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개념이 더 난해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옆에 원문 단어를 같이 표시해주는 게 훨 나은 것 같다.
원문이 훨씬 더 개념을 명징하게 이해해주는 데 도움이 된다.

해방은 억압 및 억압의 가능성에 대한 의식, 즉 상상적 이해의 구축에 달려 있다. 사이보그는 허구이면서도 삶 속 경험의 문제로, 20세기 후반에 ‘여성 경험’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의 기준을 바꾼다. 이 문제는 삶과 죽음을 좌우하는 투쟁의 문제로, SFscience fiction와 사회 현실을 갈라놓는 경계는 착시일 뿐이다.

이 글은 경계가 뒤섞일 때의 기쁨, 그리고 경계를 구성할 때의 책임을 논한다. 이 글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이론과 문화에 기여하려는 노력의 한 갈래이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비자연주의의 방식으로, 어쩌면 태초도 종말도 없을, 젠더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유토피아적 전통을 따른다.

사이보그는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의 소망과 달리, 아버지가 에덴을 복원해, 즉 이성애적 짝을 제작하고 도시와 조화로운 세계cosmos라는 총체를 제공해 자신을 완성해줌으로써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이번에는 오이디푸스적 기획 없이, 유기체적 가족 모델을 따라 설계된 공동체를 꿈꾸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추상적 개체화로 지배력을 확장한다는 "서구의" 끔찍한 종말론적 목표telos, 마침내 모든 의존에서 벗어난 궁극적 자아, 다시 말해 우주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인본주의적 의미의 기원 설화는 본원적 일체original unity, 충만함, 은총과 공포의 신화에 의존하며, 이는 남근적 어머니로 표상된다. 인간이면 누구나 이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데, 개인의 발달과 역사의 발전이라는 이 과제, 강력한 쌍둥이 신화는 특히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우리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사이보그는 포스트젠더postgender 세계의 피조물이다. 사이보그는 양성성bisexuality, 오이디푸스 이전의 공생symbiosis, 소외되지 않은 노동을 비롯하여 부분들을 상위에서 통합해 그 전체의 권력을 최종적으로 전유하여 얻어지는 유기적 총체성을 향한 유혹과 거래하지 않는다. 사이보그는 어떤 면에서 서구적 의미의 기원 설화가 없다. 이것이 사이보그 "최후"의 아이러니다.

사이보그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신화로 출현한다. 사이보그는 인간의 둘레에 장벽을 쳐서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서로 격리하는 것을 나타내기는커녕, 거북하고 짜릿할 만큼 단단한 결합을 암시한다. 수간bestiality은 현재의 혼인 교환 주기에서 새로운 지위를 지닌다.

20세기 후반의 기계들은 자연과 인공, 정신과 육체, 자생적 발달과 외부로부터의 설계를 비롯해 유기체와 기계 사이에 적용되던 수많은 차이를 철저히 섞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만든 기계들은 불편할 만큼 생생한데, 정작 우리는 섬뜩할 만큼 생기가 없다.

문명의 기원에 관한 서구의 설화에서 글쓰기, 권력, 기술은 오랜 공범자다. 그 메커니즘의 경험을 바꾼 것은 소형화다. 소형화는 결국 권력의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이보그는 에테르ether이며 정수精髓quintessence다.

단일한 시각은 이중적인 시각이나 머리가 여럿 달린 괴물의 시각보다 나쁜 환상을 만들어낸다. 사이보그 연합체는 기괴하고 위법적이다.

"여성female"됨에는 여성을 자연스레 묶는 것이 없다. 심지어 여성"됨being"과 같은 상태가 없으며, 그 자체가 성과 관련된 과학 담론 및 사회적 관습을 통해 구성된 매우 복합적인 범주다. 젠더·인종·계급 의식은 가부장제·식민주의·자본주의라는 모순적인 사회 현실을 경험해온 우리의 비참한 역사가 강제로 떠안겨준 성과다.

지배를 통한 통일 또는 통합을 통한 통일에 대항하는 이론적·실천적 투쟁은 가부장제·식민주의·인본주의·실증주의·본질주의·과학주의를 비롯해 사라져도 별로 아쉬울 것 없는 다른 여러 주의들의 근거만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유기체적 또는 자연적 관점을 옹호하는 모든 주장의 근거 또한 무너뜨린다.

사이보그 페미니스트라면 "우리"는 자연적 통일성의 기반을 더 이상 원치 않으며 총체적 구성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 순수성 및 그와 결부된 피해자됨victimhood을 유일한 통찰 근거로 삼는 바람에 생겨난 피해는 이미 겪을 만큼 겪었다. 하지만 새로 구성된 혁명 주체는 20세기 후반을 살아가는 인민에게 진지하게 생각해볼 여유를 주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본질화하는 것은 노동의 존재론적 구조, 혹은 그 유비물인 여성의 활동이다. 내가 볼 때 이 입장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마르크스적 인본주의를 계승하면 지나치게 서구적인 자아를 함께 물려받게 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경우, 단일한 여성이라는 실체와 같은 것이 있다는 식으로 자연화한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위와 같은 공식화를 통해 여성들의 통일성을 만들고자 현실의 여성들이 일상에서 감당하는 의무를 강조했다는 점에 있다.

백인 래디컬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는 인종 문제에 관해 당혹스러울 정도로 침묵을 지킴으로써 무겁고 파국적인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계보를 세우려는 정치적 분류법 속으로, 역사와 다음성polyvocality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여성이라는 범주, 그리고 단일하거나 총체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전체로서의 여성이라는 사회 집단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폭로하겠다고 주장하는 이들 이론에, 인종(및 또 다른 많은 것들)을 위한 구조적 자리는 없었다

이제, 특정한 성과 성 역할 개념이 유기체나 가족 같은 자연적 대상의 유기체적 속성이라는 유성 생식 이데올로기는 설득력을 잃는다.

원시나 문명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우리는 통제 전략이 자연 대상의 온전성integrity이 아닌 경계 조건과 인터페이스, 경계를 넘나드는 흐름의 비율에 집중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서구 자아의 "온전성"이나 "진정성"은 의사결정 과정과 전문가 체계에 자리를 내주었다

대상, 공간, 신체는 그 자체로 신성하지 않다. 공통 언어common language를 매개로 신호를 처리할 수 있는 적절한 기준과 코드만 있다면, 모든 구성 요소가 인터페이스를 매개로 접합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계의 교환은 마르크스가 그토록 잘 분석한 현상, 즉 자본주의 시장이 모든 것을 화폐로 교환할 수 있게 만들면서 도입한 보편적 번역의 한계마저 초월한다. 이 우주의 모든 구성 요소에 영향을 주는 특권적 병은 스트레스, 즉 소통의 실패다 (호그니스Hogness 1983).

사이보그는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는, 포스트모던 집합체의 일종인 동시에 개인적 자아이다. 이것이 바로 페미니스트가 코드화해야 하는 자아이다.

정신과 육체, 동물과 인간, 유기체와 기계, 공과 사, 자연과 문화, 남성과 여성, 원시와 문명 등에서의 이분법은 하나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의심스럽다. 여성들이 실제로 처한 상황은 지배의 정보과학이라는 생산/재생산과 커뮤니케이션의 세계 체제 속으로 통합/착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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