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의 끝에서 사유하는 자아("ego cogito"), 사유활동(cogitatio)을 발견했다면, 후설은 판단 중지를 통해서 "현상학적 잔여로서의순수의식" (선험적 의식, 순수 자아, 선험적 주체)을 발견했다. 바로 지향적 체험을 실행하는 의식/주체이다. - P360

메를로-퐁티 (1908~1961)는 경험주의와 주지주의(합리주의)는 공히 이현상학적 세계를 만족스럽게 파악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경험주의 예컨대행동주의는 행동에서의 주체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오로지 기계적인자극-반응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행동을 단순한 요소들로 분석하고 그것들을 연합해서 설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넓게는 유기체의) 행동은 대상의 속성과 주체의 의도가 섞여 있는 곳, 즉 세계와 주체가 겹쳐져 주름을 형성하는 곳인 신체-주체에서 성립한다.2) 주지주의는 이 현상학적 장을 어떤 순 - P367

수한 개념들로 환원하고자 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이런 주지주의의사유는 인간의 삶이 철저하게 육화된(incarné) 것임을 망각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추상적인 개념들의 이런 환원은 인식과 실존 사이에 깊은 골을드리운다. 물론 인간은 상징 수준의 의미작용을 살아간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일반적인 언어의 의미작용은 어디까지나 육화된 차원에서의 의미작용으로부터 몸의 파롤로부터 변형되어 나온 것임을 역설한다. 신체의지각은 언어로 추상화되기 이전에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표현‘인 것이다 - P368

현존재는 존재의 목동이며 무의 자리지기이다. 존재의 ‘말 건넴‘은 그 열려있음 안에 들어서있는 현존재에게만 들린다. 그러나 일상성에서의 현존재는 이 말건넴에 등을 돌리고 세상에 빠져있다. 불안은 이 현존재를 그의 세계내존재자임으로 끌어당긴다. 불안 속에서 현존재의 존재가능도 분명해진다. 현존재의 존재가능은 곧 ‘자기를 앞질러 -감‘, 다시 말해 (허공을 향해 앞질러가는 것은 아니므로) 언제나 이미 세계-내에 존재하면서-자기를 앞질러-감이다.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를 하이데거는 ‘심려(心)‘로 파악한다. 현존재 특유의 모든 행위는 결국 이 심려에 근거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 P397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불안을 가리려 할 때, 즉 자기가 자기를 결정된 존재로서 스스로를 설득하려 할 때 ‘자기기만(자기 속이기)‘이 성립한다. 그런데 이 경우 자기가 자기의 불안을 잠재우려면 자기의 불안을 명확히 직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 자기 속이기는 타인 속이기와 다르다. 타인 속이기(‘거짓말‘)는 스스로는 진실을 알면서 타인에게는 거짓을 말해야만 성립한 - P418

다. 그러나 자기 속이기에서는 진실과 거짓이 하나의 통일된 의식 안에서혼효한다. 자기기만은 의식의 ‘반투명성‘에서만 나타난다. - P419

도달한 곳은 상반된 지점들이었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공히 현상학자들로서 ‘현존재‘를, ‘인간존재‘를 사유했지만, 하이데거 사유가 존재에 닻을 내린다면 대조적으로 사르트르는 의식/주체성에 닻을 내린다. 하이데거의 사유가 존재와 현존재의 사유라면, 사르트르의 그것은 의식= 대자와 즉자의 사유이다. 하이데거에게 현세계는 존재가 드러나고 숨는 장으로서, 인간은 이 장에서 철학과 시를 통해 존재를 향할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현세계는 대자적 주체가 무로부터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나가야 할 장이며, 인간은 이 장에의 앙가주망을 통해 그것을 바꾸어나갈 수 있다. 하이데거가존재에로 경사된 그의 사유를 통해 현실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을때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존재의 빛을 특정한 민족에 결부시켰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위험이다. 이런 경사를 품지 않았던 사르트르의 정치철학은 보다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주체철학에서는 존재에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끊겨버린다.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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