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에서는 도시란 유기체와 같다는 얘기가 많았다. 이런 관점이 도시사회학의 초기 사상 가운데 하나였다. ‘현대성’을 도시의 외재적 기준으로 삼는 건 문제가 있다. 역사학자가 이런 기준을 추종한다면 어떤 상업도시 또는 공업도시가 흥기할 때 역사학자는 새로운 ‘도시인’의 열정과 옛 엘리트(토지귀족 또는 고위관료)의 혐오 가운데서 어느 한쪽에 쉽게 동조하게 된다.
‘낙후성’의 의미는 복잡하다. 한 도시를 두고 ‘큰 마을’이라고 한다면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일까. 모스크바나 베이징에 온 서유럽인은 그 사회의 구조가 자신들의 사회와는 다르다는 것 때문에 도시경관이 촌스럽다고 경멸하기 쉽다. - P895

조셉 컨비츠의 이론에 따르면 도시계획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개발형 계획’은 도시의 윤곽과 포괄적인 심미적 이미지를 중시한다. ‘관리형 계획’은 도시를 끊임없는 기술적 사회적 관리가 필요한 공간으로 본다. 둘의 공통점은 도시계획 전문가 집단의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며 이 집단이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관리형 도시계획은 19세기 80년대에 유럽과 북아메라카에서 등장했다. 도시 엘리트들은 도시 위생을 위한 초기적 조치가 필요하며, 도시 전체의 환경문제를 상시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술적 문제와 사회적 정책을 체계적 통합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관점이 조정되지 않은 개별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의 논리를 압도했다.
개발형 도시계획은 유럽의 최근 발명품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내려온 방식이었다. 획일적인 공간배치가 개발형 계획의 간단하고도 효과 높은 방식이었다. 소소의 예외를 제외하고 이 방식은 직사각형 세포의 증식분열 논리를 따랐다. - P902

개발형 도시계획이 다시 흐름을 형성했다. 형식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는 도심지역에 대한 외과수술식 개입을 통해 원대한 미학적 구상을 실현하려는 오스망 방식. - P904

수년동안 오스망의 목표와 방식은 논쟁의 중심이었다. 최종적인 결과가 증명하듯 그의 방식은 정확했고 그가 제시한 도시계획ㅇ 이념은 유럽 전체가 모방하는 표본이 되었다. - P905

도시개조에 대한 오스망의 열정은 세 분야에서—기하학 특히 직선에 대한 집착, 실용과 쾌적성을 겸비한 공간에 대한 꿈(마차의 흐름이 완만하고 행인이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가로수길), 파리를 세계 최고의 도시로 만들려는 야심—구체화되었다.
오스망과 동료들은 도시 전체의 개조를 위해 쏟은 기술적 노력에 못지 않게 미학적 세부 요소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17, 18세기 파리 고전주의의 면모를 현대적 대도시 환경에 훌륭하게 접합시켰다.

도시계획의 두 번째 형식에서는 독일적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독일에서는 계획을 중시하는 전통과 지방정부의 강한 권위가 하나로 합쳐졌다.
독일형 도시계획은 도심지의 대규모 개조보다는 외곽의 성장에 중점을 두었다. 본질적으로 독일의 도시계획은 확장에 대비한 계획이었다. - P907

독일식 도시계획은 사회적 공간, 운송체계, 미학적 조화, 사유 부동산의 기부 등 모든 분야가 총체적인 조화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P908

뉴델리에서 건축가 에드윈 루티엔스와 허버트 베이커는 현지의 계획부서 인원과 인도 노동자 3만 명의 도움을 받아 식민종주국인 영국은 물론 대영제국의 판도 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건하에서 도시의 거대한 미래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냈다.
루티엔스와 베이커의 뉴델리는 여러 양식의 통합체였다. 도시는 현지인들이 수용하는 외국의 건축언어와 인도의 고유한 요소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 P909

근대 이전 시기에 이미 ‘유럽’ ‘중국’ ‘이슬람’ 도시의 구분이 선명성을 잃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도시의 기능적 유사성은 문화적 특수성에 못지않게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극단으로 확대시켜 전 세계의 모든 도시가 ‘융합체’ 또는 ‘혼성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경박한 인식이다. 유럽의 인구이동과 군사적 경제적 확장을 배경으로 하여 많은 경향이 전 세계의 도시로 퍼져나갔지만 이런 현상이 모두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부산물은 아니었다. 유럽 이외의 비식민지(아르헨티나, 멕시코, 일본, 오스만제국) 국가의 도시로 눈길을 돌려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미래 도시의 청사진은 대서양권, 지중해권, 태평양권, 유라시아권 등 갈수록 넓은 지역적 맥락으로 그려져 왔다. ‘식민도시’는 더 이상 도시유형을 분류하는 정의로서 유효하지 않고 ‘서방’과 ‘동방’이란 과감한 이분법은 이제 논거를 상실했다. 오직 서방의 시각에서 볼 때만 이런 구분이 가능하다. - P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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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전의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방어시설이 지켜주는 공간이었다. 성벽은 군사적 목적을 상실한 뒤에도 관세구역의 경계로서 기능을 이어갔다. 이 기능까지도 필요없게 된 뒤에는 공간의 상징적 표지로 남았다. 역사적으로 모든 제국은 성벽을 쌓을 수 있는 기술 조직 재정 능력 덕분에 주변의 ‘야만인’을 복종시키고 패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야만인은 성벽을 허물 줄은 알아도 성벽을 쌓을 줄은 몰랐다. 성벽과 성문은 도시와 농촌, 집약과 분산을 가르는 경계였다. - P867

인류가 발명한 사회기반시설 가운데서 그 어떤 것도 도시구조를 파괴하는 데 철도만큼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철도의 등장으로 "전통 도시의 내부 구조가 처음으로 열상을 입었다." - P874

사람들이 철도건설에 열정을 보였던 이유는 철도와 역이 도시 내부로 들어오면서 건설에 방대한 양의 토지가 필요했고 이 때문에 도시의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도시 내부의 철도와 기차역 공사가 끝났을 무렵에 영국의 철도회사가 소유한 토지는 도시 전체 면적의 5퍼센트에서 9퍼센트 사이였고 추가로 10퍼센트 정도의 토지에 대해 간접적인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철도는 거대한 뱀처럼 도시 안으로 파고들어와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처음에는 도시 안에 철도와 역을 건설하면 빈민가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현실의 결과는 달랐다. 철거민의 이주대책에 대해서는 누구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 P875

마차는 도시교통에서 중요한 초기의 발명품이었다. 마차 운영에는 특별한 선진기술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민간 마차주가 상업적 서비스를 제공했다.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노선을 정해진 가격으로 운행하는 교통수단으로서의 마차는 미국인의 발명품이었고 1832년에 처음으로 뉴욕 거리에 나타났다. 그로부터 24년 후에 도시 여객마차가 파리의 거리에 등장했다. 마차 운임은 운영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비쌀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말이 끄는 버스의 속도는 빨라야 사람의 평균 보행속도의 두 배를 넘지 못했다. 마차는 또한 많은 양의 말똥을 쏟아냈다. - P879

궤도전차의 등장은 도시의 시내 교통에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가져왔다. 궤도전차의 속도는 마차철도보다 두 배나 빠르면서도 요금은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집 앞에서 전차를 타고 공장으로 출근하는 일이 현실이 되었다. - P883

19세기 말, 인류는 아직 자동차 시대에 진입하지 못했다. 자동차라고 하는 새로운 기술혁신이 처음에는 미국에서, 다음으로는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문자 그대로 도시의 폭발을 불러왔다. - P884

지하철은 철도기술과 하수도 공사를 통해 터득한 터널기술이 결합된 산물이었다. 런던 지하철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도시계획자가 마련한 구상이 아니라 찰스 피어슨이란 개인이 제시한 창의적인 아이디어였다.
최초의 지하철에는 창문도 없는 열차를 증기기관차가 앞에서 끌었다. 폐쇄된 터널 안에서 이런 기술은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열차 안의 조명은 석유등이나 가스등이라 매우 어두웠고 열차가 만석이 되면 경사면을 오를 때 기관차가 멈추거나 후퇴하는 경우도 있었다. 도시의 부동산 거물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 위나 아래로 지하철이 지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철도도 그랬지만 지하철도 처음에는 회의론자들의 비판의 대상이었다. - P885

교외화는 도시 주변지역의 발전 속도가 중심지역을 초월하는 과정, 그래서 도심지와 교외지역 사이를 이동하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방식이 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대략 1815년에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최종적으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반면에 유럽인은 도심에서 벗어난 곳에 거주하는 데 관심을 갖지 않았다. - P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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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는 20세기 후반에는 공항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라와 나라 사이, 대륙과 대륙 사이 거래와 교류의 핵심 접촉점이었다. 먼 나라를 건너온 여행자가 이국에 도착한 후 첫 번째로 보게 되는 것은 부두의 각종 시설과 항구 연안의 건축물이었으며, 여행자가 처음 만나는 사람은 세관 직원, 부두의 짐꾼이었다. 여객, 화물, 대륙을 넘는 이민의 무리가 몇 배로 늘어나면서 해운업의 중요성은 규모면에서나 문화적 의미에서도 전례 없이 높아졌다. - P826

새로운 항구는 특수한 세계를 형성했다. 곳곳에 화물이 산처럼 쌓였고, 쿨리들이 맨몸으로 짐을 날랐고, 가끔씩 기계도 보였다. 그곳은 상류사회 사람들과 가족을 이끌고 이민하는 사람들이 배에 오르고 내리는 부두와는 단절되어 있었다. 두 부두는 각기 독립된 세계였다. - P832

사회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항구도시(특히 점진적으로 공업화한 항구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노동시장의 다양성과 유동성이다. 이런 도시에서 노동력 수요의 출처는 매우 다양했다. 선원에서 짐꾼까지, 조선소의 숙련기술자에서부터 경공업 분야의 비숙련 노동자까지, 선장과 1등 항해사에서부터 도항사와 항구공사 기술자까지, 그리고 온갖 종류의 서비스업이 존재했다.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었다. - P834

식민시대 초기의 건축은 아시아의 건축언어와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프랑스 식민자들은 호치민에서는 정치적 메시지를 확고하게 전달하기 위해 베트남식 건축 요소를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그들의 의도는 프랑스 문명의 우수성을 베트남 전체에 전파하고 전 세계에 프랑스 문화의 매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코린트 양식, 네오고딕 양식, 초기 바로크 양식 등 각종 건축 양식이 뒤섞였다. 같은 시기에 영국령 인도에서도 역사적 전통을 대하는 태도에 거리낌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최소한 영국식, 프랑스식, 베네치아식 고딕 양식에다 이른바 ‘인도-사라센’ 양식이란 건축 요소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있었다. - P844

식민도시의 많은 특징은 있다와 없다로 나누는 ‘2진법’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정리되어야 한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식민도시의 격리 혹은 ‘종족적 분리’를 주목하고 어떤 역사학자들은 다른 문화의 혼합, 융합 또는 이종교배를 주목하여 여러 대형 식민도시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찬양한다.
어느 쪽을 주목하든 둘 사이에는 미세한 여러 층차가 존재한다. 식민도시의 사회적 구성요소는 원칙적으로 식민자와 피식민자 둘로 나뉘지만 그것이 생활의 모든 용역을 빠짐없이 규정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위계와 종족적 위계는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 겹친다. 인종차별이 성행하던 시대에도 피부색과 종족적 동질성이 계급적 차이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했다. - P847

‘식민도시’의 이상형이란 분명한 윤곽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식민지에 있는 도시라고 해서 모두가 전형적인 식민도시는 아니다. 그리고 유사한 기능을 가진, 식민지에 있는 도시와 비식민지에 있는 도시 사이의 차이가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도 안 된다. - P850

19세기 식민주의가 만들어낸 놀랍고도 새로운 형식의 식민지는 통상항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통치자들은 외국인의 무역활동을 특정 지역에 한정하고 엄격하게 감시 통제했다. 중국, 일본, 조선이 1840년부터 잇달아 국제무역을 개방하기 시작한 뒤로 열정적인 자유무역 신봉자라도 시장의 힘만 믿었다가는 이 새로운 경제 공간에 ‘침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수한 제도가 필요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한 위협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온갖 종류의 국제적 협의—실제로는 ‘불평등조약’—를 거쳐 서방 상인들에게 일방적인 특권이 주어졌다. 그중 가장 중요한 특권은 아시아 국가의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치외법권이었다. 이 밖에도 서방은 자신의 무역관리 기구를 만들어 소재국 정부가 관세정책을 통해 가하는 통제를 벗어날 수 있었다. - P853

로우(미국의 중국학, 도시사 학자: 1947~)의 훌륭한 분석에 따르면, 1861년 개항 이전의 한커우는 서방 사회학에서 주장하는 정태적이며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정부의 절대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동방도시’가 결코 아니었으며 또한 1861년 이후의 한커우는 절대로 전형적인 ‘식민도시’도 아니었다. 한커우 사회는 외래 인구의 유입을 받아들여 보다 다원적인 도시가 되었으며, 지역 엘리트가 주도하여 사회 저층 집단도 소외되지 않고 자신의 활동 영역을 찾을 수 있는 공동체를 발전시켰다. - P862

식민도시는 제국도시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제국도시는 제국의 통치 중심이자 식민자의 권력의 원천이었ㄷ. 제국도시의 정의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제국도시는 정치권력의 중심이자 정보의 집결지다. 제국과 경제적으로 의존적인 주변부의 비대칭적 관계에서 생겨난 기생적인 수혜자이며, 또한 지배이념의 상징적 전시장이다. - P864

도시계획과 건축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런던은 제국의 수도라 할 수 없었다. ‘제국적’ 특징은 런던의 다른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항구와 부두에서 일하는 수많은 아시아계와 아프리카계 노동자, 런던 시내를 관광하는 다양한 피부색의 여행객, 식민지에서 귀국한 관리들의 이국정취가 넘치는 생활방식, 음악당에서 연주되는 해외 작곡가들의 작품이 런던의 진정한 제국적 위상을 반영했다. 제국의 핵심 실력이 최대한 빛을 발한 곳은 밤거리를 밝혀주는 가스등이었다. 런던은 허세를 부릴 필요가 없었다. - P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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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고대의 기원이자 현대의 요람이다. 도시는 그 주변을 이끌어가고, 권력을 행사하고, ‘상대적’으로 진취적이기 때문에 우월한 위치에 서 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19세기의 도시에서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 P760

도시는 지구의 보편적 현상이다. 국가는 유럽인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도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도시문화는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났다. 중동의 나일강 유역과 지중해 동부, 중국과 인도, 훨씬 훗날의 일본, 중부아메리카, 사하라 이남지역에서 각기 독자적인 도시문화가 형성되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농업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었다.
도시의 물리적 형태와 생활방식은 유럽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다. 유럽에서 발생한 ‘근대적인’ 도시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만 거의 하나도 예외도 없이 강인한 토착 도시문화와 충돌했다. - P763

19세기 동안 ‘도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특히 19세기 후반은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된 시기였다. 역사상 어떤 시대도 사회생활에서 19세기와 같은 공간 밀도의 변화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도시인구의 증가속도는 이전 몇 세기보다 훨씬 빨랐다. 영토가 광활한 몇몇 국가에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도시 주민의 생활방식이 경제와 문화 영역에서 주도적인 생활방식이 되었다. - P764

도시의 찬란한 현대성은 (긴 역사에 비추어보면) 순간일 분이다. 때로는 현대성이 지속된 기간은 수십 년에 불과했다. 현대성은 질서와 혼란의 평형, 인구의 유입과 유효한 기술구조의 융합, 구조화되지 않은 공공 공간의 개방, 탐색과 시험 가운데서 흘러나온 에너지였다. 현대화의 전제는 ‘전통’ 시대가 끝났을 때에도 도시가 여전히 특정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비도시와 구분되는 특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광대한 면적과 분산된 인구, 여러 개의 위성도시로 구성된 다축 방사형 거대도시에는 내부의 경계도 외부의 경계도 모호하고, 도시의 착취대상이자 도시주민이 ‘소풍’이란 명분으로 소비했던 교외지역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의 19세기는 대도시의 형성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 P771

지금까지 도시화는 기계화된 공장식 생산의 보편화와 함께하는 도시 규모의 급속한 성장이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도시화와 공업화는 동전의 양면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관점은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 오늘날 도시화란 더 넓은 의미에서 사회발전의 가속화, 인구 밀도의 증가, 전혀 다른 환경 아래서 진행되는 사회구조의 재편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인간이 더 긴밀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의 형성이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더 빠르게 정보를 교환하고, 그것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양호한 제도적 환경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 P773

근대 초기에 유럽 도시 인구의 절대치는 중국 일본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동아시아에는 더 많은 거대도시가 있었다. 유럽은 1550년 이후 첫 번째의 도시화 물결을 경험했고 1750년 이후 두 번째의 물결을 경험했다. 도시인구의 비중은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두 배로 높아졌다. 1650~1750년에 유럽의 도시화 정도는 일본에 비해 약간 낮았고, 장강 하류지역과는 근접했고 중국 전체의 수준보다는 높았다. - P782

도시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흔히 비교분석을 통해 도시의 구조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관심사는, 대 중 소도시 사이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협조적’이냐 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19세기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온전한’ 도시 등급체계가 있었다. 코펜하겐과 스톡홀름으로 대표되는 덴마크와 스웨덴은 이런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상트페테르부르크(1913년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와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큰 도시라고 할만한 게 없었다. 19세기 90년대 러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사라토프의 인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1/10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 중앙권력의 명령에 따라 건설된 전형적인 주청부 청사 소재지인 이 도시는 주로 행정과 군사적 고려에서 나왔고 그 기능 또한 시종 이 범주를 넘지 않았다. 역동적이었던 제정시대 말기에도 이 도시의 인구는 5만 명을 넘지 않았다. 등급이 분명한 도시체계가 없는 것이 러시아 현대화의 중요한 장애였다. 일본은 반면에 등급이 분명한 도시 계보의 이상에 비교적 근접한 나라였다. 중국도 역사적으로 이런 특징을 갖추었으나 19세기에 인구 1~2만 명 사이의 소도시는 중국에서 찾기 어려웠고, 대도시의 빠른 성장도 소수 대도시에 국한되었으며, 이 도시들조차도 한결같이 해안지역 또는 해안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 P784

한 사회의 탈도시화는 개별 도시의 위축을 수반한다. - P789

19세기에 도시의 성장은 과거의 어떤 시기보다도 시장과 민간 추진력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역동적인 몇몇 대도시의 성장은 ‘민간부문’의 역량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런 도시는 더는 권력과 귀족문화의 중심이 아니라 정치적 위상이 높은 도시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 P794

대부분의 도시체계는 개방적이었다. 19세기에 민족국가가 이미 형성된 지역에서는 국가는 점차 국가경제의 조직자로 진화해갔고 도시의 공업화는 국가경제 안에서 역할의 중요도가 높아갔다. 이와 동시에 ‘거대’도시는 교역 이주 통신의 국제적 네트워크와 직접 연결되었다. 대도시는 자본의 집적과 분배를 담당하고 동시에 ‘국가 간’ 연결의 기반 역할을 했다. 도시의 발전은 국가형성의 직접적인 결과도 아니고 공업화의 부수현상도 아니다. - P796

도시체계의 함의는 두 가지 방식—수직과 수평—으로 해석될 수 있다. 수직적 해석은 피라미드 모형을 차용한다. 가장 밑바닥에는 무수한 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정상에는 핵심 지역이 자리잡고 있다. 중간에 규모에 따라 여러 정착지가 계층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농촌의 정기 시장도 있고, 고정된 시장 조직을 갖춘 소도시도 있고, 서비스와 관리기능을 함께 갖춘 중형 도시도 있다. 수평적 해석에서는 도시 사이의 관계, 도시가 소속되어 있으면서 도시 기능과 발전을 지원하는 네트워크를 관찰 대상으로 한다. - P798

한 도시가 일정 규모를 넘어서게 되면 단일한 기능으로 그 도시의 성격을 분류하기 쉽지 않다. 이때 도시는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도시는 흔히 다원적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노동력을 고도로 특화된 분야에 집중하는 도시가 있다. - P803

한 국가의 수도는 인구의 다소에 관계없이 정치적 군사적 권력 중심으로서 다른 도시와 구분된다. 그 밖의 특징도 모두 여기서 비롯된다. 수도는 최고 통치자의 거주지이며 중앙 관료기구의 소재지이다. 수도의 노동시장은 흔히 다른 도시에 비해 서비스업에 기울어 있다. 수도에서 사는 주민들에게 통치자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어떤 정치체제이든 수도는 대중정치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 P809

19세기에 지구상에서 극히 소수의 도시만 런던과 파리 모형을 따라 각종 기능을 한곳으로 집결시킨 전능형 도시로 발전했다.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활력이 넘치는 대도시라도(예컨대, 도쿄와 빈) ‘제2도시’와의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로마에서는 이원관계의 연원이 다른 곳에 있었는데, 그것은 세속정권과 바티칸 사이의 대립이었다. - P814

19세기 30, 40년대의 맨체스터가 ‘충격의 도시’라고 불렸던 이유는 도시의 구체적 공간 때문이었다. 이 도시에 들어선 많은 7층 높이의 공장건물들은 미학적 고려나 도시경관과의 조화라는 개념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이런 풍경이 흔하게 늘어선 곳은 도시의 중심지역이 아니라 교외지역이었다.
어떤 도시는 완전히 공업지역으로서 건설되었고 오랫돈안 공업이 도시의 유일한 존재목적이었다. - P820

맨체스터, 버밍엄, 리즈 같은 도시는 대중의 참여라는 자신만의 자원을 동원하여 공업화 초기단계에서의 혼란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 도시는 박물관과 시립대학을 설립하여 공동체 기반시설을 개선했으며, 위엄 있는 건물을 세워 장소의 권위를 높였다. 공장지역 주거지의 형태는 다양했다. 대형 공업도시의 빈민굴처럼 생활환경이 열악한 원시적인 판자촌도 있었지만 작업장과 노동자들의 주거환경이 견딜만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기업적 가부장제의 전시장으로서 공장주도 함께 사는 주거지역이 있었다. - P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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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21년이 다 끝나가고 있다.


오늘은 회사 자체적으로 일괄 연차 쓰고 휴무라

여유 있게 일어나서 집안일 좀 하다가 먹다 놀다 책 한 권 읽으니 하루가 후딱 갔다.

2021년 마지막날이라고 해서 별다를 것은 없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일상을 어떻게 보내는가 삶의 모습들이 다를뿐.


춥기는 해도 미세먼지 없고 께끗해서

오후에는 길을 걸었다.

잘 안 움직이지만 걷는 것은 좋아한다.

발목이 좀 좋지 않아서 아주 많이 걷지는 못하지만 만보 정도는 괜찮다.

나온 김에 다이소 가서 이것저것 눈요기도 하고

커피 테이크아웃해서 길을 걷는데 참 좋았다.



- 알라딘 인문 레터에서 건진 책들


고려사 전문 박종기 선생님께서 고려사만이 아닌 이후 사료들을 통해서 입체적으로 본 고려사 인물 열전을 펴냈다.

고려사 시기별로 몇 명의 인물을 뽑았다.


이미 보관함에 담아둔 책이지만 보자마자 반가워서^^

이리가레의 철학박사 학위논문인 『반사경』은 수많은 남성 철학자 및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을 남근중심주의 담론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하며 서양철학사를 새롭게 다시 쓴 문제적 저작이라고.

11월에 읽었던 하나이지 않은 성 처음부터 막혀서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 좀 도움이 될까 싶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들이 자유주의에 등을 돌리고 좌경화된 까닭을 담고 있다 한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밀레니얼 세대들은 어떠한가 비교하는 지점도 생길 것 같다.




이렇게 2021년이 저물고 있다.

2022년도 건강하게,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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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31 22: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괄연차 좋네요~!! 날씨가 춥고 발목도 안좋으신데 만보나 걸으셨다니~! 21년 마지막남은 두시간 잘 보내시고 22년 복 많이 받으세요 ^^

거리의화가 2021-12-31 22:23   좋아요 3 | URL
네 꿀휴가를 보냈습니다. 날씨는 추운데 낮에 돌아다닌거라 괜찮았어요ㅋㅋ
새파랑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년에도 화이팅입니다!

mini74 2021-12-31 2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득템하신건가요. 내년엔 발목 좋아지시길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거리의화가 2022-01-01 07:26   좋아요 0 | URL
네 매주 알라딘 인문 레터를 받고 있는데 그 와중 괜찮은 책들은 찜해놓고 읽곤 해요 발목은 예전에 일본 갔다가 너무 많이 걸어서 발목에 염증이 생긴 이후로는 컨디션이 안 좋거나 무리해서 걸으면 발목이 시큰해지더라구요. 미니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cott 2021-12-3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별다를것 없었던 마지막날이였지만 화가님
2022년 새해 행복가득 복🐯 마뉘

거리의화가 2022-01-01 07:27   좋아요 1 | URL
별다를 것 없는 하루가 요즘은 제일인 것 같아요 건강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게 행복인 것 같습니다. 스콧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책읽는나무 2022-01-01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화가님^^
평범한 하루 하루도 알고 보면 소중한 하루인 거겠죠?
올 한 해도 평안하시고 행복하시길요♡

거리의화가 2022-01-01 09:29   좋아요 1 | URL
네네 나무님도 매일 소중한 일상 만들어나가시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레이스 2022-01-01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거리의 화가님 2022년 첫날 만나뵙네요~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책으로 좋은 이야기 만들어가요~^^

거리의화가 2022-01-01 10:18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반갑습니다 오며 가며 계속 만났는데 이제야 친구신청을ㅋㅋ 뒤늦었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앞으로 자주 뵙고 이야기 나누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