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고대의 기원이자 현대의 요람이다. 도시는 그 주변을 이끌어가고, 권력을 행사하고, ‘상대적’으로 진취적이기 때문에 우월한 위치에 서 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19세기의 도시에서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 P760

도시는 지구의 보편적 현상이다. 국가는 유럽인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도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도시문화는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났다. 중동의 나일강 유역과 지중해 동부, 중국과 인도, 훨씬 훗날의 일본, 중부아메리카, 사하라 이남지역에서 각기 독자적인 도시문화가 형성되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농업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었다.
도시의 물리적 형태와 생활방식은 유럽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다. 유럽에서 발생한 ‘근대적인’ 도시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만 거의 하나도 예외도 없이 강인한 토착 도시문화와 충돌했다. - P763

19세기 동안 ‘도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특히 19세기 후반은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된 시기였다. 역사상 어떤 시대도 사회생활에서 19세기와 같은 공간 밀도의 변화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도시인구의 증가속도는 이전 몇 세기보다 훨씬 빨랐다. 영토가 광활한 몇몇 국가에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도시 주민의 생활방식이 경제와 문화 영역에서 주도적인 생활방식이 되었다. - P764

도시의 찬란한 현대성은 (긴 역사에 비추어보면) 순간일 분이다. 때로는 현대성이 지속된 기간은 수십 년에 불과했다. 현대성은 질서와 혼란의 평형, 인구의 유입과 유효한 기술구조의 융합, 구조화되지 않은 공공 공간의 개방, 탐색과 시험 가운데서 흘러나온 에너지였다. 현대화의 전제는 ‘전통’ 시대가 끝났을 때에도 도시가 여전히 특정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비도시와 구분되는 특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광대한 면적과 분산된 인구, 여러 개의 위성도시로 구성된 다축 방사형 거대도시에는 내부의 경계도 외부의 경계도 모호하고, 도시의 착취대상이자 도시주민이 ‘소풍’이란 명분으로 소비했던 교외지역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의 19세기는 대도시의 형성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 P771

지금까지 도시화는 기계화된 공장식 생산의 보편화와 함께하는 도시 규모의 급속한 성장이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도시화와 공업화는 동전의 양면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관점은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 오늘날 도시화란 더 넓은 의미에서 사회발전의 가속화, 인구 밀도의 증가, 전혀 다른 환경 아래서 진행되는 사회구조의 재편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인간이 더 긴밀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의 형성이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더 빠르게 정보를 교환하고, 그것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양호한 제도적 환경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 P773

근대 초기에 유럽 도시 인구의 절대치는 중국 일본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동아시아에는 더 많은 거대도시가 있었다. 유럽은 1550년 이후 첫 번째의 도시화 물결을 경험했고 1750년 이후 두 번째의 물결을 경험했다. 도시인구의 비중은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두 배로 높아졌다. 1650~1750년에 유럽의 도시화 정도는 일본에 비해 약간 낮았고, 장강 하류지역과는 근접했고 중국 전체의 수준보다는 높았다. - P782

도시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흔히 비교분석을 통해 도시의 구조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관심사는, 대 중 소도시 사이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협조적’이냐 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19세기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온전한’ 도시 등급체계가 있었다. 코펜하겐과 스톡홀름으로 대표되는 덴마크와 스웨덴은 이런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상트페테르부르크(1913년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와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큰 도시라고 할만한 게 없었다. 19세기 90년대 러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사라토프의 인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1/10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 중앙권력의 명령에 따라 건설된 전형적인 주청부 청사 소재지인 이 도시는 주로 행정과 군사적 고려에서 나왔고 그 기능 또한 시종 이 범주를 넘지 않았다. 역동적이었던 제정시대 말기에도 이 도시의 인구는 5만 명을 넘지 않았다. 등급이 분명한 도시체계가 없는 것이 러시아 현대화의 중요한 장애였다. 일본은 반면에 등급이 분명한 도시 계보의 이상에 비교적 근접한 나라였다. 중국도 역사적으로 이런 특징을 갖추었으나 19세기에 인구 1~2만 명 사이의 소도시는 중국에서 찾기 어려웠고, 대도시의 빠른 성장도 소수 대도시에 국한되었으며, 이 도시들조차도 한결같이 해안지역 또는 해안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 P784

한 사회의 탈도시화는 개별 도시의 위축을 수반한다. - P789

19세기에 도시의 성장은 과거의 어떤 시기보다도 시장과 민간 추진력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역동적인 몇몇 대도시의 성장은 ‘민간부문’의 역량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런 도시는 더는 권력과 귀족문화의 중심이 아니라 정치적 위상이 높은 도시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 P794

대부분의 도시체계는 개방적이었다. 19세기에 민족국가가 이미 형성된 지역에서는 국가는 점차 국가경제의 조직자로 진화해갔고 도시의 공업화는 국가경제 안에서 역할의 중요도가 높아갔다. 이와 동시에 ‘거대’도시는 교역 이주 통신의 국제적 네트워크와 직접 연결되었다. 대도시는 자본의 집적과 분배를 담당하고 동시에 ‘국가 간’ 연결의 기반 역할을 했다. 도시의 발전은 국가형성의 직접적인 결과도 아니고 공업화의 부수현상도 아니다. - P796

도시체계의 함의는 두 가지 방식—수직과 수평—으로 해석될 수 있다. 수직적 해석은 피라미드 모형을 차용한다. 가장 밑바닥에는 무수한 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정상에는 핵심 지역이 자리잡고 있다. 중간에 규모에 따라 여러 정착지가 계층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농촌의 정기 시장도 있고, 고정된 시장 조직을 갖춘 소도시도 있고, 서비스와 관리기능을 함께 갖춘 중형 도시도 있다. 수평적 해석에서는 도시 사이의 관계, 도시가 소속되어 있으면서 도시 기능과 발전을 지원하는 네트워크를 관찰 대상으로 한다. - P798

한 도시가 일정 규모를 넘어서게 되면 단일한 기능으로 그 도시의 성격을 분류하기 쉽지 않다. 이때 도시는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도시는 흔히 다원적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노동력을 고도로 특화된 분야에 집중하는 도시가 있다. - P803

한 국가의 수도는 인구의 다소에 관계없이 정치적 군사적 권력 중심으로서 다른 도시와 구분된다. 그 밖의 특징도 모두 여기서 비롯된다. 수도는 최고 통치자의 거주지이며 중앙 관료기구의 소재지이다. 수도의 노동시장은 흔히 다른 도시에 비해 서비스업에 기울어 있다. 수도에서 사는 주민들에게 통치자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어떤 정치체제이든 수도는 대중정치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 P809

19세기에 지구상에서 극히 소수의 도시만 런던과 파리 모형을 따라 각종 기능을 한곳으로 집결시킨 전능형 도시로 발전했다.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활력이 넘치는 대도시라도(예컨대, 도쿄와 빈) ‘제2도시’와의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로마에서는 이원관계의 연원이 다른 곳에 있었는데, 그것은 세속정권과 바티칸 사이의 대립이었다. - P814

19세기 30, 40년대의 맨체스터가 ‘충격의 도시’라고 불렸던 이유는 도시의 구체적 공간 때문이었다. 이 도시에 들어선 많은 7층 높이의 공장건물들은 미학적 고려나 도시경관과의 조화라는 개념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 이런 풍경이 흔하게 늘어선 곳은 도시의 중심지역이 아니라 교외지역이었다.
어떤 도시는 완전히 공업지역으로서 건설되었고 오랫돈안 공업이 도시의 유일한 존재목적이었다. - P820

맨체스터, 버밍엄, 리즈 같은 도시는 대중의 참여라는 자신만의 자원을 동원하여 공업화 초기단계에서의 혼란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 도시는 박물관과 시립대학을 설립하여 공동체 기반시설을 개선했으며, 위엄 있는 건물을 세워 장소의 권위를 높였다. 공장지역 주거지의 형태는 다양했다. 대형 공업도시의 빈민굴처럼 생활환경이 열악한 원시적인 판자촌도 있었지만 작업장과 노동자들의 주거환경이 견딜만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기업적 가부장제의 전시장으로서 공장주도 함께 사는 주거지역이 있었다. - P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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