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 - 인도, 문명의 나무가 뻗어나가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시리즈 1
강희정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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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영역은 폭넓어졌다. 그러나 지금도 전시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회화가 압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서양화다. 그러다보니 미술 하면 뭔가 모르게 나와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술은 결코 회화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조각, 서예, 전각, 일상 용품 등 다양하다. 이처럼 미술품은 결코 특별하지 않으며 눈 닿는 곳에 모두 존재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릴 적 보고 자랐던 옛 장롱, 베개 자수, 한복의 무늬 등이 지금은 미술품이 되었던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싶다. '평범한 것이 위대하다’ 라는 챕터의 제목은 평소 내가 생각하는 바와 맥락이 닿아 있어서 더 공명했던 것 같다.


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권은 인도의 미술 이야기다. 


인도에 대해서는 책의 질문자처럼 나도 IT가 발달된 곳, 바라나시, 소, 갠지스 강(에서의 목욕) 정도 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인도는 불교가 시작된 곳이니 불교 관련 미술이 있을 거야 하는 생각 정도를 갖고 읽기 시작했다. 


인도는 파키스탄의 지명인 ‘신드’에서 유래한 말로 짐작할 수 있듯 인도 미술의 범위는 오늘날의 ‘인도’만이 아닌, 아프가니스탄 일부와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미술까지 포함한 지역이다. 과거에는 인도가 이 모든 지역들을 커버했기 때문이다. 


인도는 흔히 4대 문명 중 하나인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인 1974년 인더스 강 유역에서 메르가르 유적이 발굴되면서 인더스 문명보다 더 앞선 문명이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나도 앞선 문명이 있었음을 미처 알지 못했었는데 충격적이었다. 선인더스와 인더스 문명의 유적을 통해서 사실적인 신체 동작과 살의 촉각을 생생하게 표현하려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인장을 저렇게 입체적으로 새긴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특히 ‘춤추는 소녀’는 당시 어떻게 저런 아름다움을 갖춘 조각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밀하고 사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BC 322년 인도에 마우리아 제국이 세워진다. 마우리아 제국의 세 번째 왕이었던 아쇼카 왕은 인도 남단을 제외한 대륙 전체를 정복했다. 그는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석가모니를 의미하는 사자 조각을 통해 석가모니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작업을 한다. 현재 인도를 대표하는 공식 국장에는 네 마리 사자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아쇼카 왕이 세운 석주의 사자 조각에서 기원한 것이다. 


불교는 인도의 아쇼카 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불교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기본이 되는 종교 중 하나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용어 중에서도 불교에서 온 용어가 많다고 하는 것에 놀랐다. 예를 들어 ‘기특하다’, ‘불가사의하다’ 같은 말이나 관념, 대중, 살림, 심지어 지식이라는 말이 인도에서 왔다고 한다. 또 ‘주인공’이라는 단어는 불교 경전에서 깨달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왠지 ‘주인공’이라는 단어가 달리 보이지 않나.  


아쇼카 왕은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칭했어요. 성왕은 성스러운 왕, 전륜은 구를 전(轉)에 바퀴 륜(輪)을 써서 바퀴를 굴리는 성스러운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바퀴는 당연히 법륜이죠. 아쇼카 왕은 석주를 통해 자기가 우주의 진리이자 불교의 법을 전파하는 위대한 왕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주장하는 겁니다. 

이후 전륜성왕이란 이름은 불교에서 이상적인 군주의 대명사가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진흥왕이 6세기에 한강 유역을 정복하고 불교를 수용해 나라를 정비하면서 자신을 전륜성왕이라 칭했습니다. - P242


일찍부터 마연한 조각과 토기를 만들다가 마우리아 제국 때 와선 돌이 들어가는 데는 모조리 마연하죠. 궁전 기둥도 그랬고요. 

우리나라 돌은 대부분 입자가 거칠고 단단한 화강암이거든요. 세밀하게 조각하기 어려운 돌이죠. 하지만 ‘석탑이 마멸되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거의 못 들어봤을 거예요. 화강암이 조각하긴 어려워도 내구성 하나는 끝내줘요. - P254~255


인도의 조각은 굉장히 사실적이고 세밀한 게 특징인데 이는 무른 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만큼 바람에 잘 날아가기 때문에 형태 보존이 어려워 ‘마연(갈고 닦아서 반질반질하게 하는 것)’을 한 것이라고. 우리는 화강암을 쓰기 때문에 단단한 대신에 상대적으로 세밀한 조각은 어려웠던 것 같다.


석가모니는 당시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감흥을 주었다. 석가모니 사후 여덟 개 나라의 왕들이 유골을 팔 등분 한 다음에 각각 돌아가서 스투파를 세운 것이 스투파의 시작이었다(근본8탑). 그러나 보통 사람이 그 탑들을 직접 찾아가기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아쇼카 왕은 사리를 나눠 전국 곳곳에 8만 4천 기에 이르는 스투파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8만 4천기라니, 지금도 그 정도의 숫자가 세워진다고 하면 놀랄 만한데 당시에는 진짜 어마어마한 숫자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석가모니의 복음의 위세가 강했다고 보아야 하겠다. 거기에 독실한 불교 신자인 아쇼카 왕이 있어서 스투카가 곳곳에 세워질 수 있었다. 

사실 스투파는 납골당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불교의 위세가 커지자 석가모니의 무덤만을 가리키게 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스투파는 나중에 투파, 탑파, 솔도파 등으로 불리다 중국을 거치면서 우리가 아는 ‘탑’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된다.

스투파는 차트라(산개), 야슈티(찰주), 하르미카, 안다(복발), 토라나(문), 베디카(외곽 울타리)로 구성된다. 복발의 둥근 형태는 알을 뜻하며 생명의 순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스투파는 다양한 조각을 끼워넣을 수 있도록 울타리나 문에 홈을 내어 놓는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조각에는 석가모니의 이야기가 포함되면서 자연스레 그의 생애와 불교의 교리가 전파될 수 있었다. 


불교가 인도를 넘어 아시아에 전파되면서 스투파가 곳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다만 인도와 거리상으로 교류가 쉽지 않았던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은 인도의 스투파의 형태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제작되었다. 처음에는 목탑부터 시작되었다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목탑을 본떠서 만든 석탑이라고 하는 것이 신기했다. 입구가 있는 것, 찰주, 배흘림 기둥, 처마처럼 높이 올라간 지붕 모서리에서 스투파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문을 만들었다는 게 바로 목탑을 본떴다는 증거예요. 동북아시아의 탑은 애당초 목조 건물을 본떠 만들었으니 오히려 문이 없으면 더 이상하지요. 이 문만 봐도 우리나라 탑이 인도 스투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인도의 스투파는 바깥 울타리에 문이 있긴 해도 복발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없습니다. 석가모니를 화장해 몇 겹짜리 사리함에 넣어 꽁꽁 싸맨 다음 묻었는데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달 이유가 없지요. - P419

돌을 툭툭 쌓아 올린 돌기둥이 보일 겁니다. 이 돌기둥이 야슈티, 즉 찰주예요. 인도 스투파에도 찰주가 있었습니다. 우산처럼 생긴 산개가 있고, 그걸 받치는 우산대 같은 게 찰주였지요.

스투파에서 찰주는 특별한 기능이 없었어요. 그냥 복발 꼭대기에 꽂은 기둥 정도였죠. 동북아시아에서는 탑 층수가 높아지면서 찰주가 중심을 잡아주는 축이 돼요. 쉽게 샌드위치에 꽂은 이쑤시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찰주의 존재는 동북아시아 목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에요. - P420


신장위구르 지역에 모여 살던 월지족은 흉노족의 강성함에 밀려 인도 북부 지역까지 이동하였고 기존에 있던 그리스-박트리아 제국을 물리치고 1세기 경 쿠샨 제국을 세운다. 쿠샨 제국의 영토는 지금의 인도 북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일부에 걸쳐져 있었다. 통일을 이룩한 인물은 3대 왕인 카니슈카 왕이다. 그도 마우리아 제국의 아쇼카 왕처럼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는 최초로 불상을 탄생시키면서 지금의 불상의 표식을 정형화시켰다.    특히나 쿠샨 제국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북아시아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한반도에는 삼국 시대 불교가 수입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새삼 놀라게 된다. 




이 책은 장점이 많다. 우선, 질문자와 대답자가 말을 주고 받으며 궁금증을 풀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독자가 자연스레 그 과정에 동참하게 한다. 두 번째로, 챕터별로 핵심 정리를 해 놓아서 독자로서 한 번 더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세 번째로, 시기별로 역사를 도표상으로 나열하고 이를 미술품과 같이 배치함으로써 그림과 도표로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다. 


분량이 많았다 싶었는데 쉽게 읽혀서 이틀이면 너끈히 다 읽을 수 있었다. 아시아 문화권은 불교 문화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만큼 인도 미술의 이해는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는 동양 미술을 더 자주 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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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4-03 0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도 미술 범위가 넓네요 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난 곳이라는 것만 알지도... 그런 것도 거의 잊고 사는군요 불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데, 중국이나 한국하고 다른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불교는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온 걸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4-03 08:57   좋아요 1 | URL
같은 불교권 문화라도 유물이나 유적의 형태가 달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맞아요. 불교는 중국을 통해 한반도에는 삼국 시대 무렵 들어왔죠. 벌써 천 년 넘게 이 땅에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는 종교라기보다는 마음의 수양을 쌓는 하나의 방편이 된 것 아닐지요^^
 
[세트] 520번의 금요일 +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 - 전3권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 온다프레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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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0주년기를 맞아 지금까지의 기록, 인터뷰집, 낭독집을 담았다. 10대였던 아이들이 20대가 되었지만 ‘이미 10년이나 지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음을 절감하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차별과 낙인은 여전히 계속되고, 또 다른 사회적 참사는 계속되기에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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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4-03 0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로 열해라니, 시간이 참 빨리도 가네요 다섯해 지났을 때도 벌써 그렇게 되다니 했는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4-04-03 08:56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시간이 벌써... 그런데 여전히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보니 마음이 여전히 무겁습니다.
 
[세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3 세트 - 전3권 - 제2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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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세기의 물질문명, 물질문명과 모순되거나 이를 보충해주는 경제문명을 일상성의 공간 속에서 살펴본다. 무엇보다 일상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역사로 간주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일상사는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일반성 혹은 구조가 된다,‘ 다만 단순화하면서 생긴 이슈는 감안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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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3-31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산 사람이… 역쉬 역덕화가님…😭

거리의화가 2024-03-31 18:30   좋아요 0 | URL
ㅎㅎ 쟝님^^ 철학사를 읽고 있어서 연결지점이 많더라고요. 바로 읽게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세계철학사 1 - 지중해세계의 철학 세계철학사 1
이정우 지음 / 길(도서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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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시대에 탄생한 철학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좋은 시절에 철학이 탄생하지 않은 것은 일견 이해되는 면이 있다. 불안과 혼돈, 의심과 회의적 시각에서 질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양의 지중해 중심의 세계는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자연 철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그리스 철학이 이슬람으로 전달되면서 사유가 깊어졌다. 중세의 기독교적 일원론을 바탕으로 한 철학에서 르네상스로, 철학에서 자연 과학이 분리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철학사는 ‘철학‘사이자 철학사‘이다. 철학사는 철학을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 지평에서 다루며, 역사에 속하지만 어디까지나 철학의 역사이다. 때문에 철학사의 서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사와 철학을 어떠헤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 P13


문학도 그렇지만 철학도 지리적, 역사적 배경과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폴리스로 구성된 그리스는 해양 세계에 위치하고 있어 다원론이 자연스러웠다. 이후 서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하고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중세는 '신' 중심의 철학과 사상이 등장하였다. 페스트로 유럽 전역이 황폐되었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는 새로운 사유에 대한 질문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닐까. 이후 가톨릭 교황과 황제의 대립에서 점차 황제 중심의 왕권 국가주의가 강해지고 자본주의의 발흥, 자연 과학의 등장으로 신 중심의 사유에서 인문주의 철학이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책의 장점은 특히나 동양 철학(자)과의 비교로 사상의 개념과 이론을 더 쉽게 접근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또한 현실의 문제를 철학자의 이론과 연계하여 설명해주는 부분도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최초의 철학은 철학자 본인의 사유의 산물이겠지만 이후에는 그 철학자의 사유를 보고 고민한 끝에 본인의 의견에 그 의견을 부정하거나 반대, 보충하여 결과물을 만들며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로 흘러가고 근대의 문을 연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전대의 생각을 아예 뿌리채 뽑아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것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개념이 탄생했던 조건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x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해는 그 개념의 탄생 조건들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 하나의 탄생은 가름/변별화이다. 거기에는 늘 어떤 대립성이 작동한다. 대립, 갈등, 부정, 모순의 장에서 무엇인가가 탄생한다. ‘philosophia‘의 탄생에도 이런 대립성들이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 P841


철학사를 읽으며 그들이 당대의 현실을 보고 고민한 것이 무엇이며, 그 지향점은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도 지금의 현실을 보고 미래를 걱정하는 것처럼 그들도 비슷한 고민을 한 끝에 내놓은 결과물을 엿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꽂히는 철학자를 발견하는 재미도 덤으로 챙길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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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3-30 0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은 여기에서 마음이 가는 철학자 찾았나요 이 책 모두 네권이군요 네권을 다 보고 찾을지도 모르겠네요 거리의화가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3-31 18:21   좋아요 1 | URL
아직 딱 마음에 들어 파고 싶은 철학자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소크라테스, 자연 철학자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주목하는 걸 보면 삶을 중요시 여기는 철학에 마음이 가는 것 같습니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이타가키 류타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 푸른역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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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작년부터 언어, 개념, 학문 체계와 관련된 책들을 읽었다. 여러 권의 책을 읽다 보면 겹치는 영역이 생기고 그 때는 이해되지 않고 넘겼던 것들이 이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짜릿함과 성장의 기쁨이 아닐까. 


거의 1년 만에 독서 모임을 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북한의 언어학자 김수경이라는 인물을 파헤친다. 개인의 역사이자 평전이지만 조선어학 이론을 확인할 수도 있다. 서술 방식이 독특한데 역사와 이론을 교차로 배치하여 낯선 인물과 역사, 그의 이론 중 끌리는 부분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두 달 전쯤 한국어 맞춤법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 느낀 바가 있었다. 한글 맞춤법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은 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훨씬 복잡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내가 잘못 써온 맞춤법을 마주하며 쉴 새 없이 머리에 돌 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하물며 현재 북한에서 사용 중인 조선어는 어떨까. 두음 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고 봐야 했다.


'우리말' 개념은 그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 단어 어디에도 국가를 지시하는 요소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말'에는 분단 상황을 일단 괄호 안에 넣어 탈분단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겨레말'과 달리,'우리말'에는 민족이나 국민을 나타내는 요소조차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의 설정에 따라 자유자재로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다. 

여기에 일본에 사는 나와 같은 일본인이 이 언어를 '우리말'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의가 있다. 내가 '우리말'이라고 하는 순간, 위화감을 느끼는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 뭔가 '이물질' 내지 '침입자'가 들어온 듯한 감각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위화감도 모두 포함하여 '우리말' 개념의 가능성에 걸고 싶다. 장뤼크 낭시는 동질성과 단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존재와 복수성에서 공동성을 사고하려 했다. 낭시에 따르면, 전혀 공통성이 없는 특이한 존재들 간에 있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며, 동시에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특이한 존재가 형성된다. - P6~7

'우리말'과 '우리 나라'는 서로 다른 범위를 갖고 있다. '우리 나라'는 영토와 주권이 단일한 공간이라면 '우리말'은 그보다 더 다층적이고 넓은 범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김수경이라는 낯선 인물, 낯선 이론을 만났다. 서두에서 깔기는 했지만 조선어의 이론 부분은 역시 어려웠다. 그러나 이론이 어려워서 힘들다 싶으면 그의 흥미로운 역사를 풀어 놓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다.


저자인 이타가키 류타는 문화인류학자인데 전작에서 식민지 시기 한국의 상주라는 공간의 지역사를 훓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하필 김수경이라는 개인에게 꽂혔는가 궁금했다. 2009년 연구년을 맞아 보스턴 근교에 머물렀던 저자는 2010년 북미에 거주하는 한반도 북부 출신들과 인터뷰 조사를 위해 캐나다의 토론토를 방문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식사 자리에서 임혜영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녀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언어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임혜영은 당시 토론토 대학에서 외국어 교원으로 근무 중이었고 아버지는 짐작하겠지만 김수경이다. 그 때는 김수경이라는 학자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교토에 돌아왔다가 주변 연구자들에 의해 그가 북한 언어학의 기초를 닦은 학자임을 알게 된다. 이후 그를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본격적인 자료 조사를 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 이 책의 집필의 출발점이 되었다. 


김수경은 1934년 경성제대 예과를 만 15세에 입학하고 1937년 만 18세의 나이에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진학했다. 그는 법문학부에서 철학과를 선택했는데 당시 학부에 언어학 강좌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전공이었다고(그렇지만 그 와중에 순수철학을 공부했다는 게 놀랍다). 김수경은 진작부터 언어학에 관심이 있어서 고바야시 히데오(소쉬르의 이론을 번역함) 연구실을 찾아간다. 그는 일본어학, 조선어학를 넘어선 일반언어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1940년 도쿄제대 문학부 대학원에 입학하여 4년 간 재학하면서 조선어학자인 이희승을 만나 친하게 지냈고, 또 이남재와 결혼을 한다. 1944년 자퇴를 하는데 조선어학 교수인 오구라 신페의 퇴직, 아내의 임신, 막바지에 이른 전쟁으로 학도병으로 출진해야 하는 상황 등의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 그리고 그는 언어 천재였다고 한다. 무려 9개국어를 했다고. 그가 언어학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가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해방 후, 김수경은 경성대학 자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좌파가 주도한 자치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치위원회 내부에서는 김수경을 조교수로 언어학 강좌를 맡기로 내정했으나 당연히 미군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실제로는 이희승이 맡았다고). 그는 11월 30일자로 경성대학 자치위원회 위원을 사임했다. 이처럼 그는 해방 후에도 좌파 지식인들과의 교류 속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국어국문화보급회, 조선언어학회에 참여하여 언어학 활동은 계속 이어갔다. 북한에서 김일성대학의 창립이 결정될 무렵 남한은 서울대학교 설립 계획이 추진된다. 그는 1946년 5월, 경성제대 동기생인 박시형의 보증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김석형, 박시형과 함께 8월 17일 월북했다.


조선어의 문자체계의 터를 잡는 역할을 한 것은 김두봉이다. 김두봉은 한자의 폐지를 실시하고, 풀어쓰기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1948년 조선어 신철자법에 그대로 반영이 되는데 여기에 김수경도 함께 참여했다. ‘조선어 신철자법’에서 핵심적인 것은 두음법칙의 폐기, 절음부의 도입, 신6자모 도입이었다. ‘토’의 개념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접사, 의미 중 문법상 의미를 가지는 것만 따로 분류한 말이다. 나는 이 중 풀어쓰기와 두음의 고정 표기, ‘토’의 개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만 풀어쓰기는 나중에 사용상의 문제로 버려지게 된다. 생각해보라. ‘감’을 한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것을 ‘ㄱㅏㅁ’ 이렇게 표현하면 글자 수도 3개가 되고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등의 문제가 생긴다.) 


김수경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20세기가 되면,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이 주류를 잡게 되고 구조주의가 유행한다. 문헌학으로 대표되는 개별화와 구조언어학으로 대표되는 일반화는 근대 언어학의 지향성이 두 축이 되었다. 김수경 언어학의 초기 업적에는 ① 구조언어학, 나아가서는 언어철학 등 좀 더 보편적인 언어 문제에 대한 지향성, ② 조선어에 관한 개별 구체적인 역사언어학에 대한 지향성, 그리고 그 양자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해방 후, 특히 월북 후에는 언어가 '이래야 한다'는 표준을 책정하려는 언어학, 즉 ③ 규범의 창출이라는 실천적인 언어학이 더해진다(P86~87). 


스탈린은 “민족이란, 언어, 지역, 경제 생활 및 문화의 공통성에 나타나는 심리 상태의 공통성을 기초로 생겨난, 역사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견고한 공동체이다”고 할 정도로 언어의 중요성을 알았다. 이 구조를 실현한 언어학자가 니콜라이 마르와 그 학파였다. 마르학파는 스탈린이 최고지도자 지위에 있을 때 활약했는데 김수경이 여기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지향한 조선어학은 규범화, 구조화에 바탕한 것으로 국제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민족적 자주’ 개념이 강조되면서 조선어 문법에도 변화가 생겼고 관련하여 김수경은 가장 바쁜 세월을 보낸다. 1956년까지 김수경은 김일성종합대학의 ‘과학연구부장’이라는 직위에 있었다. 그는 김두봉의 사상 비판 때 활동에 제약을 받기는 했지만, 계속 교육과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1967~68년 김일성 유일 체제가 진행되면서 대학을 그만두고 교육 일선에서 물러나 도서관장을 맡게 된다. 다행히 1980년대 후반이 되면 복권이 되고 그의 업적이 재조명된다. 


간단하게 그의 연구와 업적과 관련하여 설명했는데 사실 개인사는 훨씬 드라마틱하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그는 교육 때문에 진도에 내려가야 했다. 전쟁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아내와 딸들은 이남으로 내려갔고 그렇게 가족은 영영 헤어지게 되었다. 교수이자 학자로 엘리트였음에도 그는 입대해야 했고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김수경은 1986년에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학술토론회로 주최자였던 최응구의 도움으로 둘째 딸과 재회할 수 있었다. 1988년에 둘째 딸은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6년 큰 아들과 재회하였고 아내였던 이남재와는 1988년에 만날 수 있었다. 김수경은 2000년 영면한다. 그의 부고가 알려지자 “20세기 남북한을 통틀어 최고의 국어학자 중 한 명”이라는 식자의 언급과 함께 신문에 보도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2006년 ‘동숭학술재단이 선정한 언어학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죄송한 일이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지역 연구를 포함한 오늘날의 학문 분야를 낳은 식민주의와 냉전이라는 힘에 대해, 비판적인 지역 연구로서의 '비판적 코리아 연구'라고 말하고 싶다. 월러스틴과 마찬가지로 학문 분야의 장벽을 넘어 국민국가를 초월한 분석을 시도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일한 세계체계 분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등장했을 때의 비판적 계기를 계승하는 것, 즉 식민주의와 냉전이 남긴 틀의 재생산에 봉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깨뜨리는 앎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작업을 추상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재외 코리안의 경험에 끝까지 접근하면서 앎을 재구축한다는 의미에서 '코리아학'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코리아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식민지기부터 냉전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정치적 의미가 부여되었던 '조선', '남한', '북한'이라는 카테고리를 일단 괄호 안에 묶어서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 P12~13


저자는 이 책에서 김수경이라는 개인을 중심으로 한 '전체사'를 그려내려고 했다. 한정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개인의 역사를 온전히 재구성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개인사=전체사'는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시도를 한 것은 한 사람의 역사가 보여주는 다채로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김수경은 20세기 대부분의 시기를 살아낸 인물이다. 그렇기에 조선의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하여 해방 전후, 북한의 현대 시기까지 개인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평전으로는 충분한 평가를 주고 싶다. 조선어학 이론의 기초도 얻을 수 있다. 다만 저자가 말한 대위법적 평전의 시도가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대중을 생각하여 가능한 쉽게 써냈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학문사다보니 개념이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내가 5별을 준 것은 저자의 노고에 감사하기 때문이었다.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하는 등 추적이 결코 쉽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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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3-26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 나라 말을 잘 아는 사람은 대단해요 여러 가지를 알면 비슷한 점이나 다른 점을 알기도 하겠습니다 북한에서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기를... 식구들과 헤어진 건 마음 아팠겠네요 나중에 만났다고 해도...


희선

거리의화가 2024-03-26 14:07   좋아요 2 | URL
진짜 천재는 괜히 천재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영어, 중국어 공부만 하는데도 허덕이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그 분의 지위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회를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돌아가시기 전까지 만나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