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병사들은 "불만을 품은 농민이나 도시 거주자였다." 병사들이 지내는 병영은 "노역의 쉰내"가 진동하는 "벽돌로 지은 우리"에 지나지 않았다.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몇 주간 이어진 먹구름과 혹한 끝에 갑자기 날씨가 좋아지고 해가 나자 페트로그라드의 거리에는 더 만은 사람이 몰려나왔다. 미리 계획한 대로 여러 여성 단체들이 시위에 나섰다.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이날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아니치코프 다리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모였다. 대부분 짧은 겉옷을 입고 높은 부츠를 신은 노동자들이었다. 창을 든 카자크 기마대는 열 명이 한 조를 이루어 다녔다. … 나는 아니치코프 다리를 건너 리테이니 대로로 향했다. 여기가 집회의 중심지였다. 그곳에는 수많은 노동자가 모여 있었고 거리는 엄청난 인파로 가득했다. … 카자크 기마대는 말을 이용해 사람들을 살짝 밀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가끔 보도 위로 올라가 구경꾼을 몰아내기도 했다.

그날 아침 시위대는 볼린스키 근위연대는 자신들이 검거한 병영 바로 옆에 있는 타브리 체스키궁의 국가 두마로 향했다. 반역자들은 거대한 건물군에 같같이 포함된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연대의 전열로 이동해 이들에게 함께 하자고 요청했다. 그리고 두 연대는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노동자들에게 건네주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 사람들은 봉기가 갑자기 혁명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무혈혁명"의 신화는 수도 내에서만 양측에서 100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6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싸움은 아스토리아 호텔 습격으로 끝났다. 이곳에 많은 장교와 장군들이 몸을 피하러 왔지만, 호텔 지붕에 배치된 경찰 저격수들이 군중을 자극해 학살에 말려들게 되었다.

전제군주제의 몰락에 크게 기뻐했던 지식인 집안의 한 노부인에게 시장에서 어떤 노점상이 말을 걸었다. "기독교인이세요?" 노점상이 물었다. "어때요, 삶이 좀 나아질 것 같나요?" 노부인이 답했다. "물론이죠." 노부인이 답했다. "오, 이봐요." 여자가 말했다. "유대인 놈들이 다 없어질 때까지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거예요.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문제는 다 유대인 놈들 때문이니까요."

제정의 붕괴는 무엇이든 제대로 작동하는 것에 붙어 있는 조작 장치를 임시정부 측에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정치적 무인지대에 세워졌다.

레닌은 계급적 적의 도움을 받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혁명 선전을 위해 독일 정부의 비밀 자금을 받으려고도 했다. 그래서 레닌은 자신이 타도하려 애쓰는 대상인 제국주의자의 도움을 받아 혁명가 서른 명과 프로이센 장교 두 명의 호송을 받으며 ‘봉인 열차’에 탔다.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거칠 필요는 없었다. 레닌은 부르주아와 임시정부가 너무 약해서 소비에트가 즉시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경찰과 군대, 관료제를 폐지하고 토지와 은행을 모두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중들은 레닌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며 경악했다. 레닌은 위선을 경멸했고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굳게 믿었다.

입헌군주제 성립에 실패한 밀류코프는 차르의 몰락이 적어도 병사들의 애국심과 전쟁에 승리하겠다는 결심을 부활시키기를 바랐다. 병사 대부분이 3월에는 전쟁이 계속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듯 보였지만, 임시정부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병사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4월이 되자 패전국은 배상금을 물고 영토를 빼앗기게 된다는 생각과 함께 전쟁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케렌스키는 자신의 미사여구에 심취해 자신만이 러시아군을 승리와 평화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했고, 많은 대중이 그렇게 믿게 했다.

당시 러시아 전역에 걸친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로 장교뿐 아니라 중산층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7월 7일 케렌스키가 황제 일가를 차르스코예셀로에서 시베리아의 토볼스크로 보내는 운명적 결정을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케렌스키는 지난 며칠간 벌어진 극좌 세력의 봉기로 군주제 지지자들이 반격에 나설까 봐 두려워했다.

현재 밝혀진 증거에 따르면, 소련 역사가들이 줄곧 주장한 것과 달리 코르닐로프는 쿠데타를 모의하지 않았다. 코르닐로프의 주요 목표는 임시정부를 강화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군 내외부의 많은 코르닐로프 지지자는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케렌스키를 몰아내고 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레닌이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 볼셰비키에 막 입당한 트로츠키는 당시 스탈린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당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트로츠키는 고압적 태도 때문에 동료들, 특히 카리스마가 덜한 스탈린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타고난 웅변가였던 트로츠키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예리하고 재치 있는 연설로 거대한 시르크 모데른 같은 페트로그라드의 커다란 홀을 가득 매운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트로츠키는 군중 사이에 누가 봐도 부르주아 혹은 ‘부르주이’ 같은 옷차림을 한 사람이 눈에 띄명 조롱하기를 즐겼다.

크라스노프가 진격할 때 이른바 ’구국혁명위원회‘(주로 우파 사회혁명당원으로 이루어진 조직)는 지지자들에게 볼셰비키 독재에 맞서 일어설 것을 촉구했다. 봉기에 합류한 제국군 장교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고, 반란군은 교관들에게 이끌려 나온 몇몇 사관학교의 사관생도들로 구성된 ’소년 십자군‘이었다. 일부는 갓 열네 살이었고 자기 키만 한 소총을 다뤘다.

볼셰비키는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하기는 했지만 총득표수의 4분의 1도 안 되는 1000만 표밖에 얻지 못해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이 결과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사회혁명당이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혁명당의 분열은 선거가 임박했을 때 일어나 대부분의 투표용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좌파 사회혁명당 다수는 볼셰비키와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분포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는 계급과 지역을 막론하고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볼셰비키에도 침투해 있었다. 하지만 차르 시대의 검은 백인대의 포그롬과 같은 극단적인 반유대주의가 분노한 유대인 젊은이들을 볼셰비키의 품에 떠민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 결과 내전에서 우익 장교, 카자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더 만은 포그롬을 일으켰고 증오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키예프의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잘 싸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실제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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