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행위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이미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나 증인의 죽음, 일상성의 지배라고 하는 자연스러운 망각의 요인에서 유래하는 것이아니다. 심지어 그것은 다시 죽은 자들의 의지와 그 ‘작품‘을 횡령하고자 하는 역사편찬= 역사서술의 폭력도 다른 기억, 다른 해석,
다른 이야기에 의한 사후적인 폭력에서 유래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바야흐로 기억되어야 할 사건 그 자체가 애초부터 기억에의도전으로서, 망각에의 덫으로서 발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기억에 대립하는 다른 기억, 해석에 대립하는 다른 해석, 이야기에 대립하는 다른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기억 그 자체의 부정, 해석 그 자체의 부정, 이야기 그 자체의 부정의 형태로 발생하며 거기서는 모든 것의 ‘변호‘ 불가능성이 사건의 핵심을 구성한다. - P10

‘완전한 망각‘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현재는 망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 말해진 적이 없었던 몇몇 절멸이, 기억된 적이 없었던 몇몇 재액(쇼아)이 있었을지도모르는 것이다." - P49

‘인종으로의 민족의 몰락‘이란 기억의 관점에서 말하면 실제로는 기억의 무화이고 어둠 속으로의기억의 전략인 것인바, 그런 기억의 어둠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아프리카‘이고 ‘암흑의 핵심‘으로서의 블랙 아프리카이기 때문이다. European mankind의 붕괴, ‘서양의 몰락‘은 아렌트에게는 유럽의 아프리카화로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 P102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우리가 되는 나, 나가 되는 우리lch, dasWir, und Wir, das Ich ist"로서, 인륜적 공동체와 개인, 보편자와 개별자,
전체와 개체를 총합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실재로서의이성의 자기 확신이 ‘진리‘로까지 고양되고, "자기 자신을 세계로서,
또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서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정신의 운동이란 세계의 운동에 다름 아니고 역사 그 자체와 일치하는것이 된다. ‘정신의 상처는 상흔을 남기지 않고 아문다‘는 단언은 그러므로 동시에 역사철학적 테제이다. 그 어떤 돌이킬 수 없는 행위도그 어떤 용서할 수 없는 범죄도 역사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모든 ‘부정성‘의 기억- 역사의 ‘상흔‘은 정신의 힘을 통해 ‘소멸‘ 시킬 수 있다는 것이 여기서 피력되고 있는 확신이다. - P145

레비나스를 원용하자. "우주 전체를 창조하고 떠받치는 신도,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른 범죄를 받아들이거나 용서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신조차도 희생자를 대신할 수 없다." 희생자가 짊어진
‘현실의 상처‘가 죽음일 경우에, 달리 말해 용서할 권리를 가진 ‘행위의 유일한 희생자‘가 처음부터 죽은 자일 경우에 가해자가 용서받는 일은 있을 수 없는바, 만일 신이 그것을 용서한다면, 즉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일로 하거나 죽은 자들에게 덮씌운 악이나잘못을 아무 것도 아닌 것, ‘무와 같은 것‘으로 하여 ‘기억‘ 속에서
‘제거해‘ 버린다면, 그것은 신에 의한 역사의 개찬, 곧 신의 리비저니즘revisionism, 역사수정주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P153

역사의 ‘가시적인 것‘ 아래의 ‘비가시적인 것‘을 보는 심판,
그럼으로 인해 ‘역사 그 자체가 심판받는 것과 같은 심판은 ‘주체성의 고양‘을 요구한다. ‘타인‘은 ‘나를 응시하고, 나를 고발하는재이므로, ‘응답하도록 나를 독촉하는 한에 있어서, 심판은 나에게내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독촉은 ‘무한책임을 짊어지라‘는 촉구에 다름 아니다. - P174

"국가에 맞서 유지되는 자아의 대체불가능한 유일성은번식성에 의해 성취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것은 즉, ‘아버지의 유일성‘이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 ‘유일한 아들‘을 낳고, 이리하여 "아버지의 아들은 모두 유일한 아들이자, 선택된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아들‘도, ‘타인‘에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는, 각각이 유일한 ‘증인‘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번식성‘이란 바야흐로 무수의 ‘유일성‘을 낳는 ‘유일성‘인 것이고,
‘유일성‘의 ‘무한‘ 반복인 것이다. - P181

로젠츠바이크에게 ‘영원의 민족‘은 ‘그 피의 순수한원천을 다른 피와의 혼합fremde Beimischung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하고 있다." 레비나스의 ‘신의 이스라엘‘이역시 이 ‘혼합‘을 기피하고 있는지 아닌지, 어디까지 기피하고 있는 것이지는 알 수 없다. 이미 살펴보아 온 바와 같이, 레비나스는
‘아버지의 공통성‘이 있는 한 ‘모든 인간은 형제이다‘는 입장에 서있다. - P193

‘새로운인간 전체‘는 언제나 좁은 뜻의 ‘이스라엘‘ 즉 유대민족에서 출발하고, 그러한 좁은 뜻에서의 ‘이스라엘‘에서 넓은 뜻에서의 ‘이스라엘‘로 확대되는 형태로서만 논의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유지하시오‘"라는 명령은 우선적으로 좁은 뜻의 ‘이스라엘‘
‘인간은 유대인으로 태어난다‘고 한다면, ‘생물학적 번식성‘을 기초로한 ‘번식성‘의 공동체의 방위를 요구하는 것이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 P194

만신창이의 증인들. 다가오는 ‘늙음‘과 ‘죽음‘의 폭력에 대항해
‘역사의 심판‘의 ‘잔혹함‘에 대항해 증언할 ‘그녀들‘의 목소리는
‘부성‘에도, ‘모성‘에도, ‘가족‘에도, ‘민족‘에도 ‘일신교‘의 ‘형제 - P194

관계‘에도 회수될 수 없는 것이다. ‘일본남자‘(후카츠 목사)에 의한
‘박해‘의 기억, ‘국가‘와 ‘영웅적인 주체‘에 의한 ‘박해‘의 증언은
‘모성‘이나 ‘민족‘이나 ‘번식‘에 회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박해‘는 ‘번식성‘의 파괴, ‘모성‘의 파괴, ‘민족‘의 파괴였지만,
또한 동시에 또 하나의 ‘민족‘의 또 하나의 ‘모성‘과 ‘번식성‘의 ‘유지‘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박해‘ 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그녀들‘을 침묵으로 몰고 간 원인의 하나가 ‘가족‘이나 ‘민족‘이나 ‘번식성‘의 무언의 압력이었다는 사실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95

고야마 언설의 아포리아는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즉스스로 문화 그 자체의 발전의 본질적 조건으로 인정했던 것을 이번에는 ‘문화그 자체의 사멸‘의 조건으로 지정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 언설은 문화의 텔로스-‘합일‘를 문화의 에이도스 ‘거리‘에 반대하여 문화의 에이도스의 폐기로 규정하길 원한다. 이런 의지를 이끄는 것이 일본의 ‘세계사‘적 역할을 그 ‘국민정신의 독자성‘으로부터, 즉 ‘국체의 독자성‘으로부터 정초하려는 욕망이었음은 이미 분명할 것이다. - P224

‘세계사의 철학‘의 반제국주의 논리는 실제론 그 철학의 ‘제국주의적‘ 귀결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세계의 재블록화와 세계정치로의 ‘대국‘ 일본의 재등장이 운운되고 있는 오늘, 그 ‘선견성見性‘을 ‘제국주의적‘ 일탈로부터 구별하여 구해낼 - P236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세계사의 철학‘은 바로 그것이 내걸었던 제국주의 비판의 원리, 즉 ‘각 민족 각 국가가 제각기 그 자리를얻는다‘는 ‘도의적 원리‘에 의해 세계사를 자기 것으로 한다. 자기로의 회귀를 비판함으로써 자기 쪽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 P237

일반적으로 다원주의는 다수인 ‘원元, 으뜸. 시작. 본래 • 기원‘ 그 자체의 동일성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삼는다. ‘특수적세계사‘의 ‘다수성‘을 설파하고 각 민족 각 국가가 자리를 얻은‘
다원적 세계의 실현을 설파하는 ‘세계사의 철학‘이 일본의 ‘국민적동일성‘을 ‘순수‘한 ‘피‘의 ‘동일성‘으로 전제했다고 해서 그것이별달리 기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고야마는 그 ‘동일성‘
을 마치 영원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당시의 황도철학이나 황국사관의 편협한 일본주의를 암암리에 비판하고 ‘국사‘를
‘세계사적 입장‘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할 때에도, 일본의 ‘세계성‘
이란 결국엔 과거에 대해서도 미래에 대해서도 ‘외국문화‘의 ‘이식‘
을 통해 사고되고 있을 따름으로, ‘피‘의 ‘동일성‘ 그 자체는 언제나 불변하는 성역으로 전제되어 있다. 물론 그러한 ‘피‘의 ‘동일성‘
및 그것에 관한 확신이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음은말할 것도 없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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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3장

초기의 동양 애호가 중 상당수는, 그들의 유럽인으로서 지성과 정신의 습관에 건전한 착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동양을 환영했다. 동양은 그 범신론, 정신성, 안정성, 항구성, 원시성 등등으로 인하여 과대평가되었다. 예컨대 셀링은, 동양의 다신교 속에서 유대-기독교적인 일신론에 통하는 길을 발견했다. 곧 브라흐마를 아브라함의 원형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대평가의 다음에는 예외 없이 그것에 대한 반동이 초래되었다. 그래서 동양은 갑자기, 불쌍하게도 비인간적, 반민주주의적, 후진적, 야만적인 등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일방적인 시계추의 운동은 그것과 똑같은 반대방향의 반동을 초래했다. 곧 동양은 과소평가되었다. 직업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이러한 두 가지의 대립, 곧불평등성에 근거한 보상과 수정으로부터 성장하여 왔으며, 그 사고방식은 널리 문화 일반 속의 유사한 사고방식에 의해 함양되었고, 또 다른유사한 사고방식을 함양했다. - P266

오리엔탈리즘의 학문이 구축하고, 그것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온 ‘동양에 관한‘ 지식(예컨대 서동시집》)의 지지를 얻어 이미 절대적인 것이 된 정의와 만나, (마르크스의) 동정적인 감정의 파도는 사라졌다. 또 오리엔탈리즘적 학문의, 나아가 오리엔탈리즘적 예술의 사전상의 의미통제에 굴복하여 이 감정을 나타내는 어휘는 소멸되었다. 사전적인 정의에 의해 개개의 경험은 제거되었다. 이와 같은 것이 마르크스의 인도론에서도 생겨났음은 누구라도 분 - P274

명하게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인도론에서 결국 어떤 힘이 그를 강제하여 괴테에게 서둘러 달려가게 했고, 거기에서 그는 자신을 옹호해 준 동화된 동양 속에 자리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사회경제적 변혁에 관한 그 자신의 여러 명제를 입증하는 점에도 부분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오리엔탈리즘의 내부에서 견고한 것이 되어, 그 분야의 외부에까지 뻗쳐 나온,
이미 동양에 관한 모든 진술을 지배하게 된 방대한 저술의 집합체에도안이하게 의존한 것으로 생각된다. - P275

유럽인으로서 동양에 산다는 것은, 주위 환경으로부터 초연하며, 글위와는 동등하지 않은 하나의 의식으로 그곳에 산다는 의미를 언제ㄴ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의식이 어떤의도를 갖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무엇을 추구하여 동양에 존재하는것인가, 또 스콧, 위고, 괴테와 같은 작가들처럼 그 의식은 늘 유럽의 현실을 떠나지 않은 그대로이면서 왜 지극히 구체적인 경험을 추구하여동양을 여행하며, 동양에 있을 때조차 왜 그들은 서양에 있고자 하는가하는 이유가 문제된다. - P278

레인은 두 종류의 중요하고도 긴박한 방법으로 학문적인 신뢰성과 정통성을 확보한다. 첫째는인간생활에 대한 보통의 설화적인 경과를 방해하는 방법이다. 이는 그가 행하는 무수한 양의 세부묘사가 수행하는 기능이고, 그 세부묘사 속에서 한 사람의 외국인으로서 관찰하는 지성은 대량의 정보를 소개할수 있고 나아가 그것들을 종합할 수 있게 한다. 이집트인은 그야말로를 갈라서 그 속을 보여 주었는데, 그 뒤에 레인에 의해 설득되어 그것을 봉합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집트인-동양인의 생활에서 자손증식과정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방법이다. 이 기능은 레인이 자기의 동물적욕구를 억제함으로써 수행된다. 그 결과 주어진 정보는 이집트 속에서이집트를 위하여 보급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학문 전반 속에서 유럽의 학문 전반을 위하여 보급된다. - P288

동양은 용감한 여행가나 거주자들의 개인적인, 종종은 왜곡된 증언이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학문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의 협력에 의해 얻어진 비개성적인 정의로 전환하게 되었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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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장하는 바는, (현대 오리엔탈리즘의 근본이 된)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이론과 실천을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파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동양에 관한 객관적 지식에 별안간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상속되어 왔고, 세속화되어 왔고, 재배치되어 왔으며 나아가 문헌학과같은 학문 분야에 의해 변형된 한 세트의 구조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학문 분야도 기독교적인 초자연 신앙이 자연화되고 근대화되며 세속화된 대체물(또는 변형)에 다름 아니었다. 동양은새로운 텍스트나 관념의 형태를 취하여 이러한 구조에 순응하였다. - P220

오리엔탈리스트는 상당히 광범위한 비일상적인 체험을 그의 동포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히브리 민족의 ‘참으로 신성한‘ 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문학의 일종을 동포의 공유재산으로 삼기 위하여, 더욱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리엔탈리스트는 멀리 떨어진 동양의 심연으로부터 유익한 보석만을 낚아 올리기 때문에, 또 그 힘을 빌리지 않고는 동양을 알수 없기 때문에 오리엔탈리스트라는 존재가 필요하며, 동양 문헌 자체를 통째로 취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또한 진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시가 도입한 단편이론으로서 이는 당시 낭만주의에 공통된 관심이었다. - P231

르낭은 문헌학으로부터 오리엔탈리즘에 옮겨 왔다. 오리엔탈리즘에가장 중요한 기술적인 여러 특징을 부여한 그 점이야말로, 문헌학이라는 학문 분야의 지극히 풍부하고도 높은 문화적 지위였다. - P235

사물에 관한 르낭의 사고방식이 철저히 역사적인 것이었고, 또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형태학적이기 때문에, 그가 젊은 날에 종교로부터 문헌학이라는 학문 분야로 옮겨 갔을 때, 과거에 종교로부터 얻은 역사적 세계관을 새로운 세속의 학문에까지 존속시키게 되었음은 지극히 당연한일이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단지 하나의 작업만이 나의 생활을 충족시키는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세속의 학문이 나에게 제공해 주는것은 훨씬 광범한 수단에 의한, 기독교에 관한 비판적 연구(기독교의 역사와 기원을 주제로 하는 르낭의 중요한 학문상의 시도를 암시하고 있는)의 수행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르낭은 기독교 신앙의 상실이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을 문헌학에 동화시켰다. - P241

르낭에게 문헌학자라는 것은, 낡은 기독교 신과의 모든 연관성을 완전히 단절하는 것, 그결과 그것에 대체되는 새로운 교의(필경 과학)가 소위 자유롭고 새로운장소를 차지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르낭의 모든 학문 생애는 이러한 진보의 과정을 충실하게 하는 데에 바쳐졌다. - P246

문헌학자는 어떤 언어학적인 사실을 어떤 방법으로 일정한 역사상의 시기대응시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류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그러나르낭도 가끔 인정해야 했던 바와 같이 언어학상의 시간성이나 역사에는 결손 부분이나 거대한 불연속성 또는 가정에 불과한 시간 등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므로 언어학상의 사건은 비직선적이고 근본적으로 불연속적인 시간적 차원 속에서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 차원은 언어학자에 의해 지극히 독특한 방법으로 관리된다. 이러한 방법이 바로 비교 - P253

라고 하는 점은, 동양어의 셈 부문에 관하여 르낭의 논문 전체가 왜곡하여 논한 바로 그것이다. 곧 거기에서는 인도-유럽어가 생생한 유기적지표로 사용된 반면, 동양의 셈어는 그것과 비교하여 비유기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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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병사들은 "불만을 품은 농민이나 도시 거주자였다." 병사들이 지내는 병영은 "노역의 쉰내"가 진동하는 "벽돌로 지은 우리"에 지나지 않았다.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몇 주간 이어진 먹구름과 혹한 끝에 갑자기 날씨가 좋아지고 해가 나자 페트로그라드의 거리에는 더 만은 사람이 몰려나왔다. 미리 계획한 대로 여러 여성 단체들이 시위에 나섰다.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이날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아니치코프 다리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모였다. 대부분 짧은 겉옷을 입고 높은 부츠를 신은 노동자들이었다. 창을 든 카자크 기마대는 열 명이 한 조를 이루어 다녔다. … 나는 아니치코프 다리를 건너 리테이니 대로로 향했다. 여기가 집회의 중심지였다. 그곳에는 수많은 노동자가 모여 있었고 거리는 엄청난 인파로 가득했다. … 카자크 기마대는 말을 이용해 사람들을 살짝 밀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가끔 보도 위로 올라가 구경꾼을 몰아내기도 했다.

그날 아침 시위대는 볼린스키 근위연대는 자신들이 검거한 병영 바로 옆에 있는 타브리 체스키궁의 국가 두마로 향했다. 반역자들은 거대한 건물군에 같같이 포함된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연대의 전열로 이동해 이들에게 함께 하자고 요청했다. 그리고 두 연대는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노동자들에게 건네주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 사람들은 봉기가 갑자기 혁명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무혈혁명"의 신화는 수도 내에서만 양측에서 100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6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싸움은 아스토리아 호텔 습격으로 끝났다. 이곳에 많은 장교와 장군들이 몸을 피하러 왔지만, 호텔 지붕에 배치된 경찰 저격수들이 군중을 자극해 학살에 말려들게 되었다.

전제군주제의 몰락에 크게 기뻐했던 지식인 집안의 한 노부인에게 시장에서 어떤 노점상이 말을 걸었다. "기독교인이세요?" 노점상이 물었다. "어때요, 삶이 좀 나아질 것 같나요?" 노부인이 답했다. "물론이죠." 노부인이 답했다. "오, 이봐요." 여자가 말했다. "유대인 놈들이 다 없어질 때까지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거예요.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문제는 다 유대인 놈들 때문이니까요."

제정의 붕괴는 무엇이든 제대로 작동하는 것에 붙어 있는 조작 장치를 임시정부 측에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정치적 무인지대에 세워졌다.

레닌은 계급적 적의 도움을 받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혁명 선전을 위해 독일 정부의 비밀 자금을 받으려고도 했다. 그래서 레닌은 자신이 타도하려 애쓰는 대상인 제국주의자의 도움을 받아 혁명가 서른 명과 프로이센 장교 두 명의 호송을 받으며 ‘봉인 열차’에 탔다.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거칠 필요는 없었다. 레닌은 부르주아와 임시정부가 너무 약해서 소비에트가 즉시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경찰과 군대, 관료제를 폐지하고 토지와 은행을 모두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중들은 레닌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며 경악했다. 레닌은 위선을 경멸했고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굳게 믿었다.

입헌군주제 성립에 실패한 밀류코프는 차르의 몰락이 적어도 병사들의 애국심과 전쟁에 승리하겠다는 결심을 부활시키기를 바랐다. 병사 대부분이 3월에는 전쟁이 계속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듯 보였지만, 임시정부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병사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4월이 되자 패전국은 배상금을 물고 영토를 빼앗기게 된다는 생각과 함께 전쟁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케렌스키는 자신의 미사여구에 심취해 자신만이 러시아군을 승리와 평화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했고, 많은 대중이 그렇게 믿게 했다.

당시 러시아 전역에 걸친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로 장교뿐 아니라 중산층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7월 7일 케렌스키가 황제 일가를 차르스코예셀로에서 시베리아의 토볼스크로 보내는 운명적 결정을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케렌스키는 지난 며칠간 벌어진 극좌 세력의 봉기로 군주제 지지자들이 반격에 나설까 봐 두려워했다.

현재 밝혀진 증거에 따르면, 소련 역사가들이 줄곧 주장한 것과 달리 코르닐로프는 쿠데타를 모의하지 않았다. 코르닐로프의 주요 목표는 임시정부를 강화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군 내외부의 많은 코르닐로프 지지자는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케렌스키를 몰아내고 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레닌이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 볼셰비키에 막 입당한 트로츠키는 당시 스탈린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당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트로츠키는 고압적 태도 때문에 동료들, 특히 카리스마가 덜한 스탈린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타고난 웅변가였던 트로츠키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예리하고 재치 있는 연설로 거대한 시르크 모데른 같은 페트로그라드의 커다란 홀을 가득 매운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트로츠키는 군중 사이에 누가 봐도 부르주아 혹은 ‘부르주이’ 같은 옷차림을 한 사람이 눈에 띄명 조롱하기를 즐겼다.

크라스노프가 진격할 때 이른바 ’구국혁명위원회‘(주로 우파 사회혁명당원으로 이루어진 조직)는 지지자들에게 볼셰비키 독재에 맞서 일어설 것을 촉구했다. 봉기에 합류한 제국군 장교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고, 반란군은 교관들에게 이끌려 나온 몇몇 사관학교의 사관생도들로 구성된 ’소년 십자군‘이었다. 일부는 갓 열네 살이었고 자기 키만 한 소총을 다뤘다.

볼셰비키는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하기는 했지만 총득표수의 4분의 1도 안 되는 1000만 표밖에 얻지 못해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이 결과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사회혁명당이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혁명당의 분열은 선거가 임박했을 때 일어나 대부분의 투표용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좌파 사회혁명당 다수는 볼셰비키와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분포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는 계급과 지역을 막론하고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볼셰비키에도 침투해 있었다. 하지만 차르 시대의 검은 백인대의 포그롬과 같은 극단적인 반유대주의가 분노한 유대인 젊은이들을 볼셰비키의 품에 떠민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 결과 내전에서 우익 장교, 카자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더 만은 포그롬을 일으켰고 증오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키예프의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잘 싸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실제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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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휴에는 푹 쉬면서 하루는 친가 식구들과 외식만 했다.

아버지는 비니를 쓰고 나오셨는데 빠진 머리가 다시 나지 않으신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보온성 챙기고 좋죠 뭐." 하고 답했다. 

3차까지 진행된 항암 치료는 아버지가 견디시지를 못했다. 부작용이 심해서 구토 및 식욕 부진 등이 생겼고 잘 먹지를 못하니 온 몸에 힘이 없으시다고 했다. 결국 약물로 치료 방법을 바꾸었고 비보험이라 약값은 많이 들지만 부작용이 없고 암 수치도 좋아져서 일단은 이 방식으로 몇 달 지켜보면서 가기로 했다.

남동생이 결혼할 때가 지나서인지 부모님 걱정이 크다. 그런데 내 생각은 본인이 결혼할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과 잘 맞는 상대를 만났을 때 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다. 지금 결혼 적령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진지한 고민 없이 시작하는 결혼은 후회만 남을 뿐이다.


#2

아직 노안이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예전만큼 책 읽기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끔 앞이 뿌연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노안 전 증상인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이미 노안?ㅎㅎ)

어쨌든 책을 예전처럼 오래 잡고 있지를 못한다.

스트레칭도 자주 해주고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3

필테 개인 PT는 어느새 마무리하고 20회를 더 연장했다.  

습관화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혼자 운동을 하면 아무래도 선생님과 함께 할 때보다 운동을 더 열심히 안하는 것 같다.

'조금 더!'해야 운동 효과가 있는 것인데 힘드니까 그만 두기도 하고. 

어쨌든 그래도 몇 개월간 한 필테는 내 몸에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바디를 운동 시작하기 전 받고 얼마 전 확인해보니 체지방이 많이 감소하고 근력량이 조금 늘었다고 한다. 

일단 근력이 조금이지만 늘어서 다행이다. 다만 살이 오히려 빠져서 다이어트하자고 시작한 운동이 아니었기에 선생님께서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행인 것은 내 기초대사량이 보통 사람보다 높다고 한다. 물론 이를 믿고 운동 안하면 아무 소용 없는 것이겠지^^


#4

1월에 사들인 책들이 많기에 당분간은 책 구매는 미루려고 한다.

사들인 책 중 가장 걱정되는 책은 역시 아래의 책이겠지. 그래도 이왕 마르크스 저작을 읽기 시작한 만큼 끝까지는 읽어보겠다.




1월에는 이런 책들을 읽었다. 도스토옙스키 전집 중에서는 <악령>을 읽었다.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한파가 지나고 나면 따뜻한 봄 기운이 몰려올거라고 한다.

꽃샘 추위도 없다고 하니 돌아다니기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지난 번 전시회가 참 좋아서 한 번 더 다녀올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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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2-05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전시회가 좋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거리의화가 2025-02-05 16:32   좋아요 1 | URL
블랑카 님 안녕하세요.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하고 있는 수묵별미 전시입니다. 기간이 다음주까지인 것으로 알아요. 확인해보시고 관심 있으시면 가보셔도 좋겠죠. 감사합니다^^

blanca 2025-02-05 16:38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5-02-0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걱정되는 책을 저도 획득하였습니다.... ㅜㅅㅜ (약간 참담한 기분) 올해 안에는 힘들 거 같은데 부지런히 먼저 가계세요. 그나 저나 아, 어디로 가시나요 화가님. 그 길 뒤 따라 가려면....ㅋㅋㅋㅋ
암튼 대단하세요! 짝짝짝~

거리의화가 2025-02-06 16:22   좋아요 0 | URL
책 받아놓고 참담한 기분이 드신 것 충분히 공감합니다. 언제 마무리될지는 모르겠으나 몇 쪽씩이라도 꾸준히 읽어봐야죠.
작년에도 어떤 주제를 정해놓지 않고 마구잡이로 읽었던 한 해였는데 올해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쟝 님의 길도 화이팅!!!

독서괭 2025-02-05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안 읽힌다고 하셨지만 충분히 많이 읽으신 것 같습니다 ㅎㅎ 운동 꾸준히 하고 계시군요! 필라테스 한 후 키가 1센티 컸다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ㅎㅎ 아마도 척추가 펴져서? 근육량 늘어난 것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5-02-06 08:27   좋아요 1 | URL
몇 년전에 비하면 요즘은 그나마 좀 적절히 섞어서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단짠단짠이랄까요^^;)
필라테스하면서 제 몸에게 미안함이 들었어요. 너무 안 써서 여기저기 뻑뻑 소리날 지경이었으니... 일단 목과 어깨, 허리가 많이 펴진 느낌입니다!ㅋㅋ 근육량 조금이지만 늘어서 저도 기뻐요. 괭 님도 운동 화이팅입니다^^

단발머리 2025-02-05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께서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오늘 저의 픽은 이 문장입니다. 저도 이런 말을 누구에게서든 듣고 싶어요~~
거리의화가님, 많이 읽으셨어요~ 많이 부럽습니다^^

단발머리 2025-02-05 19:30   좋아요 0 | URL
참, 눈 앞이 뿌연 증세는.... 저는 몇 년 전 독감을 앓은 이후에 그 증세가 나타났어요. 한달 이상 책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나아졌는데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어김없이 그 증세가 나타나더라구요. 전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그걸 노안이라고 보긴 어쩔지 모르겠지만(안경 쓴 사람에게는 노안이 늦게 온다는 말을 믿는 편) 아무튼 그렇습니다.
블루베리를 냉동실에 쟁이고 먹고 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5-02-06 08:32   좋아요 0 | URL
먹는 양은 평소와 비슷하고 운동량이 늘었으니 체지방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읽기는 했는데 그만큼 쓰지를 못했어요.

저도 안경과 한 몸인지 오래인데 노안이 늦게 온다는 말을 믿고 싶어집니다ㅎㅎ 아무래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저도 눈부터 많이 피곤해지더라구요. 블루베리 많이 먹고 조금이라도 노안이 늦게 오기를 바라봅니다^^;

새파랑 2025-02-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사람은 비타민 A를 드셔야 합니다~!!
어제 악령을 완독했습니다 ㅋ 재미있어서 시간가는줄도 몰랐네요!!!

거리의화가 2025-02-06 11:18   좋아요 1 | URL
ㅎㅎ 그러게요. 루테인 먹어야 한다고 주변에서 권하기는 하는데 저는 보조 식품은 믿지 않는 편이라 당근이나 블루베리 같은 것으로 많이 보충해야겠습니다.
악령 완독 축하드려요.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희선 2025-02-10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위가 거의 한주 간 듯하네요 이게 가면 따듯해진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것대로 걱정스럽습니다 아직 멀었지만 벌써부터 여름을 걱정했어요 더위보다 비를... 눈 많이 올 때도 그런 거 걱정했지만...

아버님 건강 좋아지시기를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님 책 즐겁게 만나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2-10 14:13   좋아요 1 | URL
이번에는 꽤나 오래 가는 추위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늘 낮에는 볕이 따뜻해서 좀 낫더라구요^^
한국에 4계절도 이제는 옛말인 것 같고... 추위와 더위만 있게 되버린 것 같습니다ㅠㅠ

아버지 건강 걱정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언제나 그렇듯 무탈한 게 제일인 것 같습니다. 희선 님도 행복한 독서 생활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