部)로 삼고 관리를 두어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임자일(20일)에 요주(遼主)가 귀화주(歸化州, 武州, 山西省 ?州市)에 갔다. 갑인일(22일)에 남경(南京, 幽州, 北京)에 갔다. 상경(上京, 內蒙古 巴林左旗 林東鎭南)유수 한광사(韓匡嗣, 918~983)를 남경으로 옮기고 바로 그의 아들 한덕양(韓德讓, 941~1011)을 대신 동경유수로 삼았다.

을사일(2일)에 요(遼)의 북원추밀사인 소사온(蕭思溫, ? ~970)을 위왕(魏王)에 책봉하고 북원대왕 야율오진(耶律烏眞, 屋質, 915~973)에게 유열(裕悅, 于越)을 덧붙여 주었다.

요(遼)에서는 한광사(韓匡嗣, 918~983)를 상경(上京, 內蒙古 赤峰市 巴林左旗 林東鎭)유수로 삼았는데, 번저(藩邸)에 있을 때의 옛 은혜를 이용한 것이다. 얼마 안 되어 연왕(燕王)에 책봉하였다. 한광사는 그 아들 한덕양(韓德讓, 耶律隆運, 941~1011)으로 하여

금 입시하게 하였는데 요주(遼主)는 삼가며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을 덧붙여 주어 추밀원통사(樞密院通事)에 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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