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송대 중국의 역사
스도 요시유키 외 지음, 이석현 외 옮김 / 혜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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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 시기의 역사를 훓어 읽다가 당, 송 시기의 역사를 좀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확인해보니 번역되어 나와 있는 책들 중 마땅한 것이 없었다.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나 <신당서>, 송나라의 역사인 <송사>는 당시 쓰인 한문이나 오늘날의 중국어 번역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지만 차마 도전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당나라의 태종과 고종은 한국 사람에게도 익숙한데 고구려와의 외교 관계를 통해서 엿볼 수 있었던 덕분이다. 이번에 당나라의 문학 주요 장르였던 당시를 잠시나마 엿보았던 것은 수확이었다.
하지만 송나라의 역사는 뭐 하나 짚히는 것이 없이 두루뭉술했다. 그래서 찾아보다 만난 것이 이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스도 요시유키와 나카지마 사토시다. 스도 요시유키는 1907년 생으로 동경대 문학부 교수를 거쳐 동양대 교수를 역임했다. 나카지마 사토시도 1907년 생으로 동경교육대 교수를 거쳐 대동문화대 교수를 역임했다. 둘 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학교 출신이어서 연이 닿은 것인지 같은 책을 썼다는 게 공교롭게 느껴졌다. 일본 저자가 쓴 책이라 끌리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이 책은 2004년도에 현지에서 출간되었으나 번역은 2018년에 되었다. 2004년 한국을 생각해봐도 책에 고어나 한문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쉽게 쓰여진 책을 찾는 것이 드물던 시기다. 이 책도 그 무렵 편찬이 되었으니 짐작이 갈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 용어들이 해석되어 있지 않고 한문 그대로 적혀 있는 경우가 많아 읽기가 까다롭다. 그래도 한글 옆에 한문이 있으니 원문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는 있다.


송나라의 역사를 생각 이상으로 세세히 다루고 있어 만족스러웠는데 특히 경제 파트가 그렇다. 송이 성립하고 남송 정권이 멸망하기까지의 과정을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문화 등 다양한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중 압권은 지방 지주층들의 토지 점유 과정, 화폐 경제의 구조에 대한 설명, 왕안석의 신법에 대한 개혁 내용이다. 기존에 읽었던 책들로는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지도와 표, 이미지 등을 제공하여 이해를 돕는다. (처음에 별점 3을 생각하다가 4를 준 이유)


송은 문인관료체제였다. 문인관료는 주로 과거시험을 통해서 발탁된 자들로 응시자는 지주층 자제들이 많았다. 이들은 황제의 권력 기반이었으므로 황제는 그들의 바람에 따라 (굳이 필요하지 않은) 관료들의 숫자를 늘렸고 다른 때보다도 관료에게 주는 대우가 후한 편이어서 국가 재정에 문제를 일으켰다. 문관 중심의 정치로 군사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는데 요와 서하, 뒤이은 금과 원까지 대응하는 동안 병사 수가 급증하여 국가 재정에 심한 압박을 가하게 된다.


신종 대 왕안석의 신법 개혁은 생산력을 증진하고 재정난을 타개,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시행되었다. 신법은 주례 정신으로의 복귀를 표방하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사회진보의 방향과 합치되는 것들이 많았고 고위 관료와 결탁한 대지주, 대상인의 힘을 억제하고 군주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왕안석은 우선 청묘법을 시행하여 농민과 소작인에게 낮은 이자로 청묘전을 빌려주어 보릿고개 기간 동안 농민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지주의 고리대적 수탈을 방지하였다. 다음으로 면역법을 실시하여 차역의 무거운 부담으로 농민이 파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면역전을 징수하여 차역 담당자를 모집하고 지주들로부터도 조역전을 징수하여 겸병을 억제하고자 했다. 또 보갑법을 시행하여 농촌에서 보갑을 조직하고 도적을 잡아 농촌의 치안을 유지하고, 중요 지역에서는 교련을 실시하여 향병으로 활용했다. 보마법을 실시하여 말을 사육하여 군마로 이용했다. 조세 불평등에 대해서는 방전균세법을 시행하여 토지를 측량하고 그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과세함으로써 불균형을 시정하고자 했다. 또 농전수리법으로 강남에서 수리전을 대규모로 개발하고 제방을 축조하여 농업생산의 증대를 꾀했다. 북방에서는 어전법을 시행하여 많은 척박한 땅을 옥토로 바꾸었다. 균수법은 대상인이 상품값을 조작해서 이익을 챙기는 일을 막고 운수비를 줄여 물가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같은 목적으로 실시된 시역법에서는 상인에게 낮은 이자로 자금을 빌려주는 방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채경의 악정은 금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북송을 멸망으로 이끈다. 송의 황족은 포로가 되어 금나라로 끌려갔고 포로 신세를 면한 강왕이 송의 부흥을 지향하는 이들을 이끌고 남송을 세운다. 남송의 중심 세력들은 구법당 정치가들이었다.
남송시대가 되면 금과의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주전파와 주화파 간에 의견 대립이 정치 주요 의제가 된다. 송은 종래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오랑캐라 천시했던 여러 국가들에게 압박을 당하고 여러 차례 화해를 해야 하는 굴욕을 겪으면서 한쪽에서는 변화해야 한다는 이들, 다른 한쪽에서는 민족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이들로 나뉘게 된다. 서하, 금이 망하고 몽골이 등장하면서 남송도 멸망한다.


송대는 중국 사상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유교는 전통유학에서 새로운 유학인 신유학(송학)이 생겨났다. 송학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로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끼친다. 또 과학기술 영역에서도 인쇄술이 발달하고, 나침반을 항해술에 사용하였으며, 화약을 병기로 사용하는 등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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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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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내 품사를 재배치하고 더 오늘날에 맞는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지금의 독자가 읽기에는 더 수월해졌으나 길이가 다소 길어졌다는 느낌도 받는다. 노래하는 맛을 살린다면 이전 번역이 나을 듯도 보이는데 이는 독자의 선택이 될 것같다. 역자의 고민과 노고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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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7-11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844쪽 의 책을 읽으셨네요! 거리의화가 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거리의화가 2023-07-11 09:53   좋아요 1 | URL
ㅋㅋ 다락방님 오해십니다. 펀딩책이라 오늘까지 100자평 남겨야 해서 부랴부랴. 다 못 읽었어요 걱정마십쇼!ㅋㅋ

페넬로페 2023-07-11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로 번역된 이 책은 어떨지 넘 궁금해요^^

거리의화가 2023-07-11 10:14   좋아요 1 | URL
기존 천병희 선생님이 하신 번역과 한 단락 정도 비교해봤는데요. 단어를 ‘분노->노여움‘ 이런 식으로 바꾸고 문장 내 배치를 더 이해하기 쉽게 변경한 듯 보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해는 더 잘 되는 것 같았어요. 물론 책을 전체를 다 봐야 알 수 있겠지만요.

책읽는나무 2023-07-11 1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다 읽으신 줄 알았어요^^
지금 읽고 있는 <갈대 속의 영원>에 일리아스랑 오디세이아랑 뻑하면 제목이 나와요.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을 붙잡았을 때 장식장의 값비싼 보물과 독특한 보물상자를 발견하였는데 그 보물상자에 알렉산드로스는 <일리아스>를 보관하라고 했다는군요.
그래서 나도 언젠간 일리아스를 꼭 읽어 보리라! 생각만...^^;;;

거리의화가 2023-07-11 10:29   좋아요 1 | URL
ㅋㅋㅋ 펀딩 적립금 받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3주 내 읽고 100자평을 써야 하는데 애시당초 불가능한 책인데다가 지금 다른 책 읽고 있어서 언제 읽을지 기약이 없었답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두 권 모두 예전에 천병희 선생님 역으로 완독했었어요.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또 멋진 문장들이 많답니다. 언젠가 나무님도 접해보셔요!

책읽는나무 2023-07-11 11:13   좋아요 1 | URL
그러고보니 저도 북펀딩했던 책 100자평 썼어야 했는데....아!!!!!
날짜 지났나 봅니다.
6월말 경에 받았던 알림은 이미 지나가버려 찾을 수가 없군요!ㅜㅜ
저도 오늘이라도 얼른 써서 올려야겠어요^^
이젠 북펀딩 100자 평도 다 놓치고 있네요.^^;;

전 일리아스 예전 천병희 샘꺼 가지고 있어요.
옛날에 좀 읽다가 너무 등장인물이 많아서 헷갈려서 중간 포기했었네요.ㅜㅜ
다시 재도전 할 수 있을지 좀 두렵네요^^;;

거리의화가 2023-07-11 11:23   좋아요 1 | URL
펀딩한 책 3주 내 못 읽을 거면 책 받은 즉시 올리는 게 좋겠더라구요. 잊어버리면 적립금 날아가는 사태가ㅠㅠ
일리아스 천병희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것 이미 가지고 계셨네요. 등장인물이 많기는 하지만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읽으면 좀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판본은 좀 더 현대적으로 번역된 느낌이었어요. 나무님이 읽기에 좀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2023-07-12 0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사람이 읽기에 좋게 번역한 거군요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는 읽어봐야겠다 생각한 적이 없네요 가장 오래된 책, 이야기니 읽어보면 좋을 텐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12 11:02   좋아요 0 | URL
네. 이런 원전은 역자에 따라 늬앙스가 다르게 번역되어서 보는 맛이 있습니다. 저도 전문을 다 읽은 것은 아니여서 어떨지 궁금하네요.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 - 수.당.오대십국.북송 : 중원의 황금시대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
진순신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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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이 책을 봤다는 것을 북플의 기록을 보고 알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코 읽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뒷부분인 송나라 역사만 읽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김용 무협 소설 읽는다고 배경이 되는 역사를 훓어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덕분에 지금까지도 당시의 굵직한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엇이든 목적을 가지고 읽은 책은 기억에 남는 법인가보다.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4권은 우리에게 익숙한 수, 당, 그리고 짧은 분열기였던 오대십국, 북송 시기까지를 다룬다.

수나라 말에 각지에 다양한 반역단이 잇따라 나타났으나 수 왕조가 무너진 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당(唐)이라는 새로운 왕조였다. 당나라의 이씨(李氏)는 수나라의 양씨(楊氏)와 마찬가지로 북주(北) 팔주국의 하나다. 선비색이 짙다는 점에서도 아주 꼭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수는 38년도 존속하지 못했는데, 당나라는 290년이나 이어졌다. 태생은 꼭 닮았으나 수와 당은 등장하는 방법이 달랐다. 수나라는 북주(北周)라는 기성(成) 왕조를 찬탈하고 남조(南朝)를 공격해서 천하를 통일했다. 수의 등장에는 천하에 반역단이 횡행한 배경이 없다. 하지만 당나라는 반역단이 천하에 가득한 시대를 무대로 탄생의 울음소리를 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정권 안에 반역단의 흔적이 거의 없는 것은 후한이나 위·진(魏晉)의 경우와 비슷하다. 굳이 말한다면 당나라 창업 공신에 이적(李勣, 옛 이름은 서세적(徐世勣))과 울지경덕(尉遲敬德) 같은 반역단의 성격을 띤 인물이 있다는 정도다. 이것 말고는 수나라와 다른 점이라고 크게 꼽을 만한 것은 없다. - P65

황건의 난부터 시작된 중국의 분열기를 넘어 남북조를 통일한 것은 수나라 왕조였다. 수나라 시조인 문제는 북주의 중신인 양견이었다. 북주는 선비 민족주의가 강한 나라였으나 수나라는 한족 왕조임을 내세웠다. 수나라는 지방 행정기구를 정리하여 기존의 주군현 제도에서 군을 폐지하고 주와 현으로만 구성하는 대신, 지방관이 임명하던 지방 속리를 중앙 임명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드디어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하지만 수나라는 햇수로 38년(581~618)밖에 이어지지 못했는데 이는 후계자 문제, 고구려 원정, 수도 건설과 무리한 대운하 사업, 2대 황제인 양제의 사치 때문이었다.
당나라 고조인 이연은 그다지 적극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결단력도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뒤이은 태종이 형인 이건성을 대신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함이 컸을 것이다. 거병했을 때 이연은 태원 유수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정부군을 반란군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했다. 수나라 말기에는 여기 저기에서 도적떼들이 황제나 천자를 자칭하며 일어났으나 최종 승리자가 된 것은 고조였다. 태종은 인재를 등용하는 데 과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책사인 위징은 이밀의 부하였는데 이밀은 수나라 말기 자신의 아버지인 이연과 더불어 경쟁했던 상대였다. 게다가 위징은 황태자로 장자인 이건성을 밀었는데도 태종은 그를 국사로 임명한다. 

황태자(건성)께서 만일 징(위징)의 말을 따랐다면, 반드시 오늘의 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징의 말‘이란 다름 아닌 세민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답이니 패자로서 대담무쌍한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위징은 이 말을 입에 담은 이상 분명 죽음까지 각오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종은 위징을 용서하고, 첨사주부(詹事主簿, 동궁의 도장을 관장하고 공문서의 타당성을 검열하는 종7품 관리)에 임명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인물,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다. 태종은 여기에서 그런 인물을 발견했다. - P140

안녹산은 재치 있고 붙임성이 좋았던 모양이다. 현종과 양귀비 모두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 안녹산은 거란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양귀비의 일가라는 사실만으로 출세한) 양국충과 손잡고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이임보 배척운동을 펼친다. 하지만 이임보가 죽자 안녹산과 양국충은 서로 대립하게 된다. 양국충은 수도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곁에서 모실 수 있었던 반면 안녹산은 외지에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 간했고 불리함을 느낀 안녹산은 거병을 일으킨다. 그 때 안녹산은 3군 절도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을 이동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안녹산은 거병을 일으킨 이듬해 마침내 낙양을 함락시켰으나 아들인 안경서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현종은 이 때 촉으로 피신을 갔고 왕위를 이어받은 숙종은 위구르를 비롯한 주변 민족의 구원병을 모아 수도인 장안과 낙양을 겨우 수복했다.
당은 시 문학이 활발했다. 이백, 두보, 왕유, 백거이 등 지금도 당시(唐詩)의 대명사가 된 이들이 이 시기 차례로 등장했다. 성당시는 당의 국력이 번성했을 때의 시를 말한다. 이백은 그런 면에서 대표적인 성당시인이었다. 그는 당의 국력이 약해질 무렵 죽었고 당 말기가 되면 혼란스러운 사회가 된 만큼 사회성이 강한 풍조를 담은 두보나 백거이 등이 등장하게 된다.

이백의 죽음으로 성당(盛唐)의 시는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당시의 배경이 된 시대는 지나가고 뒤에는 상처투성이의 산하만이 남았다. 왕유는 미처 달아나지 못했지만, 두보는 도망가던 도중에 안록산군에게 붙잡혀 장안에 연금되었다. 머지않아 그는 그곳에서 다시 탈출해 황제의 행궁이 있는 봉상(鳳翔)에 도달한다. - P279
두보는 이백과 나란히 성당의 2대 시인으로 불린다. 이백은 확실히 성당의 시인이었을지 모르지만, 두보의 뛰어난 시는 대부분 안사의 난 이후의 것이라 역시 성당의 사람은 아니다. 두보는 오히려 다음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의 국운이 계속 기울고 있었다. 이후에 중흥이라고 부르는 시대도 있기는 했으나, 무측천시대부터 개원(開元)에 이르는 그때의 전성기로 다시 돌아간 적은 없었다. 상처투성이의 산하를 직시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두보 이후의 시에서는 일종의 사회(社會派) 같은 요소가 느껴진다. 그런 느낌이 가장 농후했던 사람이 백거이(白居易)다. - P280

문관정치가 확립된 것은 송대였다. 그 이전 오대는 무가정치라고 할 수 있다. 오대 전의 당나라, 그리고 남북조는 귀족정치였다. 과거에 급제한 수재들이 문관으로서 정치의 본류를 형성한 것은 송나라부터다. 이 체제는 20세기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여운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송나라의 숨결은 천년에 걸쳐 중국 산하에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송나라에 친근함을 느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건국에 피비린내가 적었다는 데 있다. 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는 가공할 만한 유혈의 참사가 뒤따른다. 그런데 송의 경우는 뜻밖에도 조용했다. 술에 취한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약간 과장된 말이지만, 송나라 태조가 광포한 짓을 싫어한 인물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 P450

송나라는 당에서 문제가 되었던 절도사의 힘을 약화시켰고 과거 제도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였다. 당나라 때도 과거 제도를 활용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인 비율로 따지면 소수였다. 과거제는 진사과와 제과로 나뉘었는데 진사과는 시문을 짓거나 논술을 하거나 고전을 일부 발췌하여 적어내야 하는 시험이었다면 제과는 문장을 베끼는 종류의 시험이었다. 진사과는 주로 고급 관리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었고 제과는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주로 차지했다. 강남 지방은 예로부터 문인의 기풍이 높았고 화북 지방은 무인 기질이 넘쳤다(남북조 시기까지 거슬러 감). 송나라 초기에는 화북관료가 권력을 잡았으나(당나라 말기 권력을 잡았던 세력들) 이후 강남관료가 진출하여 북송 말기가 되면 강남관료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는 과거제와도 연결되어서 진사과에 지원한 이들이 강남 지방의 문사들로 채워졌다. 화북 관료와 강남 관료 간의 경쟁은 북송 시기 내내 화북과 강남 인력 사이에 당쟁을 불러일으켰다.

진사 출신자들은 어느 정도 수준 높은 학문을 지닌 실력자가 많았다. 정관계에는 이처럼 귀족 출신과 진사 출신의 두 흐름이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자가 주류였다. 실력을 가진 진사 출신자가 불만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귀족 관료는 보수적이고 진사 출신 관료는 현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 진사 출신 관료의 수가 늘자 그 세력을 배경으로 현상 타파를 부르짖는 진사 출신자가 나타났다. 수석으로 급제한 우승유 같은 사람은 정부의 실정을 지적하며 통렬한 공격을 가했다. 우승유에게는 이종민(李宗)이라는 동지가 있었다. 그들이 정부 요인에게 미움을 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종 때의 재상 이길보는 귀족 관료였기 때문에 특히 우승유 등을 꺼려 요직에 앉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영향을 이어받은 이덕유(李德裕)도 목종(穆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을 적에 이종민을 검주자사(劍州刺史)로 좌천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동지인 우승유가 대두하여 재상이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반대로 이덕유가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무종(武宗)이 즉위하여 이덕유가 다시 재상으로 복귀하자 또다시 우승유 일당이 추방, 좌천되었다. 이런 일이 되풀되었으니 국가의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그때까지의 방법을 파기했으며, 인사 면에서도 대신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갈아치웠기 때문에 정치는 늘 하다 만 채여서 정정(政情)도 매우 불안정했다. - P304

송나라는 대외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관료사회였던 송은 갈수록 국가 방비에는 허술해진다. 내부적으로도 주전파보다는 주화파 정치인들이 많았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요와 강화 조약을 맺고 대하(중국에서는 서하라고 부름)와도 강화 조약을 맺어야 했으나 이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였으나 그만큼 국방에 투자하지 않았던 것은 실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송나라는 세력이 커진 금에게 결국 수도를 뺏기고 남으로 내려가야했다. 이때까지가 북송 왕조다.

조이용이 요와 맺은 조건은 결국 영토는 그대로 두고 송은 요에게 해마다 비단 20만필은 10만냥을 보내고 송은 형, 요는 동생의 관계를 맺는 내용이었다. 요가 송과 군신의 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송을 형으로 함으로써 송은 간신히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요사』에는 송이 요나라의 황태후를 숙모라고 부른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역사상 ‘전연(淵)의 맹(盟)‘이라고 부르는 강화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이후 약 40년 동안 두 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었다. - P462~463

금군은 개봉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재화를 약탈하고 부녀자도 끌고갔다. 개봉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금군 내에 있던 연경의 한인들이 약탈 안내역을 도맡았다. 역대 황제, 특히 휘종이 고심하여 모았던 서화, 기물(奇物)도 가져갔다. (...) 흠종과 태상황 휘종은 스스로 금나라 군영으로 가서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금나라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기술자, 예술가 수천 명이 금나라로 끌려갔다(이것을 ‘정강(靖康)의 변‘)이라고 한다. 9제(帝) 167년 동안 이어 온 송 왕조는 이것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 P548~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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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유목제국사 - 아사나 권력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소멸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 / 사계절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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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관계는 상대적이다. 외교는 자국의 입장에서 정도의 차이에 따라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에서부터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는 치열한 수싸움의 세계이다. 외교에서 중요한 관계는 아마도 주변국이 될 것이다. 자국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외교는 안보와도 연결되어 인식되므로 그렇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왜 꺼냈을까?

세계사적으로 유목 민족이 힘을 키운 적이 몇 차례 있었다. 돌궐, 위구르, 몽골, 오스만 등이다. 돌궐은 유목 제국의 황금기를 연 첫 주자라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했었다.
예를 들어, 한반도는 고대부터 근대에 오기까지 중국의 영향 하에 있지 않았던 적이 없다(좋든 싫든). 현재 남아 있는 문헌들이 대부분 중국의 것들이고(물론 일본도) 당연히 자신들의 입장에서 쓰여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주변국들의 입장은 축소되거나 왜곡되어 기술된 경우가 많다. 자국의 역사가 있다면 중국이 써 놓은 기록과 비교해볼 수 있겠으나 고대로 갈수록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거나 있다 해도 부족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의 역사를 다각도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돌궐은 6세기부터 8세기까지 중앙아시아 초원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며 호령한 제국이다. 그 이전에 흉노가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범위를 차지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유목 국가로서는 최초의 타이틀을 가질 만하다.
돌궐은 552년 건국되어 급격하게 성장했다가(제1제국 시기) 얼마 지나지 않아 동서로 분열되고, 다시 일시적으로 힘을 되찾았으나 630년 당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그 후 한동안 당의 기미지배를 받다 그 세력권에서 벗어나 687년 국가를 재건하였으나(제2제국 시기) 이후 침체 및 부침의 과정을 거쳐 745년 멸망하게 되는데 이처럼 2세기 동안 다양한 양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국가가 성장에서 소멸의 시기를 겪지만 이처럼 제국으로 성장했다가 숨고르기를 하고 다시 일어나 제국을 형성하다니 놀라웠다.

이 책은 돌궐의 주도 집단인 아사나 세력에 주목하여 이들이 권력을 형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정리하였다. 아사나 집단의 역사는 곧 돌궐국의 형성과 소멸의 과정이다. 아사나는 5세기 바르콜 분지(톈산 산맥 북방)에서 발원해 6세기 초 유연과 고차가 대결하는 과정에서 알타이 산지로 이주하였다. 그때까지 아사나는 유연의 지배 하에 있던 대장장이에 불과한 집단으로 그나마도 건국 이전의 기록은 없고 건국 이후 중국 기록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그 기원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아사나 집단은 자신들이 국가의 주도 집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들은 과거 흉노, 오손 이래 북아시아의 정통성 계승을 상징해주던 이리 신화를 받아들여 하늘의 권위가 자신들에게 이어졌음을 강조했다(P97) .

돌궐은 건국 이후 몽골 초원과 중가리아를 넘어 서방으로 진출해 카자흐 초원을 거쳐 아랄 해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의 초원과 그 주변의 오아시스 지역 대부분을 통합하고 단일한 국가 체제를 만들어냈다. 돌궐은 과거 유목민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여 강력한 군주권을 확립하고 주변의 오아시스 상인 출신의 관료들을 채용하였다. 이를 통해 동서 교역로인 초원길을 바탕으로 거대한 교역 시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돌궐이 위치한 곳은 주변의 정주 세력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정주 세력의 힘이 강해지면 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고 반대로 약해지면 돌궐은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구조가 되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남북조 시기 이전 돌궐은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시기가 끝나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돌궐의 교역로가 해체되자 물자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게다가 수, 당은 돌궐을 끊임없이 견제하였다. 돌궐은 680년 재기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당나라의 지속적인 무력 대응으로 수나라 통일 이전의 제국 범위 만큼은 돌아오지 못한다. 결국 720년 이후가 되면 돌궐은 당조를 중심으로 한 질서를 받아들인다.

비록 한계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돌궐이 보여주었던 권위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한 교역 국가로의 지향, 즉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동서로 영역을 확대해 초원과 오아시스를 결합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기초로 장악한 동서 교역로를 바탕으로 중국으로부터 구득한 물자를 유통시키려고 한 방식은 이후 큰 영향을 미쳤다. 돌궐 이후 몽골 초원을 지배했던 위구르는 그의 권위를 철저히 부정했음에도 이와 같은 교역 국가로서의 지향은 강력하게 보여주었다. 이를 위해 위구르는 당조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카라발가순 같은 거대한 교역 도시를 만들어내는 방식의 국가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또한 10세기 초의 거란(요) 역시 동부 몽골 지역으로부터 초원을 가로지르는 교통로를 장악, 유지하면서 화북과 만주 등지에서 확보한 재화를 동서로 유통시키려는 노력을 적극 보여주었다. 나아가 13세기 초에 등장한 몽골은 돌궐처럼 서방 진출에 성공해 중앙아시아의 교역로만이 아니라 주변의 정주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과거 초원을 최초로 통일했던 돌궐을 능가해 정주 지역마저 통제하는 거대한 유목제국으로 발돋움했다(P595).
아사나가 유목 세계의 투르크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했던 노력은 그의 권위가 완전히 소멸된 뒤에도 아시아 내륙에 펼쳐진 거대한 중앙 아시아 지역에 큰 유산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사나는 초원의 중요한 유목민 세력이었던 투르크들을 통합하기 위해 과거 투르크(고차)의 상징으로 북아시아의 중요한 신화소였던 '이리'까지 차용해 그들을 하나로 묶어내려고 했다. 이를 바탕으로 거대한 유목제국으로 발전했던 200여 년의 돌궐사 전개 과정을 통해 '투르크'라는 강한 자의식이 초원 유목 세계 내에 형성될 수 있었다. 그 후 누구든 초원의 패자가 되려면 이것을 극복하든가, 아니면 이것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P596).

이 책의 장단점은 뚜렷하다. 장점은 사료로 비단 중국의 한문 문헌만 참고하지 않고 고대 투르크(오르콘룬) 문자로 쓰인 비문 자료를 활용했다는 점이다. 투르크 비문은 19세기 말 유럽 탐험대가 확인한 이후 연구자들의 오랜 연구 끝에 투르크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된 이후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돌궐은 이전 유목민들과 달리 6세기 후반 소그드인의 문자를 차용하고 680년 이후에는 고유의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하였다. 사용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겨 일방적인 한문 자료로의 해석에서 탈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돌궐의 문자는 이후 위구르, 키르기스 등에서도 10세기까지 사용되었고 이후 거란, 서하, 여진, 몽골, 만주 등도 독자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선례를 만들었다. 단점은 (아사나 집단의 세력에 주목하였기 때문에) 내용의 구성과 책의 분량, 시간상의 제약으로 몽골 중심으로 전개된 부분만 다루어져 서돌궐의 범위까지는 담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책을 펴 준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

고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정주 세력인 중국의 자료로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래서 유목 세력의 역사들을 함께 고찰해야 일방적인 해석을 벗어나 빈 공간의 역사를 메우고 왜곡된 역사를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수, 당이 고구려에 몇 차례나 공격에 막히고 고구려 이후 대조영이 세력화하기까지 돌궐과 생각보다 많은 관련이 있어 흥미로웠다. 아주 유익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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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08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 역사를 보면 정주민인 한족과
유목민족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습니다.

청조 멸망 이래 한족의 중원지배가
불과 한 세기 정도 밖에 안된다는 걸
볼 때, 다시 유목민족이 발흥하게 될
지도 모르겠네요.

거리의화가 2023-07-10 09:15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도 중국은 주변 민족들을 중화라는 명분 아래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죠. 세력이 끊임없이 교체한 역사를 확인해볼 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희선 2023-07-09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궐이 큰 나라였네요 돌궐이라는 말은 알아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큰 나라라고 해서 그게 오래 이어지지 않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거 생각하면 지금 한국은 언제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한국 사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도 나오니... 역사에는 남겠지만... 돌궐 역사를 보면 고구려나 발해도 조금 알겠습니다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10 09:19   좋아요 0 | URL
네. 돌궐이 굉장히 넓은 땅을 소유했더라구요. 이전의 흉노족이 있기는 했지만 땅의 범위가 더 컸다고 하는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2세기 정도 이어진 걸 보면 결코 짧은 시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수나라는 단 38년을 유지했으니까요^^ 독특한 문화를 유지하며 후대에 유목 민족의 하나의 루틴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흥미로웟습니다.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단일 민족임을 강조하지만 사실 우리 피에는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죠. 기원설도 여러 개가 있고요. 그리고 이만큼 오래 지났는데 설마 하나이기는 하겠습니까! 고구려, 발해, 수, 당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었답니다^^
 
Animal Farm and 1984 (Hardcover)
Orwell, George / Houghton Mifflin Harcourt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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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도 의심해야 하는 세상에서 항시 긴장하며 정신을 챙겨다니는 일이 가능할까. 온전한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그 반대의 상황은 상상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지. 이 세계는 정말 살아가고 살아남는 것이 치욕일 수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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