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개념이 더 난해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옆에 원문 단어를 같이 표시해주는 게 훨 나은 것 같다.
원문이 훨씬 더 개념을 명징하게 이해해주는 데 도움이 된다.

해방은 억압 및 억압의 가능성에 대한 의식, 즉 상상적 이해의 구축에 달려 있다. 사이보그는 허구이면서도 삶 속 경험의 문제로, 20세기 후반에 ‘여성 경험’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의 기준을 바꾼다. 이 문제는 삶과 죽음을 좌우하는 투쟁의 문제로, SFscience fiction와 사회 현실을 갈라놓는 경계는 착시일 뿐이다.

이 글은 경계가 뒤섞일 때의 기쁨, 그리고 경계를 구성할 때의 책임을 논한다. 이 글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이론과 문화에 기여하려는 노력의 한 갈래이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비자연주의의 방식으로, 어쩌면 태초도 종말도 없을, 젠더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유토피아적 전통을 따른다.

사이보그는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의 소망과 달리, 아버지가 에덴을 복원해, 즉 이성애적 짝을 제작하고 도시와 조화로운 세계cosmos라는 총체를 제공해 자신을 완성해줌으로써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이번에는 오이디푸스적 기획 없이, 유기체적 가족 모델을 따라 설계된 공동체를 꿈꾸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추상적 개체화로 지배력을 확장한다는 "서구의" 끔찍한 종말론적 목표telos, 마침내 모든 의존에서 벗어난 궁극적 자아, 다시 말해 우주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인본주의적 의미의 기원 설화는 본원적 일체original unity, 충만함, 은총과 공포의 신화에 의존하며, 이는 남근적 어머니로 표상된다. 인간이면 누구나 이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데, 개인의 발달과 역사의 발전이라는 이 과제, 강력한 쌍둥이 신화는 특히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우리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사이보그는 포스트젠더postgender 세계의 피조물이다. 사이보그는 양성성bisexuality, 오이디푸스 이전의 공생symbiosis, 소외되지 않은 노동을 비롯하여 부분들을 상위에서 통합해 그 전체의 권력을 최종적으로 전유하여 얻어지는 유기적 총체성을 향한 유혹과 거래하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어떤 면에서 서구적 의미의 기원 설화가 없다. 이것이 사이보그 "최후"의 아이러니다.

사이보그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신화로 출현한다. 사이보그는 인간의 둘레에 장벽을 쳐서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서로 격리하는 것을 나타내기는커녕, 거북하고 짜릿할 만큼 단단한 결합을 암시한다. 수간bestiality은 현재의 혼인 교환 주기에서 새로운 지위를 지닌다.

20세기 후반의 기계들은 자연과 인공, 정신과 육체, 자생적 발달과 외부로부터의 설계를 비롯해 유기체와 기계 사이에 적용되던 수많은 차이를 철저히 섞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만든 기계들은 불편할 만큼 생생한데, 정작 우리는 섬뜩할 만큼 생기가 없다.

문명의 기원에 관한 서구의 설화에서 글쓰기, 권력, 기술은 오랜 공범자다. 그 메커니즘의 경험을 바꾼 것은 소형화다. 소형화는 결국 권력의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이보그는 에테르ether이며 정수精髓quintessence다.

단일한 시각은 이중적인 시각이나 머리가 여럿 달린 괴물의 시각보다 나쁜 환상을 만들어낸다. 사이보그 연합체는 기괴하고 위법적이다.

"여성female"됨에는 여성을 자연스레 묶는 것이 없다. 심지어 여성"됨being"과 같은 상태가 없으며, 그 자체가 성과 관련된 과학 담론 및 사회적 관습을 통해 구성된 매우 복합적인 범주다. 젠더·인종·계급 의식은 가부장제·식민주의·자본주의라는 모순적인 사회 현실을 경험해온 우리의 비참한 역사가 강제로 떠안겨준 성과다.

지배를 통한 통일 또는 통합을 통한 통일에 대항하는 이론적·실천적 투쟁은 가부장제·식민주의·인본주의·실증주의·본질주의·과학주의를 비롯해 사라져도 별로 아쉬울 것 없는 다른 여러 주의들의 근거만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유기체적 또는 자연적 관점을 옹호하는 모든 주장의 근거 또한 무너뜨린다.

사이보그 페미니스트라면 "우리"는 자연적 통일성의 기반을 더 이상 원치 않으며 총체적 구성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 순수성 및 그와 결부된 피해자됨victimhood을 유일한 통찰 근거로 삼는 바람에 생겨난 피해는 이미 겪을 만큼 겪었다. 하지만 새로 구성된 혁명 주체는 20세기 후반을 살아가는 인민에게 진지하게 생각해볼 여유를 주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본질화하는 것은 노동의 존재론적 구조, 혹은 그 유비물인 여성의 활동이다. 내가 볼 때 이 입장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마르크스적 인본주의를 계승하면 지나치게 서구적인 자아를 함께 물려받게 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경우, 단일한 여성이라는 실체와 같은 것이 있다는 식으로 자연화한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위와 같은 공식화를 통해 여성들의 통일성을 만들고자 현실의 여성들이 일상에서 감당하는 의무를 강조했다는 점에 있다.

백인 래디컬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는 인종 문제에 관해 당혹스러울 정도로 침묵을 지킴으로써 무겁고 파국적인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계보를 세우려는 정치적 분류법 속으로, 역사와 다음성polyvocality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여성이라는 범주, 그리고 단일하거나 총체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전체로서의 여성이라는 사회 집단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폭로하겠다고 주장하는 이들 이론에, 인종(및 또 다른 많은 것들)을 위한 구조적 자리는 없었다

이제, 특정한 성과 성 역할 개념이 유기체나 가족 같은 자연적 대상의 유기체적 속성이라는 유성 생식 이데올로기는 설득력을 잃는다.

원시나 문명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우리는 통제 전략이 자연 대상의 온전성integrity이 아닌 경계 조건과 인터페이스, 경계를 넘나드는 흐름의 비율에 집중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서구 자아의 "온전성"이나 "진정성"은 의사결정 과정과 전문가 체계에 자리를 내주었다

대상, 공간, 신체는 그 자체로 신성하지 않다. 공통 언어common language를 매개로 신호를 처리할 수 있는 적절한 기준과 코드만 있다면, 모든 구성 요소가 인터페이스를 매개로 접합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계의 교환은 마르크스가 그토록 잘 분석한 현상, 즉 자본주의 시장이 모든 것을 화폐로 교환할 수 있게 만들면서 도입한 보편적 번역의 한계마저 초월한다. 이 우주의 모든 구성 요소에 영향을 주는 특권적 병은 스트레스, 즉 소통의 실패다 (호그니스Hogness 1983).

사이보그는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는, 포스트모던 집합체의 일종인 동시에 개인적 자아이다. 이것이 바로 페미니스트가 코드화해야 하는 자아이다.

정신과 육체, 동물과 인간, 유기체와 기계, 공과 사, 자연과 문화, 남성과 여성, 원시와 문명 등에서의 이분법은 하나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의심스럽다. 여성들이 실제로 처한 상황은 지배의 정보과학이라는 생산/재생산과 커뮤니케이션의 세계 체제 속으로 통합/착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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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과 새마을 - 동아시아 냉전의 연쇄와 분단국가체제
허은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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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냉전 시기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곳은 어디일까.
전 세계가 그 영향을 받았겠지만 특히 동아시아 지역은 여러 정부를 거치며 오래 지속되었다고 본다.
특히 한반도는 동족 간의 전쟁 이후 냉전의 고리 속에 철저히 얽혀 분단체제를 이어갔고 이념 전쟁은 민족 간에 뿌리 깊은 증오와 불신을 남겼다.
정부는 냉전을 안보 전쟁으로 철저히 이용했는데 이는 현 정치와도 무관하지 않기에 탄식하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식민지배와 분단, 이어진 전쟁에서 정부의 정치적 방향을 바탕에 따른 민중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는 1930년대 만주국 터전에서부터 1970년대 한국의 농촌까지, 말라야 신촌에서 남베트남 신생활촌, 한국의 새마을까지 이어지는 연쇄적 역사를 담고 있다.

박정희 정부가 세운 1972년 분단국가체제는 동아시아 냉전의 근대화 원리를 구현한 체제였다.
그렇다면 '1972년 분단국가체제'의 특성은 어떠한 것인가.

첫째, 만주국 반만항일세력은 전후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을 진압하고 베트남 전쟁 평정에 참여한 세력이었다.
1930년대 일제는 만주국을 제국팽창의 최전선이자 방공의 최전선으로 만들기 위한 곳으로 집단부락을 대대적으로 건설했다. 집단부락은 '비민분리'를 통한 인구 통제, 중층 감시체계를 통한 자위대 운영, 집단 부락을 안정시키기 위한 농촌부흥 모색까지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원형을 담고 있는 공간이었다.
일제 시기 친일부역자들이 그랬듯이 만주국군은 전후 방공전사로 거듭나며 친일행위를 지우고 만주국에서의 집단부락 건설의 경험을 제주도에 그대로 이식시켰다.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이던 지리산 공산유격대 토벌군들은 만주에서의 대유격전 원리를 원용하여 군사 전략과 대민정책에 적극 활용하였다.
대표적 냉전 전사였던 박정희, 박창암, 박임항 등은 5·16 쿠데타 사건으로 집결하였고, 이들은 남베트남에 군사사절단을 파견하여 한국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가교를 만들었다.

둘째, 5·16 쿠데타로 동아시아 냉전의 연쇄에 능동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군정 세력이 집권하면서 한국사회는 진영대립 구도에 갇히게 되었고 남북문제와 근대화 노선을 모색할 가능성도 차단되었다. 거기에 군사력을 이용한 민주적 통제 기회 마저 사라졌다.
한국은 베트남전에 개입하면서 한국군 관할지역에 신생활촌을 건설하고 자매결연 관계를 수립하는 등 이전의 공작 경험을 그대로 이곳에 이식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남베트남 정부는 자위 자치 자체개발과 협동정신을 강조하고, 농촌 재편정책을 도시로 확대하는 방침을 추진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새마을 운동을 통해 실체를 구현하였다.
여기에 미국의 역할을 빼놓을 수가 없다. 동아시아 냉전의 흐름에 대처하기 위해 케네디 정부는 한국에 적극적인 '대민활동' 지원을 통해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전투병을 파견하기 전 준비과정으로 삼았다.

셋째, 박정희와 친위세력이 국내외 변화를 인민전쟁 위협론으로 몰아부치며 영구집권을 추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냉전질서는 다극화 경향을 보였고 미국이 중국에 대한 정책을 변화시키면서 한국 정부는 안보에 우려와 불신을 보였다. 정부는 1967년 9월 국가안전보장회의 이후 기존 안보 관련법을 검토한 뒤, 1968년 1·21 사태를 계기로 비상대권의 확보와 지도자 영도론을 부상시켰다.
그들은 1969년 개헌반대에 직면하여 이를 뒤로 미루었으나 1971년 특별조치법 제정과 1972년 유신헌법 선포를 거치며 이를 완결시켰다.
당시 여론은 안보를 문제로 민주주의 체제를 약화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공화당 내에서도 새 안보 프레임에 반대하는 견해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71년 중국의 유엔 가입, 미국의 대중국 데탕트 정책 전환, 남북대화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응을 박정희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로 바라보았다.

넷째, 비인간화 정책을 지속하는 체제, 전근대적 지배원리를 변용한 지배체제였다.
당대 지식인들은 공업화에 치중한 경제성장 제일주의 노선의 폐해를 지적하며 제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주장하였으나, 정부는 국민의 정신개조 측면을 강조하며 '국가안보제일주의', '경제성장제일주의' 양 노선을 추진하는 방안으로 내세웠다.
민주화 운동 세력은 전태일의 분신, 광주대단지 사건을 통해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근대화 노선을 비판하며,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의 확립을 통한 안보를 주장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와 군은 북의 위협의 불변함을 강조하며 전 국민이 이에 대비하는 주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냉전의 새마을'을 건설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대공새마을'로 불린 지배체제를 수립했다.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로 마을 이장, 새마을지도자, 농협 이·동 총대를 배치하고, 이장과 반장에게는 민방위 책임을 맡겨 안보와 개발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겼다.
이 지배체제는 중층적 감시체제 속에 '내부 적'으로 분류된 이들은 죽어서도 감시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이념 문제가 아닌 정신질환 등의 사람들을 순응하지 못하는 인물로 바라보며 잠재적인 내부의 적으로 분류하였다.
과거의 연좌제를 답습하여 그야말로 변용시켰다고 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 세대는 아니지만 어릴 적 새마을운동가를 나도 모르게 따라불렀던 기억이 난다.
국민학교 때 반공포스터를 그리면서 한반도가 나뉘어 있고 북한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중 고등학교 때는 교련 수업을 받았다. 받으면서도 '대체 이걸 왜 하는거지?'라는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그냥 잡혀 있는 수업이니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아이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교육이 아닐 수 없다.
마치 국민을 반공전사로 키워내듯 교육시키는 시대였다고 생각된다.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내세웠던 박정희 정부는 역설적으로 국민을 불신하고 주체가 아닌 동원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으며 개인의 인권과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 체제였다.
이 체제는 박정희 사후에도 신군부 세력에 그대로 이관되었고, 광주항쟁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신군부는 민주항쟁을 '반란' '소요'로 규정하고 왜곡하며, 자신들의 국가반란 행위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6월 항쟁은 국민을 불신하고 적으로 두는 정부를 향해 칼을 겨눈 이들의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는 현재의 역사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만주국 체제가 박정희 분단체제에 이식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언급된 추가 자료들 중 읽을 책들을 몇 권 꼽아놓았다. 시간이 된다면 읽어봐야겠다. 



올해로 1972년 유신체제 등장 50주년이 되었다. 이 뿌리 깊은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것은 언제쯤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북한과의 관계는 다시 틀어지게 되었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전 세계에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이럴 때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와의 외교는 더욱 중요할 것이다.

다만 이제 곧 새 정부가 들어설텐데 안보의 위기를 불안감으로 조장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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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5-07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새마을세대
저 시골 살아서 국민학교때는 아침마다 저 노래소리 들리면 동네 공터에 가요. 그러면 거기 동네 애들이 다 모이고 그럼 6학년 오빠가 든 깃발 아래 모두 줄서서 학교 갔어요. 아 진짜.... ㅠㅠ 고등학교 교련수업에 이걸 왜하지라는 의문조차 못품었던... ㅠㅠ 근데 초반에 만주국 출신들을 반만항일세력이라고 얘기하는건 어떤 의미에거 항일이라고 하는건지 좀 궁금하네요. 제가 알기로 이지역 광복군은 이름만 광복군이지 일제 패망 이후 박정희같은 만주군출신 한국인들이 재빨리 광복군으로 갈아탄것으로 알고있거든요. 그래서 실제 항일과는 관련이없을뿐 아니라 오히려 광복군의 이름을 도둑질한거나 다름없다고 알고 있는데말이죠.
 

방공전사에서 냉전전사로, 이식과 학습


<Ref>
국공 내전 상황 속에서 만주지역 한인의 귀환과 정착 상황 -> 귀환과 전쟁, 그리고 근대 동아시아인의 삶
만주국: 식민지적 상상이 잉태한 복합민족국가(윤휘탁)

- 간도특설대 대표인물
홍순봉, 신현준, 백선엽, 박정희, 이주일
김백일, 김석법, 임충식
김동하, 이동화, 송석하, 이용, 박춘식

1945년 8월 소련의 개전과 만주국의 급격한 붕괴 그리고 뒤이은 국공내전 등 만주 지역에서 급변한 상황은 민족갈등을 억눌렀던 ‘오족협화‘라는외피와 물리적 강제력을 일시에 제거해버렸다. 여기에 친일파 청산과 이념적 대립이 맞물리며 만주 지역은 혼돈 상태로 빠져들었다. - P83

중국 공산화 이후 국내 언론은 공산화의 위협을 소련이 공산화를 담당한 한국 및 일본의 ‘동북루트’와 중국이 공산화를 담당한 동남아 일대의 ‘남부루트’로 크게 나누어 설명했다. - P93

당시 제주도에서 무장대의 전술은 중공군의 유격전법이라는 주장이 분명한 근거 없이 언론에 의해 유포되었는데 정일권과 예관수 역시 이러한 주장을 폈다. 제주도 무장대가 팔로군 출신자로부터 훈련을 받았다는 주장은 이후 육군이 정리한 ‘공비토벌사‘나 백선엽과 같은 개인에 의해 반복되었다. - P95

비민분리공작이 벌어지는 지역의 주민이 직면한 현실은 엄호하기 그지없었다. 여순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나며 유격전이 자리를 잡는 경향을보이자, 이승만 정부는 유격전이 벌어지는 곳에서 지역주민의 전면적인 소개와 집단부락 건설이라는 대책을 세웠다. 1949년 오대산, 태백산 지역으로 남파된 ‘인민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해 발족한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는 산간마을을 소각하고 50호 단위의 집단부락을 도로변에 건설하여 지역주민과 유격대와의 접촉을 근절시키고자 했다. 전투사령부는 집단부락 건설이 진전되지 않자 단기간에 건설을 완료하도록 강요하며 위반자를 ‘공비로 간주하는 정책을 취했다. 마을을 초토화하고 강압적으로 집단부락을건설하는 정책은 지역 민심을 들끓게 만들었고 지역 국회의원들의 요구로 국회 조사단이 현지 조사를 벌여야만 할 정도였다. - P105

1948년 제주4·3사건 및 여순사건 이후 남한 각지에서 유격전 전개, 38도 도선 군사 충돌, 미군 철수 논의 등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1948년 11월 린뱌오(林)가 이끄는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이 만주 지역을 장악하며 전세의주도권을 쥐는 양상으로 내전이 전개되자, 군과 민간에서 국방국가체제 수립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 P114

‘국제적 위기‘를 국방국가 건설과 직결시키고 국민 사생활의 지배를 국방국가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요시토미 시게오의 논의는 중국의 공산화를 위시한 공산진영의 확장을 위기의 주요인으로 강조하며 국민생활의 말단까지 침투하는 ‘국민조직‘을 국방국가체제의 근간으로 삼아야한다는 이소의 설명 구도와 차이가 없다.
일제의 국방국가론의 핵심적인 내용은 국방국가체제의 완비를 위한 강력한 정치의 실현이었다. - P120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진영대립 구도의 고착화는 사상적인 측면에서일제의 국방국가론이 부활하는 양상을 낳았고, 조직적인 측면에서는 만주국 전시 국민동원체제가 부활하는 양상을 낳았다. 만주국이 보갑제를 전시동원체제의 주요한 기제로 삼았던 것처럼 이승만 정부도 보갑제를 행정 말단 조직인 국민반, 경찰보조 조직인 민보단, 그리고 자위조직인 자위대의운영과 결합했다. 만주국에 걸쳐 있던 방공전선이 남한으로 이동하자 보갑제가 남한 사회를 망령처럼 배회하기 시작했다. - P121

1951년 4월 국회에서 국민방위군 해체 법안이 통과되자, 이승만은 국민방위군 해체를 지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이승만의 수족과도 같은 한청이 준군사적인 역할에서 배제됨을 의미했다. 전쟁을 거치며 우익 청년단이 지역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는 굳이 향토방위 조직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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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시집을 읽는다.

시라는 것을 잘 모르고 읽어도 그림이 잘 안 그려질 때가 많지만

때로 그려지는 문장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그 중 먼저 바람 세트를 꺼내들었다.

조금 더 있으면 바람이 불지 않는 쨍쨍한 날만 지속되는 여름이 될 테니까.

여전히 바람이 부는 지금의 날씨에 어울릴거라는 생각을 하며.


첫 시작은 윤동주다.

정지용 시인이 쓴 발문을 읽을 때부터 나도 모르게 비장함을 가지게 된다.

시인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시대를 생각하게 된다.

시대를 통과하는 시인이라는 건 어떠해야 하는가.

시라는 것이 아름답기만 하면 되는건가.

1941년 9월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조선임전보국단이 만들어진 후 많은 문학인들이 여기에 가담했고 변절의 길을 걸었다.

그들을 온전히 탓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두둔하기도 어렵다.

문학은 문학으로서의 기능만 하면 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문학의 기능은 무엇인지 고민해보게 한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9.31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고 있다.


아직 초반이지만

인물의 섬세함을 잘 살린다고 해야 할까.

좋은 느낌이다.


올리브의 강인함은 결코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

사회화되기 이전 나는 규약에 따라 철저히 움직이는 수동적인 인간이었다.

그저 시키는 것을 따라하는 로봇 같은 삶이였다고 할까.

읽고 있자니 일단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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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5-04 17: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윤동주 시는 읽을때마다 뭉클해집니다.ㅠㅠ 올리브 볼수록 마음이 끌리는 인물이지요 ~

거리의화가 2022-05-04 17:29   좋아요 1 | URL
윤동주 시인의 시는 유독 비장한 마음으로 읽게 되요. 마지막을 알고 있어서 그의 시를 온전히 그 자체로 보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하구요ㅠㅠ
올리브 아직 초반이라...ㅎㅎ 참 매력적인 여성이에요. 강단있고 당차고. 그가 노년이 되기까지 얼마나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어려웠을지 초반만 봐도 알겠더라구요ㅜㅜ

바람돌이 2022-05-05 0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윤동주 시인의 시는 전 늘 좀 애틋한 마음으로 읽었는데요. 그게 우리 딸이 중1때 윤동주의 자화상을 읽고 이 사람은 왜 자기 얼굴을 밉다고 할까? 하면서 너무 진지하게 시인이 못생겼나보다라고 했던게 자동으로 떠올려져서 약간 코믹하게 되어버렸달까요? ㅎㅎ
올리버 키트리지는 보면 볼수록 메력적인 할머니입니다. 저는 저도 이렇게 좀 멋지새 늙을 수 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어요. 단 자식과의 관계만 빼고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2-05-06 18:08   좋아요 1 | URL
ㅎㅎㅎ 따님 귀엽네요^^; 그럴수있죠. 왜 자기 얼굴이 미울까 생각해보는 것~ 저는 윤동주 시집을 여러 차례 읽었는데 영화 동주 보면서 또 느낌이 더 좋게 된 케이스예요. 시가 영상화가 되니까 더 좋더라구요~
올리버 키트리지 아직 초반만 읽어서 어떻게 전개될 지는 알수 없지만 첫 느낌은 좋았어요.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저도 잘 늙어가고 싶습니다. 어떻게 늙는게 잘 늙는 것일지 고민해보게 됩니다~^^;

책읽는나무 2022-05-05 1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
화가님의 완독하실 감상이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거리의화가 2022-05-06 18:09   좋아요 1 | URL
네 올리브 다 읽고 나서 감상 후기 올리도록 할게요. 어떤 느낌일지 설레기도 하고 기대도 됩니다^^

scott 2022-05-06 15: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벽에 오래 도록 새겨 두고 싶은 구절 입니다.

<올리브 키터리지> 영상도 추천 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2-05-06 18:12   좋아요 2 | URL
와. 스콧님~ 저도 저 구절이 젤 좋더라구요. 윤동주 시인 시집의 대부분의 시들이 제 마음을 울립니다만 그 중 마지막에 읽었던 시를 올려봤어요~^^;
올리브 키터리지 영상 말씀하셔서 찾아봤는데 2014년이군요^^ 오~ 책 읽고 영상도 함 보도록 하겠습니다. 추천 감사드려요.
 

‘냉전의 새마을’ 원형이었던 만주국 농촌 사회


송석하, 신현준(=신봉균): 간도특설부대원 (친일인명사전)
-> 두 인물의 사례를 통해 만주국 국민운동과 간도특설대가 깊게 연계되어 있음을 들여다볼 수 있음

공비토벌=조선인 보호=민족주의 로 정당화
보갑연좌제 -> 감시체제의 조직 형태

일제의 만주지역 이주정책은 ‘식민지주의 이해‘와 ‘이념적 이해가 중첩된 만주국의 공간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일제의 만주 지역 식민화 정책은 대소(對蘇) 군사안보 방침과 긴밀하게 맞물리며 진행되었다. 만주국 수립 직후부터 관동군은 일본인의 이주를 항일무장투쟁 세력의 발흥 속에서 농촌의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자, 대소 국방의 방책으로 여겼다. - P47

젠다오(間島) 지역에서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대상으로 세운 ‘집단부락(集團部落)‘은 만주국 ‘비민분리공작‘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었다. 만주사변 직후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피난민의관리와 치안유지를 위해 ‘안전농촌(安全農村)‘과 집단부락을 건설했다. 1932~33년 건설된 안전농촌과 집단부락은 조선인 피난민을 관리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1934년 이후부터 건설된 집단부락은 비민분리를 통해 항일유격대를 고립시키는 데 주된 목적을 두었다. - P51

일제는 젠다오 지역의 치외법권 철폐에 대비하려는 예비 조치로 공산조직 및 반만항일단체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집단부락건설과 보갑제도 시행 이외에도 특무경찰이 관리하는 ‘특고망(特高網)이라는 사찰망을 운용했다. 젠다오성 특무경찰은 밀정뿐만 아니라 귀순자, 지역의 유력자, 청년들을 사찰망을 위해 활용했다. 특고망을 통해 요시찰 · 요주의 대상자에서부터 각종 결사(結社), 학교, 강습회, 연구회까지 잠재적인위협 요인으로 분류되어 사찰을 받았으니, 사실상 모든 조선인이 이중 삼중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P61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 대다수는 열악한 생활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범촌으로 분류된 조선인 집단부락조차도 자작농보다 자소작 또는 소작농이 대다수였기에 이주민에게 집단부락 건설비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빚이 빚을 부르는 악순환 속에서 소작농에서 출발한 조선인들이 자작농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열악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인 집단부락은 안보불안 요소로 여겨져 해체와 강제이주의 대상이 되었다. - P71

일제는 만주국을 방공 최전선의 국방국가로 만들기 위한 국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관동군은 반만항일투쟁을 주도하는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는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국민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개편하는 사회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공산주의사상과 반만항일사상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방책을 강구하던 군사고문부는 장제스 정부가 농촌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사상적 방공강화’를 위한 수단이자 전시 대중동원의 수단으로 삼은 신생활운동을 크게 주목했다. - P77

다양한 운동을 통해 만주국인에게 주입된 이념은 ‘일본주의’였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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