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구조주의 기능주의와 달리 토템 현상을 어떤 실질적인 기능, 유용성, 필요에 입각해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어떤 상징적인 것으로서,
문화를 떠받치는 틀, 구조, 객관적 선험으로서 해석한다. 따라서 토템은 해당 부족과 사실상 어떤 실질적인 연관성도 가지지 않는다. 기존의 모든 해석이 토템과 해당 부족의 실질적 연관성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다는 점에서, 이런 시각은 획기적이다. 토템이란 그 부족을 상징하는 특정한 기의를가지지 않는 순수가표일 뿐이다. 이 기표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그 기표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표가 다른 기표에 대해 가지는 차이, 달리말해 특정한 기표들의 체계에서 그것이 점하고 있는 위치에 있다. 이는 곧하나의 토템은 그 자체가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토템들과 맺는 관계, 토템들의 체계에서 그것이 다른 것들에 대해 가지는차이. 그 체계에서 점하는 위치에 따라 의미를 가짐을 뜻한다. - P444

구조주의는 의식적 주체의 바깥으로 나아가 사유했지만, 이제 그 바깥의 바깥에 주목함으로써 후기 구조주의 사유들이 도래하게 된다. 구조주의에서 주체는 구조 내에 용해되어버리지만, 구조의 바깥은 주체에게 구조로부터 탈주하고 나아가 그것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제공한다. 그러나 주체가 탈주해서 나아갈 바깥은 구조의 바깥이 아니다. 그 바깥은 구조로서의 바깥과 마치 웜홀에서처럼 통해 있는 구조 내의 바깥, 바깥의바깥이다. 그러나 바깥의 바깥은 바깥 너머로 뻗어가기보다 구부러져 안으로 이어진다. 주체가 찾아내야 할 바깥은 구조의 바깥이지만, 그 바깥은 오히려 그 자신과 닿아 있는 가능성이다. 주체는 이 가능성의 지점에서 솟아오르는 사건을 자신의 주름으로 바꾸면서 주체화해간다. - P448

칸트가 실재를 현상의 뒤편으로 물린 데 반해, 현상학은 그 뒤편을 접어두고 현상 자체의 실재성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것을 관념들로써 먹어치우고자 한다면 주체는 구토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에서의 이 실재성은 어디까지나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서의 객관이며, 의식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드러날 차원이다. 반면 구조주의에서 의식과 대상은 공히 그 근저의 추상공간구조에 입각해 바로 그런 관계를는 것으로 이해된다.
때문에 양자에게서 ‘의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 현상학에서의미노에마는 주체와 객체가 겹쳐진 곳에서 생성되어 나온다. 이겹쳐진 곳, 주름은 신체의 차원인 동시에 지각된 것의 차원이다. 신체는 이양자가 겹쳐진 생생한 경험의 장에서 성립한다. 현상학이 이룩한 큰 개념적 혁신은 근대적 신체 개념의 한계를 타파하고 완전히 새로운 신체론을정립한 점에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 사유에서 신체는 다시 증발되어버린다.
합리주의적 사유인 구조주의에서 신체는 언어에 자리를 내준다. 신체의 차원은 ‘이미지‘이며 ‘기표계’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의미는 추상공간의 요소들이 계열화됨으로써 성립한다. - P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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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의 끝에서 사유하는 자아("ego cogito"), 사유활동(cogitatio)을 발견했다면, 후설은 판단 중지를 통해서 "현상학적 잔여로서의순수의식" (선험적 의식, 순수 자아, 선험적 주체)을 발견했다. 바로 지향적 체험을 실행하는 의식/주체이다. - P360

메를로-퐁티 (1908~1961)는 경험주의와 주지주의(합리주의)는 공히 이현상학적 세계를 만족스럽게 파악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경험주의 예컨대행동주의는 행동에서의 주체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오로지 기계적인자극-반응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행동을 단순한 요소들로 분석하고 그것들을 연합해서 설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넓게는 유기체의) 행동은 대상의 속성과 주체의 의도가 섞여 있는 곳, 즉 세계와 주체가 겹쳐져 주름을 형성하는 곳인 신체-주체에서 성립한다.2) 주지주의는 이 현상학적 장을 어떤 순 - P367

수한 개념들로 환원하고자 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이런 주지주의의사유는 인간의 삶이 철저하게 육화된(incarné) 것임을 망각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추상적인 개념들의 이런 환원은 인식과 실존 사이에 깊은 골을드리운다. 물론 인간은 상징 수준의 의미작용을 살아간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일반적인 언어의 의미작용은 어디까지나 육화된 차원에서의 의미작용으로부터 몸의 파롤로부터 변형되어 나온 것임을 역설한다. 신체의지각은 언어로 추상화되기 이전에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표현‘인 것이다 - P368

현존재는 존재의 목동이며 무의 자리지기이다. 존재의 ‘말 건넴‘은 그 열려있음 안에 들어서있는 현존재에게만 들린다. 그러나 일상성에서의 현존재는 이 말건넴에 등을 돌리고 세상에 빠져있다. 불안은 이 현존재를 그의 세계내존재자임으로 끌어당긴다. 불안 속에서 현존재의 존재가능도 분명해진다. 현존재의 존재가능은 곧 ‘자기를 앞질러 -감‘, 다시 말해 (허공을 향해 앞질러가는 것은 아니므로) 언제나 이미 세계-내에 존재하면서-자기를 앞질러-감이다.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를 하이데거는 ‘심려(心)‘로 파악한다. 현존재 특유의 모든 행위는 결국 이 심려에 근거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 P397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불안을 가리려 할 때, 즉 자기가 자기를 결정된 존재로서 스스로를 설득하려 할 때 ‘자기기만(자기 속이기)‘이 성립한다. 그런데 이 경우 자기가 자기의 불안을 잠재우려면 자기의 불안을 명확히 직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 자기 속이기는 타인 속이기와 다르다. 타인 속이기(‘거짓말‘)는 스스로는 진실을 알면서 타인에게는 거짓을 말해야만 성립한 - P418

다. 그러나 자기 속이기에서는 진실과 거짓이 하나의 통일된 의식 안에서혼효한다. 자기기만은 의식의 ‘반투명성‘에서만 나타난다. - P419

도달한 곳은 상반된 지점들이었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공히 현상학자들로서 ‘현존재‘를, ‘인간존재‘를 사유했지만, 하이데거 사유가 존재에 닻을 내린다면 대조적으로 사르트르는 의식/주체성에 닻을 내린다. 하이데거의 사유가 존재와 현존재의 사유라면, 사르트르의 그것은 의식= 대자와 즉자의 사유이다. 하이데거에게 현세계는 존재가 드러나고 숨는 장으로서, 인간은 이 장에서 철학과 시를 통해 존재를 향할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현세계는 대자적 주체가 무로부터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나가야 할 장이며, 인간은 이 장에의 앙가주망을 통해 그것을 바꾸어나갈 수 있다. 하이데거가존재에로 경사된 그의 사유를 통해 현실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을때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존재의 빛을 특정한 민족에 결부시켰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위험이다. 이런 경사를 품지 않았던 사르트르의 정치철학은 보다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주체철학에서는 존재에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끊겨버린다.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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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 쇠락하는 산업도시와 한국 경제에 켜진 경고등
양승훈 지음 / 부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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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제조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나라로 지금도 여전히 제조업 강국으로 통한다. 울산은 대표적인 제조업 도시인데 그런 울산이 무너지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울산의 현재를 진단하고 과거는 어떠했으며 미래는 어떨 것인지 예측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사회 문제에 멀어지지 않기 위해 매일 신문을 챙겨 보고 주간지를 구독한다. 덕분에 한국 산업의 문제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불균형성, 나아가 원청과 하청 근로자 간의 차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있다. 


만약 이 책이 울산의 현재를 바라보고 문제점만을 진단했다면 다른 책들과 별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이 가진 차별점은 울산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기까지의 역사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 나름의 분석을 통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전개부터 흥미를 끌어들인다. 2030년 울산의 모습을 통해 미래를 그려보고 이후 울산의 역사를 훓은 뒤 울산의 현재를 여러 장에 걸쳐 진단하는 방식이다. 


2030년 울산의 미래는 암담하다. 정년 퇴직을 한 노동자들로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정규 일자리가 없어서 비정규직을 전전한다. 여성 구직자의 문은 애시당초 좁은 문이라 말할 것도 없다. 


철강, 자동차, 조선 3대 산업을 대표하는 울산의 시작은 과연 어떠했을까. 나는 당연하게도 1960년대 국가의 주도 하에 공공 프로젝트로 공단이 들어서면서 시작되어 현대 정주영 이하 인력에 의한 개발 노력으로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시작이 일제강점기가 시작이고 그것도 일본인의 주도 하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최근에는 지역사 연구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연구자를 제외하고 애써 찾아보지 않으면 지역사는 잘 알기가 어렵다. 나조차도 그렇다. 아무튼 잡설이 길었는데 울산은 이케다라는 일본인에 의해 태평양전쟁을 위한 공업도시이자 석유 비축기지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저자는 공업도시 울산을 이해하려면 그 시작이 어떠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공감하는 바였다.


울산은 ‘공업항, 어항, 연락항, 무역항, 공항‘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분류됐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 엮으면 일본의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울산의 역할이 중시됐음을 알 수 있다. 이케다의 구상 아래 당시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전투기의 급유지로 울산을 선택했다. 급유를 한 후 다시 전투기를 띄워 중국 또는 러시아와 교전 지역인 만주와 연해주 등으로 바로 출격할 수 있는 중간 기착지였던 셈이다. 물자는 배를 통해, 인력은 기차를 통해, 전투기는 바다를 통해 움직일 수 있는 울산. 모든 것을 병참기지로서의 기능에 최적화해 설계했다고 말할수 있다. - P50~51


울산이 왜 하필 선택되었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설들이 존재한다. 앞서 보았던 입지적으로 유리했기에 선택되었다는 설 이외에 정유 공장을 준공하고 (멀리 가지 않고 가까이에 공급하는 것이 유리하므로) 석유화학단지 건설로 출발했다는 설, 그 외에 정주영을 비롯한 기업가들이 사업성을 보고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정치적인 동맹을 맺어 진행했다는 설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결국 이 설들이 복합적으로 엮이면서 공업 센터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국가 주도적으로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부터 울산에서는 '공부 못하면 공장 가면 되지.'가 가능했다. 게다가 울산의 산업 노동자들은 IMF 이후 여러 번의 노조 투쟁을 거쳐 정규직 노동자들의 급여 수준은 많이 올라갔다(일부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이들을 '황금 노조'라 부르며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짐작하겠지만 정규직 노동자에 한해서 그런 것이다. 그보다 훨씬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하청 노동자들의 급여 수준은 정규직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하마스 전쟁을 비롯한 국제적 요인, 국내 불경기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원자재값이 상승하고 투자나 소비 심리가 위축된 지금 제조업은 무사할까. 기업이 현재에 안주해 투자하지 않고 정규직도 신입이 아닌 경력직으로만 채운다면 과거 혁신을 주도해 성장할 수 있었던 결과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울산은 연구개발과 설계 조직이 수도권 등으로 다 옮겨 가고 생산 단지마저도 떠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거 생산 현장과 연구 개발이 한곳에 있어 실시간 협업이 가능했던 것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다(실제로 한국조선해양은 판교에 연구소를 세움). 물론 요즘 세상에 단지가 따로 존재해도 협업은 가능하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산업이라면 몰라도 제조업은 실제 장비들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테스트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원격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울산에 필요한 전문 산업 인력을 육성하기 위해 세워진 울산과학기술대(UNIST)는 시민의 기대도, 산업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으면서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다. 기업은 신규 인력은 꺼려 하는 동안 일자리가 없는 우수한 엔지니어들은 수도권에 눈길을 돌리는 악순환이 펼쳐지고 있는 형국이다. 

남편을 따라 온 여성들도 일할 곳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생산직 일자리에서 배제된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밀려나있거나 생산직이 아닌 서비스업에서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한다. 


저자는 울산의 미래를 제시하며 스마트 주력 산업을 고도화시키거나 데이터 센터를 포괄하는 4차 산업 혁명을 이끄는 신산업의 육성을 꺼내든다. 이를 위해서 예시를 든 것이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피츠버그의 두 산업도시였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두 도시는 대표적인 미국의 산업 도시로 쇠퇴를 겪었으나 한쪽은 살아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은 제조업 대신 서비스업과 신산업을 통해 도시의 재구조화를 이루어냈다.

그렇다면 울산은 후자의 모델을 따라가야 하는가. 저자는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제조업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응책은 있어야 하지만 후기 산업 모델을 따르면서도 중산층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는 확보가 되어야 도시가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좀 뻔한 책이 아니겠는가 생각했다가 읽을수록 꽤 잘 정리된 책이라 여겼다. 개인적으로 읽으려고 했다면 후순위에 밀릴 확률이 큰 책인데 함께 읽는 책이라 읽을 수 있었다. 올 초에 나온 책인데 이런 책은 시기가 지나면 시의성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덕분에 적절한 때에 읽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필 책 나눔 토론이 있는 날 외근이 잡혀서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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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1-27 0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강, 자동차, 조선에서 두 가지 자동차, 조선은 제가 사는 곳에서도 했어요 그런 일 잘 모르지만 지금은 거의 떠났다는 말 들은 듯합니다 지금 여기는 사람 숫자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느낌 들기도 합니다 예전에 시내라 할 수 있는 곳 가게는 거의 장사를 안 하고 비어 있어요 자동차나 조선 그런 게 사라져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드는군요 중심 지역이 예전과 바뀌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울산과 다르지 않네요 여기는 일제 강점기 때 농산물을 빼앗아가는 곳이기도 했군요 울산과 멀지만 비슷한 까닭으로 여러 가지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전히 아파트는 많이 짓기도 해요 그런 곳에 사람이 살지, 빈 곳이 많지 않을 것 같기도 해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11-28 07:57   좋아요 0 | URL
‘지방소멸‘이라는 개념이 나온지도 꽤 된 이야기인 것 같아요. 이 책에서도 동남권메가시티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거든요.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서 지방 도시들끼리 연합하여 자구책을 여러 모로 마련하는 중인 것 같지만 정책 하나만으로 바뀔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 지자체, 기업, 중앙 정부 등이 톱니바퀴처럼 이해 관계를 맞춰나아가야하는 일이 아닐. 수도권은 수도권대로 임대료가 높아서 가게들이 텅텅 빈 곳이 많아요. 저는 이렇게 해서 과연 한국 제조업의 미래가 있을까 회의적이었거든요. 이 책 덕분에 그래도 조금은 희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님^^
 

~ 6장

니체에게 영원회귀는 스토아적 영겁회귀가아니라 바로 차이생성, 보다 구체적으로는 힘에의 의지의 영원회귀이다. 모든 것은 힘에의 의지라는, 삶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으로 되돌아온다.36)그렇다면 힘에의 의지에로의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추상적으로는 차이생성으로의 회귀이며, 생명/삶의 구체적 맥락에서는 자기 극복을 요청하는 상황으로의 끝없는 회귀이다. - P113

베르그송이 인식론에서의 직관을 보완해서 윤리학/도덕철학의 원리로 제시하는 능력은 곧 ‘창조적 정서(émotion)‘이다.
베르그송에게 창조적 정서는 과학, 예술, 철학 등으로 구체화될 빼어난 직관, 영감으로서의창조적 정서이다. 그것은 아직 악보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작곡가의 마음속에서 장대하게 울려 퍼지는 잠재적 선율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창조적 정서의 가장 위대한 경지는 바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해서 윤리의 새로운경지를 여는 행위의 영웅들에게서 발견된다. 이러한 창조적 정서는 지능이하의 정서가 아니라 지능 이상의 정서이다. "새로운 도덕 이전에, 새로운 형이상학 이전에 정서가 먼저 있고, 이 정서가 의지의 편에서는 약동으로 지능의 편에서는 풀어설명하는 표상으로 이어진다." (MR, 46) 따라서 베르그송에서의 열린 도덕의 근저에는 ‘생명의 약동‘이, 새로운 뉘앙스를 띠게 되는 약동이 존재한다. - P130

의미란 바로 명제에 있어 표현된 것 즉 사건이다. 의미는 말과 사물/사태의 지시관계, 주체와 그 현시물 사이의 현시관계, 그리고 기호들의 변별적차이들의 구조로 해소되지 않는다. 의미의 네 번째 차원, 사실상 이 세 의미론이 바로 그것을 둘러싸고서 성립하는 중심 지점이 존재한다. 의미란 정확히 주체와 사물과 기호 삼자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며,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발생해서 기호로 표현된다. 의미란 바로 사건에 다름 아니다." - P145

이접적 종합에서는 "일련의 술어들이 한 사물로부터 그 개념적 동일성에따라 배제되는 대신, 각각의 ‘사물‘이 그것이 통과하는 무한한 술어들에로스스로를 개방하며, 동시에 그 중심을 즉 개념으로서 또는 자아로서의 그동일성을 상실한다." 이것은 곧 술어들의 배제(철수는 건축가이다. 따라서 비건축가가 아니다.)가 사건들 사이의 소통(철수는 건축을 하거나 또는 음악을 하거나 또는)으로 대체됨을 뜻한다.(계열 24) 이는 배제적 이점이 아니라 종합적 이점의 논리이다. 이렇게 발산하는 계열들을 가로지르면서 그것들 사이의 거리를 긍정하는 것, 사건들 사이의 소통을 도래시키는 것은 곧 스스로를 우발점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곧 (내재적 가능세계론에서) 여러 가능세계들을 가로지르는 것을 뜻한다. - P161

다자들은 부분집합들일 뿐 원소들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상황의 부분이 아니라 오로지 원소이기만 한, 즉 현시되기만 할 뿐 재현시되지는 않는 항들도 존재한다. 이 세 종류의 항들을 바디우는 ‘정규적인‘ 것들, ‘돌출적인‘ 것들, ‘특이한‘ 것들이라 부른다. ① 현시되는 동시에 재현시되기도 하는 항들은 ‘정규적인(normal)‘ 것들이다. ② 재현시될 뿐 현시되지는 않는 항들은 ‘돌출(excroissance)‘을 형성한다. 돌출은 상황에 포함되지만 그것에 속할 수는 없다. ③ 현시되지만 재현시되지는 않는 항들은 ‘특이한(singulier)‘ 것들이다. 특이한 것들은 상황에 속하지만 그것에 포함될 수는 없다. 상황상태는 이것을 그것의 일자로서 인식할 수가 없다. 특이한 것들은 사건, 진리, 주체의 성립에 핵심적이다. - P173

주체는 명명행위를 통해서 진리를 지식의 차원으로 전환시키며, 그로써지식의 차원을 변화시킨다. ‘당‘, ‘혁명‘, ‘정치‘ 같은 레닌의 개념들, ‘집합‘, ‘서수‘, ‘기수‘ 같은 칸토어의 개념들이 그러하다. 이런 개념들이 첨가됨으로써 지식의 체계는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명명행위는 당연히 기성 지식의저항에 부딪치게 되며, 이때 주체는 진리의 전미래 시제를 끈질기게 지탱해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주체는 항상 전미래에서의 의미를 표명한다.").
그래서 주체의 본질은 바로 ‘진리사건‘에의 충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P189

현대 합리주의는 과학적 인식에 구성적인 측면이 가미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구성주의가 인식에서의 존재론적 무게중심에서 너무 멀어져 과학적 인식을 과하게 주관적인 것으로, 사회적-역사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것을거부한다. - P219

아울러 현대 합리주의는 보다 근본적인 존재론적 함축을 띤다. 이는 곧실재가 플라톤적 형상들로 되어 있다는 가설을 더 이상 확신하지 않는다는점이다. 비판적 합리주의에서의 ‘비판적‘은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암암리에생성존재론을 함축한다. 세계의 근원은 생성인 것이다. 당대에 베르그송과 더불어 프랑스 철학의 두 축(비합리주의와 합리주의)을 형성했던 브렁슈비크에게 구키 슈조는 그와 베르그송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브렁슈비크는 구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베르그송의 제자입니다." 이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맥락에서 볼 때 현대의 합리주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세계에 대한 베르그송적 생성존재론을 전제하고서, 그러나 그 생성의 수학적 결을 찾아가는 것임을 뜻했다고 볼 수 있다. - P220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현대 과학, 특히 양자역학이 실증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초를 요청한다는 사실에 응답한 사유였다. 이 인식론에서 그는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제2종 인식을 제1종 인식으로부터 설득력 있게 분리했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그는 지각과 이미지의 세계에도 별도의 위상을 부여하고자 했으며 (양자에서 ‘물질‘ 개념이 전혀다르게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그의 현상학적-시학적 작품들로 나타났다.("아니무스와 아니마") 그러나 그의 사유의 문제점은 정작 이 양자 사이의 담론공간이 통째로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 P223

러셀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사유의 정향은 곧 ‘외연성(extension)‘ 지향의 사유이다. 모든 언어를 정확한 외연을 갖춘 언어로 환원해 애매성과 모호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무엇이든 기하학적 공간에 놓고서 분석할 때 최고의 명료성을 획득할 수 있다. 베르그송 역시 과학적 지능의 핵심을 바로 이기하학에서 찾았다. 그러나 러셀과는 정확히 반대로 베르그송은 이런 외연성의 사유의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그것을 논했다. ‘시간의 공간화‘에 대한 비판, 등질적 공간과 다질적시간의 대비, 양적 다양체와 질적 다양체의 엄격한 구분 등이 그의 사유의 초석을 이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 철학은 러셀의 길과 베르그송의 길로 분열되었다고도 할 수있다. 러셀이 볼 때 베르그송 식의 사유는 애매모호하다. 베르그송이 볼 때 러셀 식의 사유는 피상적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화이트헤드의 경우는 흥미롭다. 사유의 전기에 그는 러셀과 더불어 현대 논리학을 정초했지만, 사유의 후기에는 베르그송의 영향 하에서유기체 형이상학을 전개했기에 말이다. 바디우는 외연성을중시한 사유이고, 들뢰즈의 사유는 이 두 극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 P260

분석적 철학 전통은 일상 언어를 형식화해 논리학화하려는 의지, 깔끔 - P294

한 외연성의 사유로 환원하려는 의지로 점철되었다. 이것은 곧 일상 언어와는 상이한 성격을 띤 수학적인 언어를 구축하려는 시도이며, 또한 사유를 공간화함으로써 말하자면 논리적으로 범-기하학화하려 한 시도라고 할수 있다. 이런 경향은 컴퓨터의 발명 이래, 형식언어를 구축하려는 오늘날의 각종 시도로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흐름과 각을 세우면서 추상적인 형식화보다는 일상 언어가 내포하는 역사성, 다양한 맥락들,
미묘한 뉘앙스들, 화자와 화자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 사회-정치적 함의들등을 있는 그대로 살리면서 이해하려는 노력들 또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일상 언어는 그 자체 복잡하고 미묘한 논리를 내장하고 있으며, 형식언어의 ‘정확성‘과는 다른 형태의 ‘정확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언어철학은 이렇게 논리학을 기초로 단단한 형식언어를 구축하려는 경향과 일상 언어의 비-형식적인 구체성과 미묘한 정확성을 살려 이해하려는 경향이 길항해왔다. - P295

들뢰즈의 잠재성은 언제나 현실성과 더불어 생성하는 ‘실재‘이다. 들뢰즈에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외연‘ 및 ‘질‘에 입각한 사유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피상적인 표면적인것이다. 외연들과 질들은 그 아래에서 생성하고 있는 ‘강도적인 과정‘의 끝에서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강도적인 과정은 이 과정의 끝에서 사라지기때문에 (물론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피상적인 눈길에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 P339

내재적 가능세계론: 현실세계 = (그 외연이 다양하게 상대적으로 규정되는)한 주체의 경험세계, 가능세계들 = 타 주체들의 경험세계들

들뢰즈의 가능세계론: 현실세계 = 현실성(내재적 현실세계 및 가능세계들전체), 가능세계 = ①잠재성 또는 ② 형이상학적 표면 또는 ③ 가능세계들

가능세계 형이상학: 현실세계 = 현실성 + 잠재성 전체, 가능세계들 = 논리적으로 구성된 세계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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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무가 존재와 분리되어 존재 바깥을 감싸는 경우가 아니라 존재 사이사이에 분배될 때 생성이 성립한다. 정확히는 단지 사이사이에 분배될 뿐만 아니라 존재-무-존재-무⋯⋯를 경계 짓고 있는 선들이 계속 무너질 때 생성이 성립한다. 존재와 무는 절대 모순을 형성하며, 존재가 존재이고 무가 무일 때 생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는 무이므로(없으므로) 존재만이남는다. 무가 존재 사이사이에 분포하고 그 경계선들이 무너져갈 때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이 도래한다. 모든 생성은 차이생성이다. 그리고 이때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상 ‘생성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 P23

경험론적 형이상학자들은 한편으로 ‘경험‘에 충실하되, 이런 주체중심주의를 벗어나 경험의 심층을 응시한다. 그러나 이들은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 경험을 피상적인 것으로서 벗겨내고 그것과 불연속을 이루는 실재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실재를 찾는 한 본질과 현상의 이율배반과그것과 맞물려 있는 신체와 정신의 이율배반)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들은어디까지나 경험과 연속되는 그것의 심층을 구체적으로 인식해 들어가려했다. 이렇게 경험과 연속적으로 파악된 실재는 곧 ‘생성‘이었다. 경험론적형이상학의 구도를 통해 새롭게 성립한 형이상학 즉 생성존재론은 현대 철학/탈근대 철학의 핵심적인 성취에 속한다. - P49

오늘날 생성존재론의 구도는 ‘존재‘로부터 ‘생성‘으로의 이행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생성‘으로부터 ‘동일성들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있는것이다. 뒤에서 (6장, 1절) 논할 들뢰즈의 ‘잠재성의 철학‘은 이 과제에 답한각별히 정교한 시도에 속한다.
생성존재론의 또 하나의 의의는 이 존재론에 이르러 마침내 서구적 사유와 동북아적 사유가 서로 통(通)하게 된 점에 있다. 동북아의 형이상학은 처음부터 생성존재론의 형태를 띠었다. 이 전통은 ‘氣‘를 근본 실체로서 생각했고, 기는 반드시 ‘氣化‘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생성은 생성하지 않는 진실재의 ‘타락‘한 모습이었으나, 동북아에서는 정확히 반대로 ‘物‘의 고정된(고정된 듯이 보이는) 모습은 ‘氣‘의 흐름이 일정한 형태로 굳어진 것일 뿐이었다. 세계에 대한 이런 직관은 ‘易‘의 개념으로써도 표현되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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