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 권8 본기 제8 경종 야율현 편


- 보령 2(970) 가을 7월에 우피실상온 야율현적을 북원추밀사로 삼았다.
-> 야율현적을 경종이 아낀 이유가 속자치통감에 상세히 나옴

- 보령 3(971) 봄 정월 갑인일에 우이리필(형부 관원) 해저가 사람을 보내 적렬(덕열륵부) 포로를 바치자, 조서를 내려 ‘공이 있는 장사들에게 하사하라.‘고 하였다.
-> 속자치통감에는 해저가 아니고 야율희달이라고 나옴

- 보령 3(971) 가을 7월 신축일에 북원추밀사 야율현적을 서북로초토사로 삼았다.
-> 야율현적에 대한 자세한 평가가 속자치통감에 나옴

신해일(10일)에 처사인 산조(酸棗, 河南 延津) 사람 왕소소(王昭素, 904~982)를 국자박사로 삼았는데 치사(致仕, 벼슬을 그만 둠)하였다.

왕소소는 젊어서 돈독하게 공부하였고, 지행(志行)을 갖고 있어서 황제가 그 이름을 듣고 불러서 편전에서 접견하였다. 그때 나이가 이미 70여 세였는데, 황제가 물었다.

"어찌해서 벼슬하지 않는가?"

왕소소는 사과하며 능력이 없다고 하였다. 건괘(乾卦)를 강론하게 하였더니 ‘구오비룡재천(九五飛龍在天)’34에 이르자 얼굴을 가다듬고 말하였다.

"이 효(爻)는 바로 폐하의 오늘날 일에 해당합니다."

증거를 끌어 와서는 이어서 미언대의(微言大義)의 뜻을 넌지시 간언하였다. 황제는 아주 기뻐하며 치세(治世)와 양신(養身)의 술책을 물으니 왕소소가 말하였다.

"치세는 백성을 아끼는 것만한 것이 없으며, 양신은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황제는 그가 말한 것을 아껴서 병풍 사이에 써 두고, 한 달이 넘게 남겨 두었는데, 자주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구하니 그러므로 이러한 명령을 한 것이다. 나이 89세에 집에서 죽었다.

요(遼)에서는 야율현적(耶律賢適, 928~980)을 북원추밀사로 삼았다. 야율현적은 일찍이 요주(遼主, 경종)를 번저(藩邸)에서 모셨었는데, 목종(穆宗, 재위; 951~969)이 포학하자 요주가 한광사(韓匡嗣, 918~983)·니리(尼?, 女里, ? ~978)와 더불어 노닐면서 말하다가 목종을 나무라는 말에 미치자, 야율현적은 일찌감치 의당 멀리하고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목종의 시기(猜忌)를 면할 수 있었는데 야율현적의 힘이었다. 요주가 처음으로 서자 대부분 제왕 가운데 혹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을 싹틔우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하고 몰래 야율현적을 심복으로 삼았으니, 그러한 연고로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황제가 일찍이 유사에게 명령하여 명주(?州, 河北省 永年縣 東南)방어사 곽진(郭進, 922~979)을 위하여 집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무릇 정당(庭堂)에 모두 기와를 사용하였다.

유사가 말하였다.

"오직 친왕·공주만이 비로소 이러한 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화가 나서 말하였다.

"곽진은 서산(西山)에서 요새를 장악하고 10년을 넘게 있으면서 나로 하여금 북쪽을 돌아보는 걱정을 없게 하였는데, 내가 곽진을 보는 것이 어찌 딸보다 적겠는가! 빨리 가서 공역을 감독하고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남당주(南唐主)가 다시 편지를 써서 남한주(南漢主) 유창(劉?, 942~980)에게 중국에 귀순하라고 깨우쳐 주고 급사중 공신의(?愼儀)를 파견하여 사자로 가게 하였다. 유창이 편지를 받고 크게 화를 내고 드디어 공신의를 가두고 역을 통하여 남당주에게 답장을 써서 보냈는데 아주 불손하였다. 남당주는 그 편지를 올려 보내자 황제는 비로소 그를 칠 것을 마음으로 결정하였다.

소사온이 죽자 요주(遼主)는 황후 때문에 도적을 잡는 일을 아주 급히 서둘렀는데, 신축일(3일)에 국구(國舅)인 소합제(蕭哈濟)와 소합리(蕭哈里, 海只)가 소사온을 죽이기로 모의하였다는 상황을 찾아내서 모두 복주(伏誅)하고 그의 동생인 소신도(蕭神覩)를 황룡주(黃龍州, 吉林省 四平市)로 유배 보냈고, 곧 역시 그를 주살하였다.

전흠조는 요(遼)와 만성(滿城, 河北省 保定市에 속함, 河北省 中部 太行山 동쪽 기슭에 위치)에서 싸웠는데 요의 기병이 조금 물러나자 이긴 기세를 타고 수성(遂城, 河北省 保定市 徐水縣)에 이렀다. 전흠조는 흐르는 화살을 맞고 말에서 넘어지자 기사(騎士)인 왕초(王超)가 말을 전흠조에게 주니 군대는 다시 떨쳤다. 아침부터 포시(?時, 오후 4시)까지 죽이고 상처를 입힌 것이 아주 많았으며 밤에는 수성에 들어가서 지켰는데, 요나라 사람들이 그곳을 포위하였다.

며칠이 되자 전흠조는 성 안에 식량이 적은 것을 헤아리고 군사를 정돈하여 남문을 열고 그 한쪽 귀퉁이에서 포위를 뚫고 나갔다. 이날 저녁에 보채(保寨, 보호 받을 수 있는 영채)에 도착하였는데, 군대 안에는 화살 하나도 잃지 않았다. 북방으로 말이 전해지기를 3천 명이 6만을 깨뜨렸다고 하였다.

계해일(25일)에 주문이 도착하니 황제가 기뻐하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거란이 자주 변경에 들어와서 노략질하는데 내가 20필의 비단을 가지고 거란 사람의 머리 하나를 사려고 한다면 그들의 정병은 10만 명에 불과하니 비용은 단지 견(絹) 200만이면 적은 다 없어질 것이다."

이로부터 변방의 대비를 더욱 닦았다.

남한의 도통 이승악(李承渥)이 군사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봉화봉(蓬華峯) 아래에 주둔하면서 코끼리를 훈련시켜서 진을 치도록 하여, 매 코끼리마다 10여 명씩을 실었는데 모두가 병장기(兵仗器)를 잡고 있었고, 싸우게 되면 진(陣)의 앞에 두면서, 큰 것으로 군대의 위엄을 삼았다.

반미가 군사들 가운데 있는 경노(勁弩)를 찾아서 그것을 쏘게 하자 코끼리는 달아나면서 올라 탄 사람을 흔들자 모두 떨어졌고, 도리어 이승악의 군사들을 밟으니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다.

신미일(5일)에 군사가 백전(白田)에 도착하였는데, 남한의 주군이 소복(素服)을 하고 나와서 항복하니 반미는 승제(承制)하여 그를 풀어 주었다. 드디어 광주(廣州)로 들어가서 종실(宗室)·관속 97명을 포로로 잡고, 남한의 주군과 더불어 모두 용덕궁(龍德宮)에 묶어두었다.

유보흥은 처음에는 백성들 사이에 숨었지만 후에 마침내 그를 붙잡았다. 환관 100여 명이 옷을 잘 차려 입고 뵙기를 청하자 반미가 말하였다.

"이렇게 탁인(?人, 환관)이 많은데 나는 조서를 받들어서 죄진 사람을 치려했으니,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명령을 내려서 그들을 모두 목 베었다.

신축일(8일)에 요(遼)에서는 야율현적(耶律賢適, 928~980)을 서북로(西北路)병마도부서로 삼았다. 야율현적은 충성스럽고 굳세며 아름답고 민첩하고, 정성을 미루어 다른 사람을 대우하니 비록 한가한 휴식시간에도 정치를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관청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감히 구차하거나 게으른 일이 없었으며 몇 년 동안 쌓아 온 옥사를 모두 해결하였다.

요(遼)의 세종은 야율찰극(耶律察克, 察割, ? ~951)에게 시해되었는데, 요주(遼主)는 그때에 네 살이어서 어떤 사람이 양탄자로 싸서 쌓아 놓은 장작 밑에 숨겨 두어서 죽음을 면하였다. 뒤에 영흥궁(永興宮)에서 자랐는데, 보부(保傅, 보모와 스승)가 된 사람들이 모두 은덕을 베풀었다. 9월 을사일(13일)에 요주(遼主)가 부부(傅父)·보모(保母) 등에게 호구와 우양(牛羊)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또 잠저(潛邸, 등극 전의 저택)시절의 급사(給使)였던 사람들을 탑마부(塔瑪部)로 삼고 관리를 두어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임자일(20일)에 요주(遼主)가 귀화주(歸化州, 武州, 山西省 ?州市)에 갔다. 갑인일(22일)에 남경(南京, 幽州, 北京)에 갔다. 상경(上京, 內蒙古 巴林左旗 林東鎭南)유수 한광사(韓匡嗣, 918~983)를 남경으로 옮기고 바로 그의 아들 한덕양(韓德讓, 941~1011)을 대신 동경유수로 삼았다.

을사일(2일)에 요(遼)의 북원추밀사인 소사온(蕭思溫, ? ~970)을 위왕(魏王)에 책봉하고 북원대왕 야율오진(耶律烏眞, 屋質, 915~973)에게 유열(裕悅, 于越)을 덧붙여 주었다.

요(遼)에서는 한광사(韓匡嗣, 918~983)를 상경(上京, 內蒙古 赤峰市 巴林左旗 林東鎭)유수로 삼았는데, 번저(藩邸)에 있을 때의 옛 은혜를 이용한 것이다. 얼마 안 되어 연왕(燕王)에 책봉하였다. 한광사는 그 아들 한덕양(韓德讓, 耶律隆運, 941~1011)으로 하여

금 입시하게 하였는데 요주(遼主)는 삼가며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을 덧붙여 주어 추밀원통사(樞密院通事)에 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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