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은 글쓰기를 위한 방법론으로 융합 글쓰기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융합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융합은 더하기도 아니고 하나로 합치는 것도 아니고 전문성의 반대말도 아니다. 이는 crossing, 경계넘기다. 그녀는 횡단의 정치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융합은 객관성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한 사유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는 것을 '트랜스버설(trans/versal)'이라고 하며, 횡단(橫斷)으로 번역한다. 단어 그대로 가로지르는 것이다. 가로지름(crossing)은 수직적인 수용이 아니라 기존의 법칙을 파괴하고 재생산하고 다른 의미의 생명체를 만드는 일이다. - P21





서문과 1장을 읽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나의 글쓰기는 어떤 사고방식 때문에 가능했는가." -P10


해당 질문이 머릿 속에 맴돌았다. 내가 하는 공부를 정리하고 나누는 목적으로 글을 쓴다고는 생각했지만 사실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과거를 되짚었다.

처음 내가 역사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생각해보았다. 일제 시기,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맞닥뜨렸다. 처음에는 분노였고, 그 다음에는 좌절과 혼란이 찾아왔다. 이후에는 비판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했던 공부는 점점 더 확장 중이다. 다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명확하게 정리되는 것 같지는 않다. 조금 더 생각해보아야할 것 같다.


'지금 여기'에서 내게 필요한 공부를 하다 보면 '고전'과 만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려면 우선 현재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알고 자신에게 필요한 공부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내게 필요한 공부를 하다 보면 다음에는 어떤 공부가 필요한지 깨닫게 된다. - P53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에 따라 그 사회의 운명이 달라진다. - P16


나는 누군가 도태되고 소외되어 설움받지 않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건강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더 나은 사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생각이다.


'생각의 자유'는 희망, 욕망, 망상 같은 비현실을 연속으로 쌓아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는 일이다. 요즘 세상에는 '소름끼치는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인프라 온라인이 있다. - P29

생각의 자유는 권리가 아니다.(확실히 해 둘 것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자유일 때만 성립하며, 혐오는 사상이 아니다.)  - P30


생각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와는 다르다는 것. 본인이 하는 생각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데 문제가 되는 발상이라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며 위험하다. 


백인 남성은 자신이 새, 조물주, 신의 대리자라고 착각하고 비서구의 식민지 남성 지식인은 조감하지 못해 안달이다. 인간은 새가 아니다. 드론으로 건물은 볼 수 있겠지만 인간과 사회 현상은 볼 수 없다. 드론으로 건물을 관찰하더라도 어느 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건물의 모습은 각기 다르며, 볼 수 있는 것은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 P57


내가 보는 인식은 결코 전체일 수 없다. 따라서 타인을 알 수도 없을 뿐더러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인식은 부분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작년 11월 정도부터 종이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2개의 신문을 구독한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시간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아 한 개의 신문을 구독중이다. 덕분에 아침 시간을 조금 더 앞당기고 훓어읽기를 한다. 다른 면은 몰라도 사설 면과 국제 면은 꼼꼼하게 읽는 편이다. 사설 면은 다양한 필진들의 글을 읽는 맛을 느낄 수 있다. 국제 면은 기사가 항상 적어서 아쉽지만 덕분에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매주 시사인을 읽는 것도 있다. 얘도 주간지지만 종이로 받고 있으니까 포함시킨다면 주간지로는 1개, 일간지로는 1개를 읽는 셈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온라인에 올라온 자극적인 이슈 등으로 선택되어진 뉴스를 보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글쓰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라는 말에 위안이 되었다. 나는 늘 내 글이 못나 보이고 그래서 한 번이라도 더 쓸 글을 주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시간에 쓰는 데 집중하면 될 것을 애써 핑계나 구실을 찾는다. 생각해보니 쓰면서 읽은 것이 정리되고 생각이 승화되는 경우가 많다. 


글쓰기가 잘 되지 않을때, 말문이 막힐 때,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런 곤란은 '작가'의 일상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나의 경우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는 관심사가 아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히 쓰는 것이 관건이다. - P18



무언가 중구난방의 글이 된 것 같지만 어쨌든 정리하는 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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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8-22 17: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분들의 리뷰를 여러차례 읽었고 거기에서 ‘융합‘이란 단어를 만났어요. 그리고 거리의화가 님의 이 글을 읽기 전까지 제가 생각한 융합은 ‘더하기‘ 였습니다. 크로씽, 경계넘기라니. 융합이 그런 뜻을 가져올지 몰랐지만 정희진 쌤이라니, 그렇겠구나! 싶어지네요. 저도 얼른 읽어야 되는데 읽을 거 너무 많아서 자꾸 밀리네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08-22 17:22   좋아요 2 | URL
융합이라는 단어의 오독에 대해서 여러 번 책에서 강조하더군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더하기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실은 학문간 통합 정도로 생각했어요. 완전히 다른 개념이더군요. 읽을 거리는 언제나 많고~ 저는 시간 더 지나면은 시들해질 것 같아서 이참에 읽으려고 꺼냈습니다. 짧은 글 속에도 다양한 주제들이 들어 있어서 생각할 거리가 많네요.

독서괭 2022-08-22 17:5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종이신문도 잘 골라야 하긴 하지만, 인터넷 뉴스보다는 훨 나은 것 같습니다. 전 얼마전 유튜브에서 우영우를 검색했다가 정말 깜짝 놀랐어요. 박은빈에 관한 가짜뉴스 영상이 버젓이 떠서.. 진짜 뉴스처럼 편집해서요. 이상해서 검색해보니 기사도 났더군요. 좋은 매체와 옥석을 골라낼 수 있는 날카로운 눈이 중요한 시대 같습니다.
이 책 아직 안 사고 버티고 있어요..ㅋㅋ

거리의화가 2022-08-22 21:13   좋아요 2 | URL
종이신문 좌우 두 계열로 보면 좋을텐데 그렇게까지는 여력이 안되더라구요. 어떤 종이신문이든 인터넷 뉴스보다는 나을겁니다ㅎㅎㅎ 유튜브도 그렇고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가짜 뉴스가 퍼지는 건 순식간인것 같습니다. 근데 사람들이 이런 뉴스를 봐도 검증을 안하고 그대로 믿고 퍼뜨리니 더 확산되는 문제가 생기죠-_-; 종이신문을 읽는 것이 어쨌든 본인이 읽을 거리니 어떤 것을 선택할 지 고르는 과정도 있어서 도움이 되더군요^^
ㅎㅎㅎ 언제가 됐든 이 책 사실 것 같은데요ㅋㅋㅋ

mini74 2022-08-22 18: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 어린이신문 받아보는 애들이 정말 부러워서 ㅎㅎ 아이 어릴때 꽤 오래 어린이신문을 받아봤어요. 어른신문 받으면 무료로 주더라고요 그래서 어린이신문 받으려다 어른 신문을 구독한 ㅎㅎ 전 어린이신문애 나오는 아이들 기사가 참 좋더라고요. 줄 그으며 읽는 맛, 두번 다시 보진 않겠지만 오려서 스크랩하는 재미 ~ 화가님 글 읽으니 종이신문 넘기는 소리가 그립네요

거리의화가 2022-08-22 21:16   좋아요 2 | URL
오. 어린이 신문~에 나오는 아이들 기사 굉장히 궁금합니다! 저는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지하철에서 나오는 무가지도 한 때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젠 뭐 그런것도 다 없어지고 오로지 온라인 뉴스만이 판치는 세상이 되버렸네요. 꼼꼼히 읽는다면 스크랩하고 줄긋고 생각도 적고 그래야 하는데 그러기엔 시간이 모자라고요. 기사 읽는데 겨우 1시간 남짓이라~ㅎㅎ 그래도 읽는게 도움이 되지요^^*

바람돌이 2022-08-22 19: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융합은 경계넘기라는 말 정말 좋네요. 내가 또는 주변 환경이 내게 쳐놓은 경계를 뛰어넘는건 늘 쉽지만은 않은데 이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서 읽고 쓰야하는거 같아요.
이렇게 열심히 읽고 쓰시는 화가님 그 와중에 일간지까지.... 아 저는 주간지 두개 구독하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읽을 때가 더 많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8-22 21:20   좋아요 3 | URL
저도 저 융합이라는 말이 좋더라구요. 근데 사실 융합 글쓰기보다 더 와닿게 하려면 경계넘기라고 아예 써주는 게 나았을 것 같기도 해요. 저도 저 말이 좋아서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얻을 용어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일간지 읽기는 저도 이제 몇 개월 남짓인데 그냥 읽고 마는데 아까운 것 아닌가 생각이 들때도 있으나 역시 종이신문으로 읽는것하고 온라인으로 읽는 것하고 차이가 나더군요. 집중도도 그렇고요^^ 확실히 직접 넘기며 보는 게 더 잘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주간지는 저도 매번 시기를 놓쳐서 뒤늦게 읽곤 합니다ㅜㅜ

청아 2022-08-22 20: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에드워드 O.윌슨의 통섭을 읽으려고 빌려왔다가 조금 보고 다시 반납했었거든요. 두껍기도 하고 어려워서요.(하지만 화가님은 뚝딱 읽으실듯한 느낌ㅎㅎ) 이 책을 읽다가 안읽기를, 아니 못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ㅎㅎ
뒤에도 이런 저런 이야기 와중에 계속 융합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임신중독>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것 같아요. 저도 종이신문 구독하고 싶네요.^^*

거리의화가 2022-08-22 21:23   좋아요 2 | URL
근데 그 책은 굳이 읽으려는 생각 자체를 해보진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책에서 그 책을 얘기하길래 뭔가 싶었어요.ㅋㅋ 인문학에 관심이 많기는 하지만 일단 제가 눈길이 가야 하는데 그 책은 가지 않았었습니다~ㅎㅎ
중간 중간에 페미니즘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실 때 속시원했어요. 이 부분은 제가 정리가 안되어서 쓰지는 못했습니다만~ㅎ
종이신문은 여력이 되신다면 한 번 고려해보셔요!^^

2022-08-22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3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3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3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당의 불학(상)

법사는 "이 네 논서들이 이름과 내용은 다르지만 그 대요는 모두 ‘이제’에 총한 그 내용괄되고 ‘불이(不二 : 두 극단을 피함)‘의 중도를 밝힌 것이다. 만약 이제를 이해하면 네 논서는 명확히 파악되고, 이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네 논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를 해명하면 네 논서를 깨우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뭇 경전을 다 이해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제불(諸佛)이 모두 이제에 의거하여 설법한다고논서는 말하기 때문이다. - P294

불가의 학자들은 홍황사의 도랑의 가르침을 받들어 세 단계의 이제 이론을 수립했다. 제1단계 이제는 유(有)라고 말함은 세제이고, 무(無)라고 말함은 진제임을 밝힌다. 제2단계 이제는 유라고 말하고 무라고 말함은 모두 세제이고, 유도 무도 아니다고 즉 둘이 아니다고 말함이 진제이다.……제3단 - P294

계 이제의 의미는 이제란 ‘유’·‘무’는 둘(二)이면서 또 ‘불이(不二)’도 아니다는 것이니, 둘이라고 말하고 둘이 아니다고 말함이 세제이고 ‘둘이 아니고‘ ‘불이도 아니다‘고 말함이 진제이다. 이렇듯 이제는 세 단계가 있어서모든 설법은 반드시 이제에 의거하고, 모든 발언은 이 세 단계를 벗어나지않는다. - P295

현장의 일생 사업은 세친(世親,400-80?,바수반두)과 호법(護法, 530-61) 일파의 불학을 중국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가 창도한 종파는 중국적 사상 경향이 가장 적다. 그러나 그의 교의는 극히 철학적 흥취가있다. - P299

현장이 서술한 유식 사상의 핵심은 "환화인은 참된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있었다. 각각의 핵심이 달랐던 만큼 강조한 내용도 달랐다. 현장 역시수행자의 성불 이후의 활동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다지 언급하지않았는데 강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단지 일부의 사람에게만 부처의 무루종자가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사람마다 모두불성이 있고 사람마다 모두 성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식(識)이 "의타기(依他起 :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남)"이니 그 속의 종자도의타기일 것이므로 한 번 생성되어 불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수는 있지만, 적어도 세상 사람들이 성불할 가능성은 다르다. 또 그가 말한 수행은 반드시 일정한 단계가 있었으니 돈오(頓悟)가 아닌점수(漸修)를 주장한 셈이었다.
당시에 현장이 논한 불학을 그르다고 여긴 사람이 있었는데 법장(法藏, 643-712)이 그 대표자이다. - P334

법장은 하나의 영원불변한 진심을 세워 일체 현상의 근본으로 여겼으니, 그의 설은 하나의 객관적 유심론이다. 주관적 유심론보다 객관적 유심론이 [소박한] 실재론에 가깝다. 그 설에 따르면 객관적 세계가주관을 떠나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객관적 세계 속의 각각의사물은 모두 진심 전체의 현현이므로 그것의 진실성은 상식에서 진실로 여기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우월하다. 법장이 말한 공은 현장이 말한 공의 공과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법장의 말에 따르면 "사(事)" 역시 당연히 존재하는 것인데, 이것은중국인의 사상 경향이기도 하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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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임신중지에 다가가 이를 경험하고 기억할 때 가질 수 있는 의미는 철저히 제한돼 있다. 여성의 선택을 분명히 제한하자고 호소해서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수사가 제한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이때 선택이라는 개념은 임신중지의 맥락에서 규범화된다.

임신중지의 탈정치화는 선택이라는 수사를 통해 이뤄진다. 임신중지에 들러붙은 감정은 임신중지의 사회적 의미를 자연적인 것처럼 만들고, 임신중지에 대한 가정을 진실로 유통하는 주요 수단이다.

임신중지를 선택한다는 의미에 들러붙어 그 의미를 바꿔 놓는 감정들은 이미 ‘줄 세워진’ 행동 규범에 여성을 복귀시켜 ‘일직선으로 정렬하는 장치’다. ‘어려운 선택’이라는 서사는 여성이 임신중지를 함으로써, 자연히 또 자동적으로 ‘행복의 대상’인 태아에게 이끌리던 발걸음을 반대로 돌린다고 전제한다. 이때 여성이 임신중지를 하는 여러 이유(대학을 마치지 못해서,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없어서, 독신이어서 등등)가 강조된다. 이런 식으로 임신중지를 정당화하는 일은 흔하다.

감정경제는 충돌하는 두 여성성을 화해시키려 한다. 하나는 여성의 자유를 ‘선택’을 통해 설명하는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이다. 다른 하나는 ‘모성’을 여성의 정박지로 고정하는, 엄격히 제한된 젠더규범이다. ‘어려운 선택’과 ‘태아중심적 애통함’을 인용하는 일은 임신중지 여성에게 ‘모성적 주체’라는 문화적 생명력을 복구해 준다.

임신중지를 숨기는 여성 비율이 높다는 것은, 임신중지를 겪어 본 적 없는, 더군다나 임신중지는 고사하고 임신도 하지 않을 남성들이 임신중지를 재현하는 장본인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떻게 여성이 임신중지에 접근하고, 이를 경험해야 하는가’라는 기대가 재현의 영토를 지배해, ‘좋은 여성’에 관한 젠더 전형ㆍ이미지ㆍ이상에 길을 터 준다.

임신중지 반대론자들은 임신중지를 겪은 여성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길 거부한 ‘이기적인 어머니’. 임신중지에 어떤 일이 따르는지, 그 심리적ㆍ감정적 후유증이 어떠한지도 모른 채 아이를 죽인 ‘불운하고 취약한 희생자’. 이와 반대로 여성이 임신중지에 접근하는 것을 지지하는 이들은, 여성에게 임신중지를 ‘강요하는’ 경제적ㆍ사회적 상황을 강조한다.

나는 임신중지가 축하받을 일이라고 본다. 임신중지는 의도치 않게 임신을 한 여성이 원하는 것을 얻고, 재생산 가능한 연령대의 여성이 재생산과 분리된 이성애 섹스를 보장받을 수 있는 일이다. ‘의도치 않게 임신한 여성’이라는 위치는 담론적인 동시에 물질적이다.

‘좋은 어머니’는 젠더ㆍ인종ㆍ계급ㆍ섹슈얼리티 등 정체성이 교차하며 형성된 주체로서, 그 정체성들의 역학관계를 떠받치고 강화했다. 다른 말로 하면, 임신중지 재현은 고정된 사회질서를 만드는 수단, 즉 고정된 질서와 그 안에 자연화된 역학관계가 도전받을 때 거기에 대응하는 수단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무언가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주체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비쳐야 한다. 그래야 규제가 유지된다. 이 책에서 보았듯, 반임신중지 운동 역시 ‘정보를 갖춘’ 선택이라든지 ‘진정한 선택’을 옹호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정책의 목표는 (물론 이게 바로 그 효과이기도 한데)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즉 오히려 여성이 나중에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게끔 방지하는 정책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선택의 주체는, 이를테면 여성이 무한한 선택지를 가졌고, 행복의 대상인 아이에게로 향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그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모성을 선택한다고 하는 식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여기서 그 주체는 여성의 재생산적 신체라는 차원에서, 선택에 깃든 긴장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균형은 깨지기 쉽다. ‘자율성’과 ‘선택’이 있는 곳에 ‘제약조건’과 ‘의존’이 있다. 개인의 선택은 정치적이다.

임신중지 법이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근원은 아니다. 법은 젠더ㆍ임신ㆍ모성 규범을 반영하고 강화하는 장치일 뿐이다.

‘자유’를 ‘선택’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평등의 구조적 양식을 은폐하는 일이다. 재생산 정의를 보장하는 수단으로서 법을 내세울 때 비슷한 효과가 난다.

괴로움ㆍ애통함ㆍ수치라는 지배적인 각본과 그 대안이 되는 문화적 서사는 늘 같이 존재해 왔다. 이 책의 경우 전자에 주목했고, 그런 각본에 따라 임신중지를 재현하는 영토는 획일성을 띤다. 그러나 문화 지형을 살펴보면 이질성이 뚜렷하다. 이를테면 몇몇 프로초이스 활동가는 임신중지로 여성에게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심리적ㆍ감정적 효과란 없다고 꾸준히 말해 왔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룬 임신중지 서사 헤게모니는 기본적으로 ‘반임신중지’ 입장이다. 이는 소거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사자 서사에 근거한 임신중지 정치는 개별 경험의 정치로 환원될 위험이 있다.

임신중지 정치가 임신중지를 하려는 혹은 하고 난 여성의 느낌으로 환원되면, 그 느낌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광범위한 사회ㆍ구조ㆍ정치적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이를테면 양육에 대한 결정, 또 그런 결정에 대한 다른 이들의 평가와 판단을 손쉽게 하거나 감추는 ‘젠더화된 노동분업’과 ‘계급ㆍ인종에 기반한 불평등’, 임신중지와 피임의 구별이나 원치 않은 임신을 막기 위해 여성에게 부여되는 책임 등 역사사회학적 질문, 임신의 조건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 등이 있다.

임신중지의 감정 경험을 획일적으로 재현하면 자연화된 여성 주체가 만들어진다. 그 감정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말이다. 여성의 삶과 열망의 이질성은 임신중지의 단일한 서사에 포착될 수 없다.

‘무엇이 행복한 임신중지의 가능성을, 가장 좋게 봐서 규범을 위반한 것, 가장 나쁘게 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가?’ 임신을 원치 않은 여성의 관점에서 임신중지를 바라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줄 유일한 수단이 있고 그 수단이 비교적 직접적이며 고통을 주지 않는데도 자꾸만 불행으로 재현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터무니없다.

임신한 주체의 다양성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캠페인은 프로초이스 운동과 학계에 반드시 필요하다.

임신의 불확정성을 인정한다면 유산 혹은 임신중지에 뒤따르는 다양한 경험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유산한 여성, 한때 원했던 임신을 중지한 여성, 원치 않은 임신을 중지한 여성은 다양한 현실에 놓여 있다. 이런 경험들은 임신중지 반대론자들이 아무리 임신을 ‘아이와 어머니’라는 단일한 재현에 묶어 내려 하더라도, 서로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임신중지 여성을 평가하려는 고정된 규범이 없을 때, 수치나 죄책감은 임신중지의 정동적 지형에서 사라질 것이다. 모성을 해체해 여성에게 행복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임신중지를 분명 여성의 선택으로 새롭게 프레이밍하되 자율적 행위자가 내린 선택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획에는 오늘날 임신중지의 감정으로 인식되는 것들에 균열을 내는 과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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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선사, 그 형성과 지속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3
정상우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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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근대 역사학'의 성립과정은 '동양'의 창출 과정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본사를 중심으로, 일본사의 타자로서 한국을 비롯한 주변의 역사를 배치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식민주의 역사학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의 타자화가 식민지 조선을 향해 나타난 것으로, 일본사의 타자로서 한국사가 재구성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P21


이 책은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한국학총서' 지원사업으로 진행된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3권째이다. 


일본은 제국주의 후발 주자로 근대적 학문 연구 방법을 적용하면서 자신들의 침략과 지배를 옹호하기 위한 논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식민사학은 그렇게 등장한 논리다. 

식민지기 일본인 연구자들은 '반도론', '타율성론', '사대주의론', '정체성론', '일선동조론' 등으로 다양한 논점을 제시하며 정당성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렇다면 제목의 만선사는 무엇인가? '만선', '만선사'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로 일제 시기를 거치면서 등장했으나 이는 당시에도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어느 범위까지를 지칭하는지 정해지지 않은채 모호한 것이었다. 


일본의 근대화와 주변국 침략으로 인한 제국 판도의 팽창 및 이와 동시에 일본에서 진행된 근대 역사학의 성립 전개에 따른 새로운 역사공간으로서 '동양'의 형성, 그리고 그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과 의미를 고찰하는 것은 한국사의 범위를 벗어나는 거대한 문제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과 더불어 만들어진 용어인 '만선(滿鮮)'과 그 역사에 대한 연구였던 '만선사(滿鮮史)'는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 P23


만선사를 유일하게 체계적으로 정리한 학자는 이나바 이와키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만주사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시대에 따라 조선사, 일본사, 한중관계사, 한일관계사로 범위를 확장하면서 삶의 마지막까지 연구를 이어갔다. 


1910년대  그는 『만주발달사』 저술을 통해 몽골-중국-만주 셋 간의 역학관계를 비롯, 대륙의 민족들이 만주에 미친 영향을 넘어 대륙과 일본의 관계까지를 만주사의 범위로 정의하였다. 그는 먼저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에 대한 원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송대 이후 북방 민족의 힘이 강해지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 왕조를 회유하면서 중국 문화가 한반도를 장악했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성리학과 가례로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만주사에 대한 관심을 조선으로 확장하는 한편, 조선사를 연구해온 다른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잇기도 했으나 비판하거나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기존 연구자들은 조선의 남부 지역과 일본의 인종적 근친성을 강조하며 고구려, 발해를 비롯한 한반도 북부에 존재한 국가를 한국사의 범위에서 제외시키려고 한 반면 그는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요소로 한반도를 꼽으며 거리를 두었다. 


1920년대 『조선사』 편찬 임무를 위해 조선에 들어온 그는 조선의 자료를 이용하며 조선사를 고증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의 정체와 원인을 송 이후 이이제이의 외교수단이 강화되고 성리학의 가례가 반도에 이식되었다는 것에 대한 고증이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의 멸망으로 만선이 분리된 이후 반도의 왕조는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반도에 침략 or 교류한 중국 세력과 만주 장악 세력의 눈치를 살피면서 사대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 조선시대의 정치가 귀족정치을 벗어나지 못했고 명의 법과 제도를 모방하면서 귀족과 관료가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 때문에 당쟁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1930년대 그는 만주국 건국 후 만주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만주사에 대한 통사를 『만주국사통론』으로 정리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이나바는 만주사의 기원을 숙신으로 보고 중국의 한족과 구별되는 만주만의 특징을 바탕으로 비한족이 만주라는 땅에 거주하며 거쳐간 역사를 기술하였다. 만주의 지리적 역사가 아닌 만주 민족의 흥망성쇠를 다룬 역사로 기술한 것이 특징이다. 구체적으로는 만주와 몽골을 함께 장악한 거란의 태조와 청 태조, 강희제의 정복 활동을 만주족의 발전을 위한 전제로 제시하였다. 이로써 만주 민족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만주의 발전을 위해 만주만이 아닌 몽골까지 장악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만주국은 당시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건국의 정당성이 필요했다. 이는 '오족협화'라는 건국 이념에 대한 선전으로 활용되는 동시에 만주국과 몽골의 국경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몽골군의 전쟁에 대한 합리화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대륙의 역사적 전개를 체계화면서도 대륙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다. 


한사군의 설치가 일본에서도 국가 성립의 계기를 만들었다면서 일본의 국가의 성립 시점을 3세기로 끌어올렸고, 임나 일본부의 출현 시기도 앞당겼다. 고대 중국과 일본의 교통으로는 특별히 중국의 위(魏)에서 히미코 여왕에게 금인자수를 보낸 일, 남송 정벌을 위해 쿠빌라이가 흑산도 일대를 조사하고, 탐라를 장악하며 일본으로 국서를 보낸 일 등을 제시하였다. 또 임진왜란의 결과 만주에 대한 명의 견제력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막대한 제정 지출로 청이 흥기할 수 있었음을 제시하였다. 

일본은 대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대상으로까지 만선사의 범위에 포함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은 만선사를 구성하는 핵심 축으로 작용하였다. 


일제 시기 일본 연구자들의 이름을 공부하며 알게 되는데도 이렇게 매번 양파처럼 새롭게 알게 되는 점이 놀랍다. 

일본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서 잘 들어오지 않아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다. 계속 반복해서 정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일단 세 명의 학자들을 정리해둔다. 


일단 이나바 이와키치는 만선사 연구학자로 유일하다고 할 수 있으니 기억해야 한다. 그는 대륙과 만주와 조선의 불가분성을 주장하였고 북방의 역사를 위해 단군 신앙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식민 사학자들이 모두 그렇겠지만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흘러갔음을 극도로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마니시 류를 기억하자. 그는 일본에서 조선사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학자다. 조선사 연구 논문을 최다 발표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한반도 남부의 인종과 일본인을 동종으로 보는 등 식민사학자의 논점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도리야마 기이치를 더한다. 그는 발해사를 연구하였으며 이나바 이와키치의 만선사 연구학 중 발해 관련하여 기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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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21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본이 식민사학에 기울인 노력을 보면 정말 눈물겹습니다. 아 진짜 주어진 목적을 위해 자료를 재배치하면서 저들은 한치도 그 사실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겠지요. 신념이 사실을 가릴 수 있다는 것 잊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 시리즈가 나온건 몰랐는데 화가님 진짜 부지런하게 찾아서 읽으시고 리뷰 올려주셔서 저도 공부가 되네요.

거리의화가 2022-08-22 09:31   좋아요 2 | URL
논리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된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모습이 징그럽다고나 할까요.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 주변의 역사를 연구하고 일본까지 귀결시킨 것을 보니 우습더군요. 이 책 읽으면서도 갖다붙이기는 참 잘하는구나 하는 생각 여러 번 했습니다^^;
네. 2월부터 나왔는데 시리즈 책은 이미 다 나왔고요. 부지런히 읽으면 올해 안에는 다 읽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부가 되신다고 하니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8-22 08: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본인이 우리의 역사를 저렇게 파고 들어 연구하다니....아주 주관적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구요. 학자라고 표현해도 되나? 싶기도 하네요???ㅋㅋㅋ
그래도 만선사가 뭐지? 싶었는데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범위가 이렇게 광범위하다는 걸, 화가님 덕분에 많이 알게 되네요^^

거리의화가 2022-08-22 09:33   좋아요 2 | URL
찾아내는 논리겠지요. 꿰맞추기도 힘들텐데 애써 찾아내려고 했고 이걸 또 평생에 걸쳐 연구한 학자들이니 놀랍습니다ㅋㅋㅋ
사실 저도 만선사 두루뭉술하게 알았던 것 같은데 이 책을 통해서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님께도 도움이 되어서 좋네요^^
 

남북조의 불학과 불학에 대한 당시의 쟁론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되었을 때 당시의 중국인들은 불교철학을 접하고는 우선 그것을 중국철학 고유의 술어로 번역한 뒤에야 비로소 이해할수 있다고 느꼈다. 불교철학을 선양한 사람들도 반드시 불교철학의 사상을 중국고유의 철학 술어로써 설명해야 중국인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방법을 당시에 "연류(連類)" 혹은 "격의"라고 불렀다. - P235

유무 또는 공유는 바로 노장과 불학에 공통된 문제였고 또한 남북조 이후 불학가들이 가장 많이 토론한 문제였다. 이는 6가 7종으로 분류된다. - P238

한 생각이 미혹되면 본디 무아인데 망령되게 하나의 자아를 세우게 된다. 자아가 생김에 따라 드디어 비아(非我)가 생기고 주관과 객관이 나뉘어 대립하면 그로부터 현상세계가 일어난다. - P255

현상세계의 모든 사물은 인연(因緣)이 모여야 생기고 인연이 모이지 않으면 멸하기 때문에 모두 환화인과 같다. 이런 면에서 보면 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라고 한 것은 "환화인은 참된 사람이 아님"을 지칭했을 뿐이고, "환화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환화인이있다는 면에서 보면 물론 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물은 유가아닌 까닭도 있고 무가 아닌 까닭도 있다." 이것이 "참되지 않으므로 공이다는 이론(不眞空義)"이다. - P257

「물불천론」은 말한다. "불변성에 대한 탐구에서 우리는 변동을 떠나 정지를구하지 말며 반드시 뭇 변동 속에서 정지를 구해야 한다. 반드시 뭇 변동 속에서정지를 구하므로 변동해도 영원히 정지하며, 변동을 떠나 정지를 구하지 않으므로정지해도 변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尋夫不動之作, 豈釋動以求靜, 必求靜於諸動,
必求靜於諸動, 故錐動而常靜, 不釋動以求靜, 故維靜而不離動)." 그러므로 이른바동·정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제법의 실상은 그것이 변동도 정지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변동하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중도의 논리로 표현하면, "변동이나 정지가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양극단의 하나에 떨어지나, 변동도 정지도 없다고 말하면 중도에 맞게 된다." - P261

가령 황금보물을 저장한 창고 안에서, 항상 황금의 본체만 관조하고 각종형상은 보지 않으며, 각종 형상을 보더라도 역시 하나의 황금임을 안다고 하면, 이미 형상에 의해서 미혹되지 않으니 곧 분별을 벗어나고, 항상 황금의본체만 관조하니 허망한 그릇됨이 없어지는데 바로 진인(眞人)의 경우가 그와 같다. 항상 "진일(眞一)"만 관조하고 각종 형상은 보지 않으며, 각종 형상을 보더라도 역시 "진일 "임을 알아서 망상(妄想)을 벗어나 전도된 편견을가지지 않고 진실의 경지에만 머물면 그가 바로 성인(聖人)이다. - P263

반야는 비어 있어도 통찰하고, 진제는 없는듯해도 지혜를 발하고, 온갖 변화 속에서 고요할 수 있고, 성인은 도모하지않고 응해도 일을 성취한다. 이것이 곧 알지 않아도 저절로 알고, 도모하지않아도 저절로 성취하는 것이니, 다시 무엇을 인식하며 다시 무엇을 도모하랴? - P268

무심(無心)하게 사물에 감응한다면 행위를 하더라도 감정에 의해 초래될 내용이 없으므로 윤회를 벗어나고 업보를 받지 않게 된다. - P273

배움은 번뇌를 잠복시킬 뿐이지만 깨달음은 번뇌를 소멸시킨다.
"잠복된 번뇌가 오래되면 소멸된 번뇌에 이른다. 번뇌의 소멸은 번뇌가 잠복된 이후에 일어나니", 이른바 "깨달음의 경지는 유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나 배움에 의탁하여 도달한다"는 말이다. - P280

정신과 육체가 하나라면(一)"미세한 것과 조잡한 것은 동일한기이니", 육체가 있으면 정신이 있고 육체가 없으면 정신도 없다. 또 정신과 육체가 본래 별개라고(異) 해도 "정신이 육체에 거함"은마치 "불이 나무에 있는 경우"와 같아서, 나무가 없으면 불은 의탁할 곳이 없고 육체가 없으면 정신은 깃들 곳이 없다. 정신과 육체가하나인지 별개인지 쉽게 단정할 수 없더라도 "유·무의 논리는 반드시 취산에 근거하니" 기가 모이면 "유"이고 기가 흩어지면 "무"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는 단지 한 생에 한정되니 생이 다하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즉 "이치는 한 생에 한정되고 생이 다하면 더 이상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 P287

육체는 정신의 바탕(質 : 형질)이고, 정신은 육체의 작용(用)이다.…………정신과 형질의 관계는 마치 예리함(利 : 잘 베는 능력)과 칼날(刀)의 관계와 같다.
육체와 정신의) 작용의 관계는 마치 칼날과 예리함의 관계와 같다. 예리함이 곧 칼날은 아니고 칼날이 곧 예리함은 아니지만 예리함을 떠나 칼날은 존재하지 않고 칼날을 떠나 예리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칼날이 없는데 예리함이 존재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거늘, 어찌 육체가 소멸했는데 정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용납하겠는가?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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