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회경제적 대립의 가치와 그 범위는 이 대립이구아야키의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구조화하는가에 따라 측정할 수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실천의 경험이 사고의 영역 바깥에 위치하지 않도록 한다. 즉 그들은 그것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사냥꾼들과 그 아내들 사이의 경제적으로 불균형한 관계는 활과 비구니의대립으로 표현된다. 이들 두 가지 도구 각각은 대립하는 동시에 주의깊게 분리되어 있는 존재 방식의 수단이자 기호이며 요약이다. 사냥꾼의 유일한 무기인 활이 남자들만의 도구이고, 그 자체가 여자의 물건인 바구니를 여자들만이 사용한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남자는 사냥하고 여자는 운반한다. - P133

생활의 부정적인 면은 여자들이 담당하고, 남자들은 쾌락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생활을 참아낼 수 있을정도의 다양한 가치를 누리는 데 전념하는 듯 보인다. 노래하는 모습에 있어서도 여자들은 노래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울려는 듯 얼굴을 감추고 몸을 숙인 자세를 취하는 데 반해 사냥꾼들은 얼굴을 들고 몸을곧추세운 자세로 자신을 찬양한다. 사냥꾼들의 노랫소리는 힘차고 거의 격렬하기까지 하며 때로는 성난 듯하기도 하다. 사냥꾼들이 노래에담는 남자다움의 극치는 부족함이 없는 자신에 대한 확신과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자신과의 일치에 대한 확신으로 나타난다. 더욱이남자들의 노래에 사용되는 언어는 상당히 변형되어 있다. 즉흥적으로점차 거침없고 풍부해진 말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잠시 후에는 드디어 다른 언어를 듣고 있는 듯이 느끼게 만드는 극단적인 변형이 이루어진다. 아체 사람이 아닌 사람은 이 노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 P141

개인으로서의 사냥꾼은 중심에 위치하고 재화와여성, 말의 상징적 영역이 그 주변을 감싸고 있다. 단 남자들과 수확물 - P152

그리고 남자들과 여자들의 관계는 사회의 기초를 형성하는 분리의 관계인 데 비해, 남자들의 언어활동에 대한 관계는 노래를 통해 언어활동의 진정한 소통 기능을 부정하고 또한 교환 그 자체를 부정하는 철저한 결합의 관계로 응축되어 나타난다. 결국 사냥꾼의 노래는 음식금기 및 일처다부제와 대칭적이고 역전된 위치에 있고, 사냥꾼이자 남편으로서의 남자가 이 양자를 부정하길 원한다는 것을 형식과 내용을통해 명확하게 드러낸다. - P153

노래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인간과 사회의 분리는 노래 속의 말과 기호의 분리에 상응한다. 그리고 의미가 가치로 전환하는 것은 개인이 자신의 고독의 주체로 전환하는 것이기도 하다. - P158

언어활동은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는 것, 인간은 언어활동과 완전히 대등해질 수 있다는 것, 현대의서구는 언어활동을 남용함으로써 그 가치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문명화된 인간의 언어활동은 인간에게 있어완전히 외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에게 단순한 소통과 정보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의미의질과 기호의 양이 반비례한다. 반대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보다도 칭송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진 원시 문화는 이미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과의연대인 언어활동과 내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원시인에게 있어시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언어활동 자체가말의 가치를 지닌 자연스러운 시이기 때문이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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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남아메리카의 추장들은 네 가지 특징을 지닌다는 것을 알수 있다. 추장은 "전문적인 평화 조정자‘이며 동시에 관대하고 말솜씨가 뛰어나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많은 아내를 거느릴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기준 중 첫 번째 것을 나머지 세 가지와 명확히 구별하지않으면 안 된다. 후자들은 사회구조와 정치체제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증여présentations와 대응 증여contre-présentations의 집합을 규정한다.
추장이 예외적인 수의 아내를 거느릴 수 있는 권리를 지니는 대신 집 - P48

단은 추장에게 재산에 대해 연연해하지 말 것과 말솜씨를 요구한다.
이처럼 분명히 교환의 형태를 띤 관계는 사회의 본질적 차원, 즉 집단이 집단으로서 갖추고 있는 구조와 관련된 사회학적 차원에서 결정된다. 추장의 중재적 기능은 반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행위와는다른 영역에서 발휘된다. - P49

문화는 문화가 기초하고 있는 것ㅡ교환의 우위를 정확하게권력 속에서 그러한 기초를 부정함으로써 확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가 권력의 영역에서 "기호들"의 교환가치를 제거함으로써 여성, 재화, 말로부터 그들의 교환되는 기호들로서의 기능을 뺏는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이들 요소는 소통의 차원에서 떨어져 나와 순수한 가치물로 파악되는 것이다. 언어의 위상은 기호의 상태에서 - P60

가치의 상태로의 이러한 전환을 암시한다. 즉 고립된 상태로 이어지는추장의 이야기는 기호라기보다는 가치물로서 단어를 사용하는 시인의 언사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교환 요소들의 탈기호화, 즉 탈의미작용과 가치화라는 이중의 과정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은 문화가 문화의 여러 가치에 대해 지니는 애착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이 교환의 요구에 구애받지 않고 기쁨의 충만함에 이를수 있었던 신화시대에 대한 희망과 향수를 표현하는 것일 터이다. - P61

그들은 모계 혹은 부계의출계 선을 따라 결합된 몇 개의 확대가족으로 구성된 외혼 단위이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단위로 존재하고 기능하기 위하여 그들이 내포하고 있는 요소들이 일정한 "작용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민족지적 전통은 이들 공동체들의 자율성, 정치적 독립, 인디언 문화 특유분리적 경향을 지나치게 강조해왔다. 이러한 견해로부터는 비교적상호 적대적이고, 매우 잘 발달된 전쟁의 모델을 통해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밀폐된 용기와 같은 소규모 사회의 상이 등장한다. - P79

투피남바 공동체는 열대림의 다른 집단에서는발견할 수 없는 단계로까지 정치적 관계의 문제를 끌어올렸다. 즉 다多동족 구조의 공동체는 "중앙집권화된 권위를 지니는 동시에, "지방적인" 하위 추장을 온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의 "장로회의"는 아마도 이러한 권력의 이원성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고 추장의 권위 행사에는 이 회의의 승인이 필요하였다. 여러 투피 - 과라니족의 정치적 공간은 때때로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결합되어 있어 같은 문화권의 다른 종족 집단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복잡한 정치적 문제틀을 지닌다는 점에서 다른 집단과 구별된다. 그런데 여러 투피족들은이 정치적 공간의 확장을 다원적 동족으로 구성된 마을 공동체의 형성에 한정하지 않고, 삼림 지역의 여기저기에 단일 마을의 범위를 크게넘어서는 권위의 모델을 구축하는 경향을 발전시키고 있는 듯하다. 남아메리카 인디언의 호전적인 기질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시사하는 것 - P94

과는 달리 부족 간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긴밀하고 항상적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때때로 매우 멀리 떨어진 집단 사이에서 긴밀한교역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많은 학자들, 예를 들어 레비스트로스나 메트로가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투피족의 경우에 이것은 단순한 교역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마을에 대한 몇몇 추장의권위 행사와 관련된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토적, 정치적 확장의 문제이다. - P95

과라니족에 대해 고찰할 때는 다음과 같은 기초적인 사실을 수용해야 한다.
1) 기록 작가의 대략적인 추정으로부터 연역해낼 수 있는 "인구 추계는 옳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수치 수준에서 일치를 보인다는 점에서 서로 일관성을 지닌 그들의 계산은 추계의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이것은 전통적 인구론이 과학적 엄밀성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는것을 보여준다. 로젠블랙, 스튜어드, 크로버 등이 왜 증거와는 반대로하나같이 인디언 인구를 가장 낮게 잡았는지 의문스럽다.
2) 정치권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차후에 광범위하게 다룰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음만을 지적하고 넘어 가겠다. 즉 25~30명으로 이루어진 - P124

이동 수렵민 무리를 이끄는 구아야키족의 지도자나 차코 지방의 100명정도의 전사 조직의 지도자, 그리고 수천 명의 남자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임하는 투피-과라니족의 지도자, 위대한 음부루비차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 곧 질적인 차이가 있다.
3) 그러나 본질적인 초점은 백인 도래 이전의 인디언 인구의 문제전반과 관련되어 있다. 멕시코에 대한 버클리 학파의 여러 조사와 안데스에 대한 바슈텔의 조사는 동일한 결론(과라니족의 인구가 많고 인구밀도가 높다는 강력한 가설)에 도달하였다. 단 양자 모두 이른바 고문화를 대상으로 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삼림지대의 원주민 집단인 과라니족에 대한 우리의 온건한 고찰도 이 연구들과 완전히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즉 삼림지대의 주민들도 인구가 많았고 인구밀도가 높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쇼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보라와 쿡의 연구 결과는아메리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완전히 수정하도록 하였다.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에 대해 리베가 추정한 4,000만 명이라는 인구수치는 과장된 것이 아니며, 8,000만 명 또는 아마 1억 명의 인구가 살았을 수도 있다. 정복에 의한 재앙은 […) 라스 카사스가 말한 대로엄청났다." 우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결론이 이로부터 도출된다. "16세기의 세균의 충격으로 인류의 거의 4분의 1이 소멸되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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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3 - 후한.삼국 시대.오호십육국.위진남북조 : 군웅과 패자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3
진순신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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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의 중심 이야기가 초한전쟁의 결과에 따른 한의 역사였다면 3권은 수많은 왕조가 교체되어 어느 하나 특징지어 사건을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최초의 통일 왕조였던 진나라가 짧은 시일 만에 무너지고 한나라가 들어섰으나 무제 사후에는 외척이었던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고 신나라로 교체된다.
왕망은 복고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과거 주나라 때로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상만을 앞세우고 현실을 보지 못한 탓에 권력을 붙잡고 있었던 호족들은 반기를 들고 일어선다. 게다가 백성들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니 비적이 된다. 왕망은 이 상황에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왕망이 물러나고 후한 시기에 접어들었으나 광무제 이후에는 사실상 황제들이 제 구실을 하지 못했고 외척과 환관 세력이 주도권을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짧은 시간 안에 무려 7왕조가 바뀐다(화제-상제-안제-순제-충제-질제-환제).

순제는 환관들의 도움을 구해 황제에 오른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양씨가 황후에 오른 뒤 그 일족은 권력을 믿고 횡포를 부렸다. 그 중심에는 황후의 오빠인 양기가 있었고 이후 즉위한 환제는 양씨 일족을 견제하기 위해 환관을 끌어들인다. 이 무렵 환관이 양자를 들여 권력 계승이 가능해지고 사람을 추천할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본래는 가장 넓은 층인 사인 계층에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했을텐데 그들은 외척과 환관들 사이에 끼어 주요 무대로 진출하기 힘들어졌다.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나타내듯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여 지방은 어지러워지고 조정은 십상시가 난을 일으키니 중앙마저 초토화된다. 이 무렵 지방의 군벌들이 하나 둘 등장하는 것이 삼국지 배경의 시작이다.

삼국지는 초반부터 동탁, 조조, 원소 등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압도한다. 초한지는 유방과 항우를 중심으로 놓고 양강구도로 가기 때문에 전투 중심으로 보게 되어 단순한 구조인 반면 삼국지는 전투들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만큼 그 구조가 복잡하나 인물들이 많아서 캐릭터를 분석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삼국지는 읽을 때마다 주목하는 인물들이 달라지는 경험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자신의 상황과 이전의 경험에 맞춰서 그 인물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도 처음 읽었을 때는 유비,관우,장비 삼형제 중 유비의 현덕함에 끌렸었는데 다음에는 관우, 그 다음에는 제갈량, 조조 이런 식으로 매번 바뀌었었다. 아마도 인물별로 개성이 워낙 뚜렷해서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듯 싶다.

어쨌든 이런 여러 군웅들 중 삼국(위/촉/오)로 결국 압축되었다. 이 시기 황제의 권위는 유명무실했고 헌제는 조조의 아들인 조비에게 권위를 선양(220년)하면서 후한 시기는 끝이 난다. 황실의 일원이었던 유비가 익주에서 촉한을 건국하였으나 40 여년밖에 유지하지 못한 채  한나라는 멸망하였다.

분열의 삼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급속히 무너진 서진이 화북에서 힘을 잃고 강남 지방으로 내려간 사이 화북에서는 여러 민족들이 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오호 십육국 시대의 시작이다.

여기에서 5호는 흉노, 선비, 갈, 강, 저 등의 다섯 민족을 뜻한다(갈은 흉노의 한 갈래이고, 저와 강은 티베트계 민족). 16국은 이들과 한족을 포함해서 화북 지방에 세운 수많은 나라들 중 주요 16국을 뜻한다. 16국 중 전량, 서량, 북연은 한족 왕조에 속하며 나머지 13국이 이들 다섯 이민족이 세운 국가다. '16국'은 화북 지방에 있던 '북조'의 수많은 국가들을 묶은 것이고 강남 지방의 '남조'는 한족 왕조인 동진이 있었다.
'호(胡)'란 한족에서 보면 이민족을 뜻하는 말인데 그것이 멸시하는 칭호였으므로 이 시대에는 사용을 금했다. 최근 중국에서는 이 시대를 '동진십육국'으로 표현하는 일이 많다. 남쪽은 동진이고 북쪽은 여러 나라의 십육국이므로 전국적인 명칭이 된다. 화북 상태만 가리키는 오호십육국보다는 시대 명칭으로서 적당하지만, 이 시대 말기에 남쪽은 이미 동진이 아니라 송(宋)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런 점에서는 조금 문제가 있는 명칭이다. - P370

흉노의 대수장이인 유연은 308년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한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정권을 수립한다. 흉노는 더는 유목국가가 아니고 중원국가임을 선언한 것이다. 선비족도 단석괴라는 걸출한 인물이 출현하면서 국력을 키웠다. 위진(魏晉) 시기에 선비족은 모용, 우문, 걸복, 탁발, 단 이렇게 다섯 부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유연이 세운 한이 무너지고 흉노의 여러 부도 세력이 갈리어 화북은 동으로는 선비족, 서쪽으로는 저와 강 같은 티베트 계통의 민족이 병립하는 상태가 되었다. 선비 모용부 왕조는 국호를 연(燕)이라 칭했 오호십육국 시대를 매듭지은 것은 이 가운데 탁발부였다. 갈족의 지도자는 석륵(石勒)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가난하고 문맹이었으나 정치는 훌륭했다고 한다.

화북 지방에 있던 사람들이 대규모로 남쪽에 정착하면서 혼란이 찾아왔다. 내가 사는 땅에 누가 들어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안 그래도 먹고 사는 일이 어려운데 토착 세력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 같다.
보통 새롭게 찾아온 사람들은 토착민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차별을 받는다. 하지만 이 시대의 새내기들은 중원의 높은 문화를 몸에 익힌 사람들이었다. 토착민들보다 훨씬 고도의 지식을 가진 계층이 적지 않았다. 새로 온 사람들이 오히려 토착민을 멸시하는 분위기였다. 토착민이 그것에 반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P418

오, 동진, 송, 제, 양, 진. 삼국 이래 강남땅에 이 여섯 왕조가 흥망을 거듭했다. 오나라의 손권이 황제를 칭한 229년부터 진나라가 멸망한 589년까지 360년 동안을 '육조 시대'라고 부른다.

육조 시대를 귀족사회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귀족사회라고 하면서도 중요한 때 세상을 움직인 사람은 실력을 갖춘 군인들이었던 것이 육조 시대의 참모습이었다. - P421

삼국 이후 중원이 어지러워지자 중국 정권의 힘은 서역에 미치기 어려웠다.

화북 땅을 거의 통일한 전진의 부견은 비수전투에 패하여 남정에 실패하면서 정권이 붕괴되었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몰리면 언제나 이렇게 위험하다. 북위의 선비 탁발부는 부견을 거울 삼아 장기정권 유지에 힘을 쏟았다. 부, 낙, 족의 유력자를 가능한 그 조직에서 떼어 놓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행정을 처리하도록 한 것이다. 북위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 화북을 통일하였고 화남의 송왕조와 천하를 양분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 때 북위가 서방으로 진출하면서 불교가 유입된다. 낙양 천도 후 북위는 한화에 힘을 쏟았다. 선비족 언어와 성씨, 풍습을 금지하고 한족의 문화를 따르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북방의 고유 문화는 한화에 밀렸고 중국은 중화사상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어느 역사나 복잡한 시기가 있지만 거의 500 여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 복잡한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다니 놀라웠다. 자고 일어나면 왕조가 바뀐다고 할 정도라고 해야 할까.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삼국지 시대는 나관중이 소설을 써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읽히는 등 자료가 남아 있지만 특히 위진남북조 시기의 역사는 자료도 빈약하고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듯해서인 것 같다. 어릴 적 세계사 수업을 받을 때도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기가 있었다.' 간략하게만 말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났다. 너무 소략해서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읽으면서도 궁금증이 더 커졌고 좀 더 세밀하게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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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코페르니쿠스와 야만인

정치권력은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것에 내재하고 강제적 권력과 비강제적 권력의 형태로 나누어져 있다.
강제로서의 정치권력(명령과 복종 관계)은 특수한 사례(서구문화)에 불과하다. 이 권력 양식으로 다른 양식을 설명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정치제도가 없는 사회에서도 정치적인 것은 존재하며 권력의 문제는 나타난다. 정치권력은 사회생활에서 필연적으로 기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권력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
정치인류학의 한계와 미래는 오리엔탈리즘하고도 이어지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민족학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원시 문화들을 서구 문명을 중심으로 이른바 구심운동을 하는 대상으로 간주해왔다. (진정으로 고대적 사회에 대해 우리사회가 아닌 고대적 사회의 실제에 맞는 담론을 만들기 원한다면) 시각의 완전한 전복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정치인류학이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정치인류학은 원시사회들의 한계보다는 정치인류학 자체의 내부적 한계, 즉 서구 그 자체가 인류학에 새겨놓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정치인류학의 권력에 대한 성찰이 그것이 탄생한 대지의 인력으로부터 벗어나 사고의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을 쩔쩔매게 하는 자연사의 사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태양 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아마도 타자의세계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세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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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풍경 - 문자의 탄생과 변주에 담긴 예술과 상상력
이승훈 지음 / 사계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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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는 어렵다. 왜 어려울까. '외운다', '외워야 한다'는 압박이 있어서가 아닐까. 몇 년전 한자능력검정시험을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시험 결과는 참패였으나 시도를 한 것만으로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무렵 대체 왜 한자에 꽂혔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한국사를 공부하고 고문헌에 등장하는 수많은 한자를 사전을 찾지 않고도 읽어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겨서였던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 등 한국사의 기본적인 문헌들은 번역화되어 온라인에서 제공되고 있으나 고려 시대 이전의 역사일수록, 그리고 국가의 기록이 아닌 개인의 기록일수록 번역이 되어 있지 않거나 번역이 되어 있다고 해도 일부는 사전을 찾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 신문이나 기사 같은 경우에도 이미지만 제공되는 경우가 있어 한자를 모르면 읽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국의 '사서'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한자능력검정시험에서 고배를 마시고 회의가 찾아왔다. '내 수준이 이렇게 처참한가? 내가 너무 호기를 부렸나?' 그랬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 시험을 위한 공부는 역시 부담이 되기도 하고 내 스타일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때문에 공부 방식을 바꾸었다. 고전을 읽는 것을 목표로 한 뒤 한자의 원리와 부수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사자소학, 추구, 명심보감, 천자문,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이렇게 공부를 이어간 것이다. 중용은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중단하고 지금은 역사서인 통감절요를 읽고 있다.

이 책은 최초의 한자가 시작된 시기부터 한자가 지금의 문자로 오기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다. 제목을 보고 의아했다. 언뜻 생각하면 '한자의 역사' 또는 '한자의 기원' 이런 제목을 써도 무방한데 왜 '한자의 풍경'일까. 서문에 그 답이 있었다.

풍경(風景)은 한눈에 보이는 자연의 모습을 말한다. 여기에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포함된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 경치에는 풍경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풍경이란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 그 자체를 나타내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연 경치를 나타내는 이 단어에 風 자가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
갑골문 風 자를 보면 처음부터 바람을 나타내는 글자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風 자는 머리에 장식을 하고 깃털이 많은 봉황새의 모습이다. 지금의 봉 (鳳) 자와 같은 글자였다. 이 글자는 사방(四方)을 다스리는 바람신들이 데리고 다녔던 새를 표현한 것이다. 공기의 기압 차로 바람이 생기는 현상을 알 리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바람이란 바로 이 바람신들이 불어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신들이 데리고 다닌 새를 나타내는 鳳 자로 바람을 표현했다. 한자를 만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표현할 때 그것의 형태나 속성에 매몰되지 않고 발상의 전환을 통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지식이 늘어나고 바람신에 대한 숭배도 시들해지면서 글자 한가운데에 벌레 충 (蟲) 자가 들어간 지금의 초라한 風 자가 만들어졌다.
이런 사연을 가진 風 자는 그래서 자연 상태의 바람을 나타내기보다는 인간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는 데 더 많이 사용된다. (...) 풍경이란 바람 부는 날의 경치가 아니라,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부지런히 다니던 신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 된다. - P005~006

풍경은 사람의 시선이 포함된 단어다. 저자는 한자가 지금의 모습이 갖추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독자의 시선이 따라가며 이해하는 과정을 생각해 '풍경'이라는 단어를 고른 것 같다. 참 멋진 단어를 선택한 듯 싶다.

책에는 신석기 시대 토기에 새겨진 도형화된 무늬부터 거북이 등껍질 같은 동물의 뼈에 갑골문을 새긴 사람들, 청동기 시대 신에게 기도하고 제사를 위해 문자를 새기기 시작한 주나라 사람들, 최초의 행정적 문서 체계를 완성한 진나라 사람들, 목간과 죽간에 글자를 기록하다 종이라는 매체를 발명하여 기록하게 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풍경처럼 펼쳐진다.

대부분의 문자는 구체적인 사물을 형태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여 복잡한 개념을 표현하는 것으로 발전해가지만 사물과 개념에 대응하는 글자를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문자는 사물에 대응하는 표의기호에서 표음기호로 변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한자는 다른 문자와 달리 표음기호가 아닌 원래의 표의적 기능을 유지한 유일한 문자이다. 그래서 한자는 소리가 아닌 시각적인 이미지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개념을 글자화하기에 난관에 부딪힌다. 이미지화한 수많은 글자를 기억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화적(이미지)으로 구성된 한자에 표음적 기능이 추가된 형성자가 추가되었다.

최초의 한자 문자라 할 수 있는 갑골문은 사물의 형태를 나타내는 상형문자, 개념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표의문자, 음을 표시하는 형성문자로 구성된다. 오늘날의 한자의 구성 원리의 대부분을 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상형자, 회의자, 형성자만으로 뜻을 표현할 수 없는 경우 가차자(대명사나 각종 부정사 같은 요소에 발음이 유사한 글자를 빌려와 사용)를 쓴다.
갑골문의 자획은 대부분 직선으로만 구성되며 곡선은 거의 찾기 어렵다. 당연하다. 뼈에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하여 글자를 새겨야 하니 곡선은 긋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죽간에 붓을 사용하여 글자를 새기기도 했으나 뼈나 돌에 새기는 것보다 오래 유지되지 못했기에 뼈나 돌이 더 많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갑골문의 모양을 보면 한자가 쉽게 유추된다. 그래서 항상 궁금했다. 왜 현대의 한자는 갑골문과 달리 모습이 이렇게 달라졌을까. 서체의 발전에 따라 한자는 점차 간소화될 필요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오히려 예전의 기원을 찾기 어려워진 탓이다.
금문 시기까지만 해도 한자의 모양을 보고서 글자를 어느 정도는 유추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자는 사실 한자 모양만 봐서는 쉽사리 유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외워야 하는 압박이 생기는 것일까.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고 행정 체계를 갖추면서 많은 양의 문서가 생산되었다. 그런데 각 지역의 문자들이 달라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진시황은 통일된 서체를 개발하도록 명령한다. 승상 이사가 이전에 사용하던 주문이라는 글자체를 기반으로 좀 더 간략화된 문자인 소전(小篆)을 만든다. 이렇게 소전체는 한나라 초기까지 행정용 문서체로 사용되었다.
소전의 자형은 세로로 길쭉하고 모서리가 부드러우며 필획 두께가 일정하다. 또한 글자가 모두 균등한 크기로 질서 있게 배열되었다. 소전을 쓸 때는 모필의 한가운데 힘을 준 상태로 처음부터 끝까지 균등한 획을 긋는 중봉(中峯) 기법을 사용한다. 이처럼 각 획의 일정한 두께 덕분에도 도장을 새길 때 편리했다. - P407
소전체는 일정한 글자체로 대칭적이라 후대 전각이나 도장에 널리 사용된다.
그러나 붓을 잡은 손에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힘을 주어야 하는 중봉 기법은 많은 양의 문서 작성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이 때문에 공식적인 문서에는 소전체를 사용했으나 일반적으로는 예서체를 사용했다고 한다.
소전이 세로로 긴 직사각형 형태라면 예서는 옆으로 퍼져 가로로 넓은 직사각형 형태이다. 소전의 글자 모서리가 둥글다면 예서는 곧게 펴진다. 소전이 글자 전체를 감싸는 필세로 구성되었다면 예서는 글자의 마지막 부분이 독립적으로 갈라져 날아갈 듯한 파책이라는 독특한 삐침 양상을 보인다. - P420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의 특징은 예서에서 비롯되었다. 소전체는 이전의 회화적 요소가 남아 있으나 예서체는 오늘날의 한자처럼 완전히 기호화된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해서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서체이다.
해서의 가장 큰 특징은 파책으로 구현된다. 가로획의 오른쪽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간 것이다. 세로획은 예서와 큰 차이가 없다. 예서는 좌우대칭을 원칙으로 하지만 해서는 오른쪽 파책을 강조하기 때문에 대칭이 무너진다. 전서와 예서는 붓을 곧추세우고 붓의 중심이 선획의 중심을 통과하는 중봉이라는 서법을 유지하지만, 예서에서는 가로획을 쓸 때는 파책을 강조하여 중봉이 흐트러지고 붓을 옆으로 대고 모나게 꺾는 잠두연미를 만들어낸다. 해서는 가로획의 오른쪽 끝을 오른쪽 위로 치켜 긋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잠두연미로 표현되는 예서의 오른쪽 끝부분과 차이가 난다.
해서의 대표 주자는 왕희지다. 왕희지 필법은 서예를 하는 사람 치고 모르는 이들이 없다. 그만큼 유명한데 정작 그의 해서체 예술작인 「난정서」는 원본이 없고 모사본만 존재한다는 것이 안타깝다.


몇 차례 서예 전시를 가고 서예를 잠시 배우기도 하면서 한자의 수많은 글자체를 보며 매혹을 느꼈다. '전각'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가 전시를 하나 둘 보면서 그 오묘한 세계에 빠져들기도 했었고(전각의 대가인 오세창, 김태석) 방학 기간 한달 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一(한 일)'자만 미친 듯이 연습했던 기억이 난다. 다른 학우들과 선생님께서 쓴 글씨를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금석학의 대가였던 김정희를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다(중국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간략하게 책 소개를 이 정도로 마치고자 한다.

이 책은 놀랍도록 재밌는 책이다. 5백여페이지가 순삭되는 체험을 했다고나 할까. 뒷페이지가 궁금해서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들 정도였다. 보통 인문 책의 내용 특성상 어렵게 쓰기는 쉬워도 쉽게 쓰기는 참 어렵다. 그런데 저자의 내공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술술 잘 읽히는 책이다. 읽는 내내 즐거웠고 마지막까지 흡족했던 책이었다. 아마도 이 책은 올해의 책에 반드시 들어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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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5-30 0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왓 벌써 완독하시다니!! 아침에 저도 잠시 이 책을 읽다가, 혹시 화가님은 연휴에 이 책을 폭풍독서 하신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말이예요!!
화가님 역시 재밌어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문공부 역사가 깊으시군요. 역시 성실의 아이콘👍

거리의화가 2023-05-30 11:31   좋아요 2 | URL
네. 어제 집어들었는데 술술 읽혀서 하루만에 완독했습니다^^ 연휴에는 폭풍독서죠! 비도 추적추적 와서 어디 나가기가 귀찮기도 하고ㅎㅎ
읽기 참 잘한 책입니다. 재밌고 유익하고 두 마리 토끼 다 잡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흐흐. 한문공부 본격적으로 한 것은 얼마 안됩니다. 헌데 여전히 아는 글자는 몇 안되는 듯요. 자주 나오는 글자만 익숙해지는 정도요. 휴... 반복만이 살길이다! 이런 생각으로^^;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3-05-30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물이나 자연의 모양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만들어 내는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학교 다닐 때 한자 획수와 부수로만 외우는 공부가 싫었는데 이런 책을 통해 공부하면 재미 있을 것 같아요.
거리의화가님께서는 언제나 폭풍독서를 실천하시네요^^

거리의화가 2023-05-31 09:43   좋아요 1 | URL
사실 외우는 입장에서는 모양을 따 와서 한자로 만든 글자가 이해하기에는 훨씬 수월하지만 역시 모든 개념과 사물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죠. 한자도 그래서 상형자는 몇 개 되지 않고 형성자, 회의자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게 된 이유인 듯 합니다. 이 책은 재미가 있어서 읽는 데 부담이 없었어요. 저도 외우는 게 싫어서 한자 공부가 싫었었던 것 같아요. 이제야 조금씩 저만의 공부 방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레이스 2023-05-30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한자의 역사와 비교해 보고 사려구요.
좋다 하시니 사는 쪽으로!

거리의화가 2023-05-31 09:44   좋아요 1 | URL
ㅎㅎ 네. 잘하셨어요^^ 뭐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죠. 제 생각에는 그레이스님도 흥미롭게 읽으실 책일 듯 싶습니다^^

희선 2023-05-31 0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예를 배우기도 했군요 저는 학교 미술 시간에 잠깐 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다시 생각하니 미술 시간 맞는지 모르겠네요 한문, 그런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벼루 먹 붓 그런 것도 다 샀던 게 생각납니다 시험 보려고 하는 공부보다 알고 싶은 걸 알아가는 게 더 재미있죠 그래도 공부한 게 아주 도움이 안 된 건 아닐 것 같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5-31 09:46   좋아요 0 | URL
서예가 미술의 한 분과라고 생각한다면 서예 빼고는 관심 가는 게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나마 서예는 글자를 쓰는 것인데다가 다양한 글자체를 보는 재미도 있어서 좋아했네요. 다만 이제는 붓을 놓아서 방법도 다 까먹어 하려면 다시 시작해야할 듯합니다ㅋㅋ 뭐든 알고 시작하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은오 2023-05-31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초등학생때 자녀가 한자 급수 따게 하는 게 약간 부모님들한테 유행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래서 부모님의 권유(?) 강요(?)로 문제집 풀고 87654급까지 땄는데 말입니다.... 다 까먹더라고요 ㅋㅋㅋㅋ 고등학교때 한문시간에 하나도 기억이 안나서 내가 초딩때 한건 무엇이었던가!! 하면서 허탈했던 기억이 ㅠㅠ

거리의화가 2023-06-01 09:46   좋아요 1 | URL
앗 진짜요?ㅋㅋㅋ 한자 급수따기 유행이 있었다니 몰랐네요! 음. 역시 급수따기로는 한자가 늘 것 같지 않아요. 시험 치고 땡 아닌가요 솔직히? 그래서 금방 잊어버리는 듯. 언어는 계속 공부해야 하더라구요. 쉬면 도루묵되버리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