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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 되찾은 시간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평점 :
이따금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를 구원하는 신호가 온다. 모든 문을 두들기지만 그 문을 어느 것에도 이르지 않고, 그렇지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문, 100년 동안 헛되이 찾았을지도 모르는 문에 알지도 못한 채 부딪치고, 그리하여 문이 열린다. - P28
마지막까지 무척 고민했다. 4점을 주어야 하나 5점을 주어야 하나. 참 잘 쓴다 생각하면서도 중반 이후에는 비슷한 상황과 계속되는 심리 묘사에 ‘이제 그만’ 하는 마음에 지쳐버리는, 이 복잡미묘한 감정을 어찌해야 하는지. 그렇지만 잃시찾 시리즈 마지막 권이고 시리즈를 마무리한다는 의미로 4점은 박하다는 생각이 있어서 결국 5점을 주었다.
화자는 요양원에서 있으며 외부와 단절하듯 생활하다가 오랜만에 게르망트 대공 부인이 여는 오후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다. 그렇게 게르망트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 과거의 기억들로 이동하며 오랫동안 회상에 빠진다.
화자에게 과거의 시간은 콩브레, 발베크, 베네치아라는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과 상황에 의해 점철된 기억들이다. 그것은 현재와 양립할 수 없는 과거다. 사실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이며 그는 그저 과거의 기억 속 자신과 주변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그는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양한 문학과 예술 작품을 예로 들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 것 같다.
그때 예술 작품만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임을 내게 가르쳐 준 빛보다 찬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새로운 빛이 내 마음속에 비추었다. 그리하여 나는 문학 작품의 이 모든 소재가 내 지나간 삶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소재는 하찮은 쾌락이나 게으름, 다정함, 고통의 순간에 내게로 와 그래서 내 몸속에 저장되었으나 마치 식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온갖 양분이 보존된 씨앗보다도 더 나는 그것의 용도나 생존 가능성을 짐작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 이렇게 해서 그때까지의 내 모든 삶은 ‘소명’이라는 이름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또는 요약되지 않을 수도 있다. - P79~80
지금이야 프루스트 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문학 작품이 생겼지만 당시만 해도 자신에게 글쓰기 재능이 있는지 문학적 소양이 있는지 끊임없이 되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이러해야 한다는 소신을 통해 거꾸로 작가는 이런 생각을 담으려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생전에는 성공하지 못한 작가였지만 그런 의미에서 떡잎을 가진 저자임에 분명하다.
사실 각각의 독자는 책을 읽을 때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독자이다. 작가의 작품은 독자가 어쩌면 그 책이 없다면 스스로 보지 못했을 것을 볼 수 있도록 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책이 말하는 것을 독자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알아보는 것이 바로 책의 진실을 증명하며,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 반대도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저자의 텍스트와 독자의 텍스트 사이의 차이는 흔히 저자보다는 독자에 의해 결정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순진한 독자에게 책이 지나치게 현학적이거나 난해하고 불투명한 렌즈만을 제공하여 독자가 책을 읽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특징은 독자에게 책을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걸 말해 준다. 저자는 그 일로 모욕을 받았다고 여기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독자에게 “이 렌즈가 잘 보이는지 아니면 저 렌즈가 잘 보이는지 아니면 다른 것이 더 잘 보이는지 당신 스스로가 찾아보세요.” - P99
12권에 이어 작가는 사실주의 문학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사물의 본질만으로는 그 어떤 소통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밝혀진 삶,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는 유일한 삶은 바로 문학이다. 이 삶은 어떤 점에서는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매 순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삶을 밝히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과거는 수많은 음화(陰畵)로 가득 채워진 쓸모없는 것이 된다. 우리의 지성이 이런 음화를 ‘현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그리고 타자의 삶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작가에게서 문체란 화가에게 색채와 마찬가지로 기법의 문제가 아닌 비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체는 의식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에서의 질적 차이의 드러남이며, 예술이 없다면 우리 각자에게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을 그런 차이이다. - P74
하지만 나는 그런 시각에는 앞선 리뷰에도 밝혔듯이 회의적이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 사물이 스치는 기억과 상황이 존재한다면 더 특별하게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물, 사람, 공간만으로 아무 가치가 없는가 그것은 다른 이야기라 생각한다.
13권에서는 ‘시간’의 진리, 세월이 변화함에 따른 인생의 노화와 죽음의 수용을 보여주는데 이 부분이 놀랍도록 좋았다.
사교계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세대는 물러나고 세대는 교체되었다. 새로운 세대는 자기들의 문화로 사교계를 변화시키지만 과거의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새로운 세대는 과거의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자연의 순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월은 흘러가며, 젊음은 늙음에 자리를 내주며, 가장 단단했던 재산이나 왕좌도 무너지며, 명성이 순간적이라는 걸 알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방식이, 말하자면 ‘시간’에 휩쓸린 그 유동적인 세계의 사진을 찍는 방식이 모순되게도 그 세계를 고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젊었을 때 알았던 사람들을 언제나 젊다고 생각하며, 반면 나이가 들어서 안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들을 노년의 미덕으로 장식하며, 억만장자의 명성과 군주의 영향력에 아낌없는 신뢰를 보내고 그들이 내일이면 권력을 빼앗긴 채 사라질 것임을 이성적으로는 알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 - P189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도, 우리는 삶의 가장 다양한 풍경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각각의 개인은-나 자신도 그런 개인들 중의 하나이지만-그의 주위뿐만 아니라 타인의 주위에서 그가 이룬 대변화를 통해, 특히 그가 나와 관계하여 연속적으로 차지했던 자리를 통해 내게 시간의 지속을 가늠하게 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이 연회에서 지금 막 포착한 ‘시간’이 그 모든 상이한 면들에 따라 삶을 배열하면서 삶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책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평면 심리학과 대립되는 공간 심리학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했는지. - P303
멀리 지평선에 보이는 것은 신비스러운 위대함의 양상을 띠며, 그리하여 다시는 보지 못할 세계로 닫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바로 다음에 올 세대에게는 우리 자신이 지평선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지평선은 물러가고 끝이 난 것 같은 세계가 다시 시작된다. - P130
영원한 지속은 인간에게나 작품에게나 약속된 것이 아니다. - P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