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에게 영원회귀는 스토아적 영겁회귀가아니라 바로 차이생성, 보다 구체적으로는 힘에의 의지의 영원회귀이다. 모든 것은 힘에의 의지라는, 삶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으로 되돌아온다.36)그렇다면 힘에의 의지에로의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추상적으로는 차이생성으로의 회귀이며, 생명/삶의 구체적 맥락에서는 자기 극복을 요청하는 상황으로의 끝없는 회귀이다. - P113
베르그송이 인식론에서의 직관을 보완해서 윤리학/도덕철학의 원리로 제시하는 능력은 곧 ‘창조적 정서(émotion)‘이다. 베르그송에게 창조적 정서는 과학, 예술, 철학 등으로 구체화될 빼어난 직관, 영감으로서의창조적 정서이다. 그것은 아직 악보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작곡가의 마음속에서 장대하게 울려 퍼지는 잠재적 선율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창조적 정서의 가장 위대한 경지는 바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해서 윤리의 새로운경지를 여는 행위의 영웅들에게서 발견된다. 이러한 창조적 정서는 지능이하의 정서가 아니라 지능 이상의 정서이다. "새로운 도덕 이전에, 새로운 형이상학 이전에 정서가 먼저 있고, 이 정서가 의지의 편에서는 약동으로 지능의 편에서는 풀어설명하는 표상으로 이어진다." (MR, 46) 따라서 베르그송에서의 열린 도덕의 근저에는 ‘생명의 약동‘이, 새로운 뉘앙스를 띠게 되는 약동이 존재한다. - P130
의미란 바로 명제에 있어 표현된 것 즉 사건이다. 의미는 말과 사물/사태의 지시관계, 주체와 그 현시물 사이의 현시관계, 그리고 기호들의 변별적차이들의 구조로 해소되지 않는다. 의미의 네 번째 차원, 사실상 이 세 의미론이 바로 그것을 둘러싸고서 성립하는 중심 지점이 존재한다. 의미란 정확히 주체와 사물과 기호 삼자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며,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발생해서 기호로 표현된다. 의미란 바로 사건에 다름 아니다." - P145
이접적 종합에서는 "일련의 술어들이 한 사물로부터 그 개념적 동일성에따라 배제되는 대신, 각각의 ‘사물‘이 그것이 통과하는 무한한 술어들에로스스로를 개방하며, 동시에 그 중심을 즉 개념으로서 또는 자아로서의 그동일성을 상실한다." 이것은 곧 술어들의 배제(철수는 건축가이다. 따라서 비건축가가 아니다.)가 사건들 사이의 소통(철수는 건축을 하거나 또는 음악을 하거나 또는)으로 대체됨을 뜻한다.(계열 24) 이는 배제적 이점이 아니라 종합적 이점의 논리이다. 이렇게 발산하는 계열들을 가로지르면서 그것들 사이의 거리를 긍정하는 것, 사건들 사이의 소통을 도래시키는 것은 곧 스스로를 우발점으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곧 (내재적 가능세계론에서) 여러 가능세계들을 가로지르는 것을 뜻한다. - P161
다자들은 부분집합들일 뿐 원소들은 아니다. 그리고 또한 상황의 부분이 아니라 오로지 원소이기만 한, 즉 현시되기만 할 뿐 재현시되지는 않는 항들도 존재한다. 이 세 종류의 항들을 바디우는 ‘정규적인‘ 것들, ‘돌출적인‘ 것들, ‘특이한‘ 것들이라 부른다. ① 현시되는 동시에 재현시되기도 하는 항들은 ‘정규적인(normal)‘ 것들이다. ② 재현시될 뿐 현시되지는 않는 항들은 ‘돌출(excroissance)‘을 형성한다. 돌출은 상황에 포함되지만 그것에 속할 수는 없다. ③ 현시되지만 재현시되지는 않는 항들은 ‘특이한(singulier)‘ 것들이다. 특이한 것들은 상황에 속하지만 그것에 포함될 수는 없다. 상황상태는 이것을 그것의 일자로서 인식할 수가 없다. 특이한 것들은 사건, 진리, 주체의 성립에 핵심적이다. - P173
주체는 명명행위를 통해서 진리를 지식의 차원으로 전환시키며, 그로써지식의 차원을 변화시킨다. ‘당‘, ‘혁명‘, ‘정치‘ 같은 레닌의 개념들, ‘집합‘, ‘서수‘, ‘기수‘ 같은 칸토어의 개념들이 그러하다. 이런 개념들이 첨가됨으로써 지식의 체계는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명명행위는 당연히 기성 지식의저항에 부딪치게 되며, 이때 주체는 진리의 전미래 시제를 끈질기게 지탱해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주체는 항상 전미래에서의 의미를 표명한다."). 그래서 주체의 본질은 바로 ‘진리사건‘에의 충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P189
현대 합리주의는 과학적 인식에 구성적인 측면이 가미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구성주의가 인식에서의 존재론적 무게중심에서 너무 멀어져 과학적 인식을 과하게 주관적인 것으로, 사회적-역사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것을거부한다. - P219
아울러 현대 합리주의는 보다 근본적인 존재론적 함축을 띤다. 이는 곧실재가 플라톤적 형상들로 되어 있다는 가설을 더 이상 확신하지 않는다는점이다. 비판적 합리주의에서의 ‘비판적‘은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암암리에생성존재론을 함축한다. 세계의 근원은 생성인 것이다. 당대에 베르그송과 더불어 프랑스 철학의 두 축(비합리주의와 합리주의)을 형성했던 브렁슈비크에게 구키 슈조는 그와 베르그송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브렁슈비크는 구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베르그송의 제자입니다." 이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맥락에서 볼 때 현대의 합리주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세계에 대한 베르그송적 생성존재론을 전제하고서, 그러나 그 생성의 수학적 결을 찾아가는 것임을 뜻했다고 볼 수 있다. - P220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현대 과학, 특히 양자역학이 실증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초를 요청한다는 사실에 응답한 사유였다. 이 인식론에서 그는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제2종 인식을 제1종 인식으로부터 설득력 있게 분리했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그는 지각과 이미지의 세계에도 별도의 위상을 부여하고자 했으며 (양자에서 ‘물질‘ 개념이 전혀다르게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그의 현상학적-시학적 작품들로 나타났다.("아니무스와 아니마") 그러나 그의 사유의 문제점은 정작 이 양자 사이의 담론공간이 통째로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 P223
러셀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사유의 정향은 곧 ‘외연성(extension)‘ 지향의 사유이다. 모든 언어를 정확한 외연을 갖춘 언어로 환원해 애매성과 모호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무엇이든 기하학적 공간에 놓고서 분석할 때 최고의 명료성을 획득할 수 있다. 베르그송 역시 과학적 지능의 핵심을 바로 이기하학에서 찾았다. 그러나 러셀과는 정확히 반대로 베르그송은 이런 외연성의 사유의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그것을 논했다. ‘시간의 공간화‘에 대한 비판, 등질적 공간과 다질적시간의 대비, 양적 다양체와 질적 다양체의 엄격한 구분 등이 그의 사유의 초석을 이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 철학은 러셀의 길과 베르그송의 길로 분열되었다고도 할 수있다. 러셀이 볼 때 베르그송 식의 사유는 애매모호하다. 베르그송이 볼 때 러셀 식의 사유는 피상적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화이트헤드의 경우는 흥미롭다. 사유의 전기에 그는 러셀과 더불어 현대 논리학을 정초했지만, 사유의 후기에는 베르그송의 영향 하에서유기체 형이상학을 전개했기에 말이다. 바디우는 외연성을중시한 사유이고, 들뢰즈의 사유는 이 두 극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 P260
분석적 철학 전통은 일상 언어를 형식화해 논리학화하려는 의지, 깔끔 - P294
한 외연성의 사유로 환원하려는 의지로 점철되었다. 이것은 곧 일상 언어와는 상이한 성격을 띤 수학적인 언어를 구축하려는 시도이며, 또한 사유를 공간화함으로써 말하자면 논리적으로 범-기하학화하려 한 시도라고 할수 있다. 이런 경향은 컴퓨터의 발명 이래, 형식언어를 구축하려는 오늘날의 각종 시도로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흐름과 각을 세우면서 추상적인 형식화보다는 일상 언어가 내포하는 역사성, 다양한 맥락들, 미묘한 뉘앙스들, 화자와 화자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 사회-정치적 함의들등을 있는 그대로 살리면서 이해하려는 노력들 또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일상 언어는 그 자체 복잡하고 미묘한 논리를 내장하고 있으며, 형식언어의 ‘정확성‘과는 다른 형태의 ‘정확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언어철학은 이렇게 논리학을 기초로 단단한 형식언어를 구축하려는 경향과 일상 언어의 비-형식적인 구체성과 미묘한 정확성을 살려 이해하려는 경향이 길항해왔다. - P295
들뢰즈의 잠재성은 언제나 현실성과 더불어 생성하는 ‘실재‘이다. 들뢰즈에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외연‘ 및 ‘질‘에 입각한 사유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피상적인 표면적인것이다. 외연들과 질들은 그 아래에서 생성하고 있는 ‘강도적인 과정‘의 끝에서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강도적인 과정은 이 과정의 끝에서 사라지기때문에 (물론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피상적인 눈길에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 P339
내재적 가능세계론: 현실세계 = (그 외연이 다양하게 상대적으로 규정되는)한 주체의 경험세계, 가능세계들 = 타 주체들의 경험세계들
들뢰즈의 가능세계론: 현실세계 = 현실성(내재적 현실세계 및 가능세계들전체), 가능세계 = ①잠재성 또는 ② 형이상학적 표면 또는 ③ 가능세계들
가능세계 형이상학: 현실세계 = 현실성 + 잠재성 전체, 가능세계들 = 논리적으로 구성된 세계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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