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수급이 빈곤네트워크의 의무통과점이 되었다고 내가 생각하는 까닭은, 정부 정책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서사,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모두 수급(기초법)을 경유해 그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공공부조의 수급자로 구획되면서 가난은 특정한 양식과 문법 안에 고이고 말았다. 빈곤을 우리 시대의 정치적 핵심 의제로 삼는 일은 그렇게 점차 요원해졌다. 빈곤이 ‘우리의 삶‘에서 ‘저들의 문제‘로고립되면서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빈곤을 끝 - P27

장내자는 결의를 압도해버렸다. - P28

의존성 논의가 복지 영역에서 특히 만연한 것은 사회복지야말로 후술할 사회적 빈곤‘ 의제와 조응하여 등장한 지식과 기술의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복지학 발전의 주요 참조국인 미국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전해온 사회공학과 개척 서 - P66

사를 중심에 둔 선별적 역사 서술이 결합하면서 자율적 개인과 독립을 이상으로 삼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자립‘을 숭배하고 ‘복지 의존welfare dependency‘을 경멸하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시선을 부과하는 담론 권력으로자리 잡고, 이들의 사회 안전망을 최소화하는 정치 전략으로 작동해왔다.(O‘Connor 2001; Fineman 2004)이러한 흐름에 맞서, 진보적 사회복지학자들은 의존의 보편성을환기하며 복지 의존에 씌우는 혐의를 거둘 것을 호소하기도 한다.
하지만 복지 의존을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증진할 수 있는 기초"
로 재정의하는 움직임(김병인 2017 88)이나 돌봄 윤리의 선언만으로 의존이 문제가 된 현실에 균열을 내기란 불가능하다. 복지가 직업화·제도화·산업화를 거치며 ‘성장한 역사란 뒤집어보자면 사회복지 체제 구축에 관여해온 종사자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 ‘의존해온 역사다. - P67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금융의 일상화로 투자가 주업이 된 사람들이 허다하고, 기술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임금노동의 비중은 계속 줄고 있지만, 빈곤 통치에서 임금노동이 갖는 위상은 여전히 견고하다. 노동이라는 기준이야말로 근대 빈곤 통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강제노역에서 근로연계복지에 이르기까지, 빈곤 통치의 역사는 인간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과 제도를 구축해온 과정이다. 여기엔 멀쩡한 노동자라면 수급을 신청할 이유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빈곤 통치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운동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계급은 물적 관계이지만 ‘노동자‘는 수많은 정체성 가운데 하나로 탈구된 지 오래이다 보니(신현우2022: 71) 이상적인 노동자의 ‘자격‘에 대한 암묵지를 발견하기도 어렵지 않다. - P105

인류학자들은 집home 을 건조물이나 자산에 국한하지 않고 일종의 희망이자 미래로, 세계에서 자기 자리place를 확보하려는 지속적노력과 꿈의 표현으로 봤다. 사람들은 집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물질성, 감정, 사회적 관계, 거주 실천의 교차 속에서 부단히 만들고, 이 실천 속에서 소속, 안전, 가치의 감각을 조율한다.(Samananiand Lenhard 2019 7) 이는 홈리스, 이주자, 난민에게 분명 더 위태롭고 고된 노동이다. 이 장에서 나는 가난한정으로서의 집‘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달리에서끼쳤는가를 살핀다. 집이 수많은 행위자의 실천이 매개된 결과라면, 과정으로서의 집을 기술하는 작업이란 이들의 실천이 더 너른공간과 더 긴 시간대에 걸쳐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었는가를 살피는 일이다.(Brun and Fábos 2015)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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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남아시아사 1권을 읽고 현재 2권을 읽고 있는 중이다. 1권과는 다른 느낌이어서 흥미롭게 읽어내려가고 있다.


오늘은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와 미얀마의 만달레이 부분을 읽었는데 '스투파'가 나오길래 검색을 했다.

그러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인도 미술 관련 전시(<스투파의 숲, 신비로운 인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공동기획으로 하는 전시이고 흔치 않은 주제의 전시인 것 같아서 호기심이 갔다.

작년 12월에 오픈을 해서 올해 4월 중순까지 한다. 아쉽게도 얼리버드 기간이 끝나 이제는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이 아니면 정가지만 착한 가격이라 상관 없다. 


미리 다녀온 사람의 후기를 찾아 보면서 구성도 흥미롭지만 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신경 쓴 조명이나 배치도 눈에 들어왔다. 

만약 검색을 하지 않았다면 전시를 지나치고 놓쳤을 것이다. 

예전에는 주기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전시를 보고 강연을 듣기도 했는데 이제는... 


이번에 가게 된다면 몇 년만에 가게 되는 것이라 여행하는 느낌으로 가게 될 것 같다. 




인도 미술을 아예 모르기 때문에 가기 전에 인도 미술 관련 책을 읽어보고 가는 것이 관람을 더 즐겁게 하는 방법이겠지.


이 시리즈는 진작 찜해둔 것인데 우선 순위에 밀려 아직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1권을 읽고 마음에 들면 이어서 읽어봐야지.










이번 주 내내 춥더니 그나마 오늘 낮에는 햇빛 때문에 살 것 같구나.

햋빛 쬐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고 어제 발매 된 곽진언 음반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금요일! 금요일은 어쨌든 금요일이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대출을 3권 빌렸는데 1권만 완독하고 1권은 진행중이고 1권은 아직 시작도 못했다. 

일주일 연장했는데 대출 기간이 또 임박...! 역시 도서관 대출은 2권까지가 적당한 것 같다. 3권 넘어가면 힘들군...


이 책들 포함해서 주말에는 열독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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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1-26 14: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곽진언의 앨범이 새로 나왔군요!
전시회 소식도 솔깃합니다. 정말 찾아보지 않으면 놓치는 전시, 공연들 많지요. 알고싶지 않은 광고는 넘치는데ㅎㅎ화가님 좋은정보 공유해 주셔서 감사해요.

거리의화가 2024-01-27 20:50   좋아요 1 | URL
네^^ 싱글은 몇 번 나왔는데 이렇게 모아서 내는 것은 오랜만이어서 반가웠네요^^
전시회 가본지가 어느새 1년이 다되어가서(서울 나가기가 왜 이리 힘든지ㅋㅋ) 아무튼 이번에 마음 먹고 가보려고 합니다.

페넬로페 2024-01-26 15: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시회 다녀와야 겠어요.
4월까지이니 날씨 따뜻해질때요~~
곽진언의 노래도 좋고요.
생각 같아서는 도서관에서 책 한 권만 빌려다 읽고 바로 반납하는 것이 젤 좋을 것 같은데 가면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주말 독서 화이팅입니다^^

거리의화가 2024-01-27 20:56   좋아요 2 | URL
날씨 따뜻할 때 전시회 좋겠어요^^ 저도 또 전시회 가본지가 좀 되어서 나들이 하는 기분이 될 것 같습니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1권은 이상하게 안 빌리게 되더라구요. 최소 2권 이상을 빌리게 되는데 가끔 함께 읽는 책들이 많을 때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 반납할 때는 정말 안 빌려야할 것 같아요. 집에 쌓인 책을 좀 치우려면!ㅋㅋㅋ

건수하 2024-01-26 2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공포의 권력>을 다 읽은 분의 여유가 느껴집니다...

스투파가 뭔지 몰라서 찾아봤어요. 인도네시아에서 ‘보로부두르‘ 라는 사원에 갔던 적이 있는데 거기 한 가운데 있던 게 스투파였나봅니다.
괜히 반가워서 댓글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4-01-27 20:55   좋아요 1 | URL
스투파가 끝이 뾰족한 불탑이라고 하더라구요ㅎㅎ 인도네시아 가보신 적이 있으시군요. 부럽습니다! 굉장히 넓은 나라라 갈 곳이 많더라구요.
주말에 <공포의 권력>을 읽기는 힘들 것 같았습니다. 완독을 했다기에도 찜찜함이 남지만ㅠㅠ 어쨌든 감사합니다 수하님!^^
 

계미 23

정월에 漢나라 군대가 宛물을 포위하였다. 春陵 戴侯의 曾孫 劉玄이 平林의 군중에 있으면서 이름을 更始將軍이라 하니, 이때 漢나라 군대가 이미10여 만이었다. 劉氏를 세워 사람들의 기대를 따르고자 하였는데, 南陽의호걸들과 王常 등은 모두 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新市와 林의 장수들은 방종한 것을 좋아하여, 의 위엄과 명철함을 두려워하고 劉玄의 나약함을 탐해서 먼저 함께 계책을 정하여 劉玄을 세웠다. 劉玄이 황제에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조회 받을 때에 부끄러워 땀이 흘렀으며 손을 들어올리고 말을 하지 못하니, 이로 말미암아 호걸들이 실망하여 대부분 복종하지 않았다. - ≪後漢書 齊武王傳≫에 나옴-3월에 偏將軍 등이定陵,
순행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王은 물과 尋을 보내서 군대를 징발하여지방을 평정하게 하고, 또여러 맹수인 호랑이. 표범무소 · 코끼리 등속을 몰고 가서 군대의 威武를.
돕게 하고는 이름을 百大軍이라 하여 군대를 풀어 昆陽을 포위하였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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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권8 본기 제8 경종 야율현 편


- 보령 2(970) 가을 7월에 우피실상온 야율현적을 북원추밀사로 삼았다.
-> 야율현적을 경종이 아낀 이유가 속자치통감에 상세히 나옴

- 보령 3(971) 봄 정월 갑인일에 우이리필(형부 관원) 해저가 사람을 보내 적렬(덕열륵부) 포로를 바치자, 조서를 내려 ‘공이 있는 장사들에게 하사하라.‘고 하였다.
-> 속자치통감에는 해저가 아니고 야율희달이라고 나옴

- 보령 3(971) 가을 7월 신축일에 북원추밀사 야율현적을 서북로초토사로 삼았다.
-> 야율현적에 대한 자세한 평가가 속자치통감에 나옴

신해일(10일)에 처사인 산조(酸棗, 河南 延津) 사람 왕소소(王昭素, 904~982)를 국자박사로 삼았는데 치사(致仕, 벼슬을 그만 둠)하였다.

왕소소는 젊어서 돈독하게 공부하였고, 지행(志行)을 갖고 있어서 황제가 그 이름을 듣고 불러서 편전에서 접견하였다. 그때 나이가 이미 70여 세였는데, 황제가 물었다.

"어찌해서 벼슬하지 않는가?"

왕소소는 사과하며 능력이 없다고 하였다. 건괘(乾卦)를 강론하게 하였더니 ‘구오비룡재천(九五飛龍在天)’34에 이르자 얼굴을 가다듬고 말하였다.

"이 효(爻)는 바로 폐하의 오늘날 일에 해당합니다."

증거를 끌어 와서는 이어서 미언대의(微言大義)의 뜻을 넌지시 간언하였다. 황제는 아주 기뻐하며 치세(治世)와 양신(養身)의 술책을 물으니 왕소소가 말하였다.

"치세는 백성을 아끼는 것만한 것이 없으며, 양신은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황제는 그가 말한 것을 아껴서 병풍 사이에 써 두고, 한 달이 넘게 남겨 두었는데, 자주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구하니 그러므로 이러한 명령을 한 것이다. 나이 89세에 집에서 죽었다.

요(遼)에서는 야율현적(耶律賢適, 928~980)을 북원추밀사로 삼았다. 야율현적은 일찍이 요주(遼主, 경종)를 번저(藩邸)에서 모셨었는데, 목종(穆宗, 재위; 951~969)이 포학하자 요주가 한광사(韓匡嗣, 918~983)·니리(尼?, 女里, ? ~978)와 더불어 노닐면서 말하다가 목종을 나무라는 말에 미치자, 야율현적은 일찌감치 의당 멀리하고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목종의 시기(猜忌)를 면할 수 있었는데 야율현적의 힘이었다. 요주가 처음으로 서자 대부분 제왕 가운데 혹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을 싹틔우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하고 몰래 야율현적을 심복으로 삼았으니, 그러한 연고로 이러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황제가 일찍이 유사에게 명령하여 명주(?州, 河北省 永年縣 東南)방어사 곽진(郭進, 922~979)을 위하여 집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무릇 정당(庭堂)에 모두 기와를 사용하였다.

유사가 말하였다.

"오직 친왕·공주만이 비로소 이러한 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화가 나서 말하였다.

"곽진은 서산(西山)에서 요새를 장악하고 10년을 넘게 있으면서 나로 하여금 북쪽을 돌아보는 걱정을 없게 하였는데, 내가 곽진을 보는 것이 어찌 딸보다 적겠는가! 빨리 가서 공역을 감독하고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남당주(南唐主)가 다시 편지를 써서 남한주(南漢主) 유창(劉?, 942~980)에게 중국에 귀순하라고 깨우쳐 주고 급사중 공신의(?愼儀)를 파견하여 사자로 가게 하였다. 유창이 편지를 받고 크게 화를 내고 드디어 공신의를 가두고 역을 통하여 남당주에게 답장을 써서 보냈는데 아주 불손하였다. 남당주는 그 편지를 올려 보내자 황제는 비로소 그를 칠 것을 마음으로 결정하였다.

소사온이 죽자 요주(遼主)는 황후 때문에 도적을 잡는 일을 아주 급히 서둘렀는데, 신축일(3일)에 국구(國舅)인 소합제(蕭哈濟)와 소합리(蕭哈里, 海只)가 소사온을 죽이기로 모의하였다는 상황을 찾아내서 모두 복주(伏誅)하고 그의 동생인 소신도(蕭神覩)를 황룡주(黃龍州, 吉林省 四平市)로 유배 보냈고, 곧 역시 그를 주살하였다.

전흠조는 요(遼)와 만성(滿城, 河北省 保定市에 속함, 河北省 中部 太行山 동쪽 기슭에 위치)에서 싸웠는데 요의 기병이 조금 물러나자 이긴 기세를 타고 수성(遂城, 河北省 保定市 徐水縣)에 이렀다. 전흠조는 흐르는 화살을 맞고 말에서 넘어지자 기사(騎士)인 왕초(王超)가 말을 전흠조에게 주니 군대는 다시 떨쳤다. 아침부터 포시(?時, 오후 4시)까지 죽이고 상처를 입힌 것이 아주 많았으며 밤에는 수성에 들어가서 지켰는데, 요나라 사람들이 그곳을 포위하였다.

며칠이 되자 전흠조는 성 안에 식량이 적은 것을 헤아리고 군사를 정돈하여 남문을 열고 그 한쪽 귀퉁이에서 포위를 뚫고 나갔다. 이날 저녁에 보채(保寨, 보호 받을 수 있는 영채)에 도착하였는데, 군대 안에는 화살 하나도 잃지 않았다. 북방으로 말이 전해지기를 3천 명이 6만을 깨뜨렸다고 하였다.

계해일(25일)에 주문이 도착하니 황제가 기뻐하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거란이 자주 변경에 들어와서 노략질하는데 내가 20필의 비단을 가지고 거란 사람의 머리 하나를 사려고 한다면 그들의 정병은 10만 명에 불과하니 비용은 단지 견(絹) 200만이면 적은 다 없어질 것이다."

이로부터 변방의 대비를 더욱 닦았다.

남한의 도통 이승악(李承渥)이 군사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봉화봉(蓬華峯) 아래에 주둔하면서 코끼리를 훈련시켜서 진을 치도록 하여, 매 코끼리마다 10여 명씩을 실었는데 모두가 병장기(兵仗器)를 잡고 있었고, 싸우게 되면 진(陣)의 앞에 두면서, 큰 것으로 군대의 위엄을 삼았다.

반미가 군사들 가운데 있는 경노(勁弩)를 찾아서 그것을 쏘게 하자 코끼리는 달아나면서 올라 탄 사람을 흔들자 모두 떨어졌고, 도리어 이승악의 군사들을 밟으니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다.

신미일(5일)에 군사가 백전(白田)에 도착하였는데, 남한의 주군이 소복(素服)을 하고 나와서 항복하니 반미는 승제(承制)하여 그를 풀어 주었다. 드디어 광주(廣州)로 들어가서 종실(宗室)·관속 97명을 포로로 잡고, 남한의 주군과 더불어 모두 용덕궁(龍德宮)에 묶어두었다.

유보흥은 처음에는 백성들 사이에 숨었지만 후에 마침내 그를 붙잡았다. 환관 100여 명이 옷을 잘 차려 입고 뵙기를 청하자 반미가 말하였다.

"이렇게 탁인(?人, 환관)이 많은데 나는 조서를 받들어서 죄진 사람을 치려했으니,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명령을 내려서 그들을 모두 목 베었다.

신축일(8일)에 요(遼)에서는 야율현적(耶律賢適, 928~980)을 서북로(西北路)병마도부서로 삼았다. 야율현적은 충성스럽고 굳세며 아름답고 민첩하고, 정성을 미루어 다른 사람을 대우하니 비록 한가한 휴식시간에도 정치를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관청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감히 구차하거나 게으른 일이 없었으며 몇 년 동안 쌓아 온 옥사를 모두 해결하였다.

요(遼)의 세종은 야율찰극(耶律察克, 察割, ? ~951)에게 시해되었는데, 요주(遼主)는 그때에 네 살이어서 어떤 사람이 양탄자로 싸서 쌓아 놓은 장작 밑에 숨겨 두어서 죽음을 면하였다. 뒤에 영흥궁(永興宮)에서 자랐는데, 보부(保傅, 보모와 스승)가 된 사람들이 모두 은덕을 베풀었다. 9월 을사일(13일)에 요주(遼主)가 부부(傅父)·보모(保母) 등에게 호구와 우양(牛羊)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또 잠저(潛邸, 등극 전의 저택)시절의 급사(給使)였던 사람들을 탑마부(塔瑪部)로 삼고 관리를 두어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임자일(20일)에 요주(遼主)가 귀화주(歸化州, 武州, 山西省 ?州市)에 갔다. 갑인일(22일)에 남경(南京, 幽州, 北京)에 갔다. 상경(上京, 內蒙古 巴林左旗 林東鎭南)유수 한광사(韓匡嗣, 918~983)를 남경으로 옮기고 바로 그의 아들 한덕양(韓德讓, 941~1011)을 대신 동경유수로 삼았다.

을사일(2일)에 요(遼)의 북원추밀사인 소사온(蕭思溫, ? ~970)을 위왕(魏王)에 책봉하고 북원대왕 야율오진(耶律烏眞, 屋質, 915~973)에게 유열(裕悅, 于越)을 덧붙여 주었다.

요(遼)에서는 한광사(韓匡嗣, 918~983)를 상경(上京, 內蒙古 赤峰市 巴林左旗 林東鎭)유수로 삼았는데, 번저(藩邸)에 있을 때의 옛 은혜를 이용한 것이다. 얼마 안 되어 연왕(燕王)에 책봉하였다. 한광사는 그 아들 한덕양(韓德讓, 耶律隆運, 941~1011)으로 하여

금 입시하게 하였는데 요주(遼主)는 삼가며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을 덧붙여 주어 추밀원통사(樞密院通事)에 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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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lude, ch1

만일 여성의 무능 정도를, 이를테면 셋 이상의 수는 세지 못한다는 식으로 엄격하게 한정할 수 있다면, 여성의 사회적 운명도 과학적 확신을 가지고 취급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모호함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리고 그 편차는, 여성의 머리 모양과 여성이 좋아하는 시와 산문으로 된 러브 스토리는 모두 같다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


여자는 자기주장이 약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여자가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보호막은 자기 의견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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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1-23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미들마치 전에 사두셨나봐요. 부지런히 읽으시는 모습에 자극받습니다 ☺️

단발머리 2024-01-23 22:20   좋아요 1 | URL
저두 동감입니다! 미들마치 두께가 상당한데 말이에요!! 😉

거리의화가 2024-01-24 09:27   좋아요 2 | URL
네^^ 원서는 몇 달 전에 사 두었고 번역본은 비교하면서 고민하다 얼마 전 샀거든요. 두께 때문에 꽤나 시일이 걸릴 것 같지만 쉬엄 쉬엄 읽으려고 합니다. 아무튼 Prelude 부터 문장들이 좋아 머리가 확 깨는 느낌이고 등장 인물들 묘사도 흥미롭네요^^

건수하 2024-01-24 09:31   좋아요 1 | URL
앗 그럼 민음사판 나온 다음에 사신 거군요~ 저걸 고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

거리의화가 2024-01-24 21:05   좋아요 2 | URL
번역은 제가 둘 다 비교 분석한 게 아니라서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다만 이 번역본이 각주가 친절한 것 같아서 선택했습니다.

건수하 2024-01-24 21:19   좋아요 1 | URL
전 너무 두꺼워서 오래된 번역이라 민음사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각주가 친절하다는 건 큰 장점이네요. 답변 감사해요 화가님 :)

2024-01-24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24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미 2024-01-24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들마치 압축판? 읽고 훌륭한 문장이 워낙 많아서 제대로 읽어보고싶다 생각했는데 화가님은 원서까지! 멋집니다!!
원서 일단 구매라도 해둘까요?🙄

거리의화가 2024-01-24 21:02   좋아요 2 | URL
압축판은 아무래도 아쉽죠^^ 어려워도 정본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원서 난이도가 있어서 쉬엄 쉬엄 읽을까 해요. 그래도 줄거리 까먹으면 안되니까 찬찬히ㅎㅎ 문장 앞부분만 읽었는데도 압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