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 기능주의와 달리 토템 현상을 어떤 실질적인 기능, 유용성, 필요에 입각해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어떤 상징적인 것으로서, 문화를 떠받치는 틀, 구조, 객관적 선험으로서 해석한다. 따라서 토템은 해당 부족과 사실상 어떤 실질적인 연관성도 가지지 않는다. 기존의 모든 해석이 토템과 해당 부족의 실질적 연관성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다는 점에서, 이런 시각은 획기적이다. 토템이란 그 부족을 상징하는 특정한 기의를가지지 않는 순수가표일 뿐이다. 이 기표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그 기표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표가 다른 기표에 대해 가지는 차이, 달리말해 특정한 기표들의 체계에서 그것이 점하고 있는 위치에 있다. 이는 곧하나의 토템은 그 자체가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토템들과 맺는 관계, 토템들의 체계에서 그것이 다른 것들에 대해 가지는차이. 그 체계에서 점하는 위치에 따라 의미를 가짐을 뜻한다. - P444
구조주의는 의식적 주체의 바깥으로 나아가 사유했지만, 이제 그 바깥의 바깥에 주목함으로써 후기 구조주의 사유들이 도래하게 된다. 구조주의에서 주체는 구조 내에 용해되어버리지만, 구조의 바깥은 주체에게 구조로부터 탈주하고 나아가 그것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제공한다. 그러나 주체가 탈주해서 나아갈 바깥은 구조의 바깥이 아니다. 그 바깥은 구조로서의 바깥과 마치 웜홀에서처럼 통해 있는 구조 내의 바깥, 바깥의바깥이다. 그러나 바깥의 바깥은 바깥 너머로 뻗어가기보다 구부러져 안으로 이어진다. 주체가 찾아내야 할 바깥은 구조의 바깥이지만, 그 바깥은 오히려 그 자신과 닿아 있는 가능성이다. 주체는 이 가능성의 지점에서 솟아오르는 사건을 자신의 주름으로 바꾸면서 주체화해간다. - P448
칸트가 실재를 현상의 뒤편으로 물린 데 반해, 현상학은 그 뒤편을 접어두고 현상 자체의 실재성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것을 관념들로써 먹어치우고자 한다면 주체는 구토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에서의 이 실재성은 어디까지나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서의 객관이며, 의식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드러날 차원이다. 반면 구조주의에서 의식과 대상은 공히 그 근저의 추상공간구조에 입각해 바로 그런 관계를는 것으로 이해된다. 때문에 양자에게서 ‘의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 현상학에서의미노에마는 주체와 객체가 겹쳐진 곳에서 생성되어 나온다. 이겹쳐진 곳, 주름은 신체의 차원인 동시에 지각된 것의 차원이다. 신체는 이양자가 겹쳐진 생생한 경험의 장에서 성립한다. 현상학이 이룩한 큰 개념적 혁신은 근대적 신체 개념의 한계를 타파하고 완전히 새로운 신체론을정립한 점에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 사유에서 신체는 다시 증발되어버린다. 합리주의적 사유인 구조주의에서 신체는 언어에 자리를 내준다. 신체의 차원은 ‘이미지‘이며 ‘기표계’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의미는 추상공간의 요소들이 계열화됨으로써 성립한다. - P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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