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읽은 책들을 간단하게 정리한다.
1. 젠더와 역사의 정치
여성주의 책으로 재독한 책이다. 1년 만에 다시 읽어서 그나마 조금 더 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 책은 차티스트 운동에 대한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룬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를 배경으로 노동자 계급의 여성의 역사 사회상을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가정, 직업 세계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확인시켜준다. 도시 중심에 혼자 사는 젊은 여성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 생겨난 제조업에 뛰어든 여성이 있었다. 여성들은 적은 급료를 받다가 도시 빈민층으로 유입되기도 하고 성매매 산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미국의 여성 역사가들을 다루면서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기도 한다. 마지막에 차이와 평등 간 긴장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밝히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이 같은 정치적 맥락 속에 있는 한,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차이"나 "여성의 문화"에 대한 주장들이 원래의 목적과 다르게 사용될 수 있는실제적 위험성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런 주장들이나 그것이 열어 준 지적 지형을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정식화를 할 때, 그것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분명히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밀크맨이 조심스럽게 정식화한 내용은 평등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가장 안전한 방향임을 함축하지만, 그녀는 또한 차이를 전적으로 거부하고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만, 그것이 어느 쪽인지가 문제다. 밀크맨의 양가적 태도는 법이론가인 마사미노우가 다른 맥락에서 "차이의 딜레마"라고 부른 것의 일례다. 종속 집단에 관해 이야기할 때 차이를 무시한다면 "잘못된 중립성을 방치하게" 되며, 차이에 집중하면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강조하게 될 수 있다고 미노우는 지적한다. "차이에 집중하는 것이나 무시하는 것 모두 차이를 재창조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차이의 딜레마다." - P292
2.24시간 시대의 탄생

1980년대를 다루며 이 시대를 이끈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밝히는 책이다. 보통 이 시기를 다루는 책들이 3s정책과 경제 발전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근대를 이끈 개념인 시간에 기반한 주장을 펼친다. (정치적인 이유기는 했으나) 야간통행금지 해제가 되어 24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게 됨으로써 국민 생활의 패턴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국제표준시와 국가 기념일 등이 제정되고 운용되었고 국가적 시간은 국민을 통합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데 이용되었다. 다만 국민의 일상적 시간은 국가적 시간과 충돌하며 갈등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서머 타임제, 명절의 공휴일 제정을 둘러싼 일들이다.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시기를 거치면서 두가지 사회적 시간체제가 한 사회에 오랫동안 공존한 것은 국가의 시간체제와 국민의 일상적 시간체제 간에 계속 경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국가의 시간과 국민의 시간 간에, 그리고 글로벌 시간체제와 로컬리티의 시간체제 간에 괴리가 존재해 국가와 국민 간에 생활주기와 리듬이 일치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서 명절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서 국민의 의견이 수렴되면서 그것은 점차 민족적 색채를 띠게 된다. 그 과정에서 4대 명절 중 단오를 제외하고 설, 한식, 추석은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라는 대통령령에 의해 민족적 명절과 법정공휴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3.오염된 정의
이 책은 친구 분 서재에서 보고 밀리의 서재에 있다길래 찜해두고 얼마 안 읽다 바로 읽었다. 고백하자면 이 책의 제목이 오염된 정의인데 자꾸만 오염된 정치로 봐서 한동안 제목을 머릿 속에 정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는 것. 그동안 혼탁한 정치에 너무 시달려서 정치에 더는 희망이 없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계속 늦어지는 탄핵 선고일로 답답해하던 시기 이 책을 읽으면서 약간 사이다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밑줄이 너무 많아서 고르기에도 민망할 지경.
진실은 타락하고 정의는 오염되었다. 제도는 불신받고 권위는 조롱당한다. 사실을 보도하고 권력을 감시해야 할 언론 또한 아수라다. 무슨 공익적 가치가 있는지 모를 기사들이 넘쳐난다. 언론의 문제들, 1인 미디어라는 더 큰 문제가 덮는다. 탈진실을 선동하고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 궤변이 살아남고 선동이 승리하기 쉬운 시대다. 현재를 비관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상식과 원칙의 힘을 믿는다. 이기심과 술수가 늘 이기는 것 같아도 진실과 명예가 회복되는 순간이 있다. 상식적인 다수가 힘을 실을 때다. 생각해 보면 내가 글을 쓸 때 염두에 두었던 대상은 언제나 상식과 원칙을 믿는 그들이었다.
저자는 한국일보 기자로 대한민국의 진실을 훼손하고 ’정의’를 망치는 정치, 언론, 검찰을 비롯한 사법 등 사회 내부의 문제를 들여다본다. 그동안 취재를 해오면서 겪은 일들을 풀어내주기도 하고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를 책에 실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온갖 일을 겪으면서도 저자는 정치에서 긍정성을 찾아내고 희망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구절처럼 원칙에 따른 정의를 쫓는 이들이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할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리더라면 비판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야당의 반대, 언론의 아픈 질문도 국민의 뜻임을 인정해야 한다. 비판을 들을 용기 없이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는 없다.
2일 전 파면된 윤석열의 가장 큰 문제의 본질은 바로 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4.유토피아
저자가 이 책을 쓸 무렵 영국은 부익부빈익빈으로 한쪽에서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호위호식하는 사람들이 있을 무렵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도둑질하다가 잡혀 교수형에 처해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비단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도 바뀌지 않는 현실인 것은 마찬가지다. 사유재산의 소유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불평등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발생 수순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저자가 생각한 것이 이런 이상향인 유토피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러나 유토피아 내에서도 법과 체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규칙이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사회든 구성원들이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이번에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것은 인간 행복이 즐거움(정신적/육체적 쾌락)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건강은 육체적 쾌락이고 정신적 쾌락은 올바른 행동과 깨끗한 양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유토피아인들은 정신적 쾌락에 더 우위를 둔다고 한다.
저는 사유재산이 완전히 폐지되기 전에는, 공정한 재화의 분배나 만족스러운 인간 생활 조직이 결코 달성될 수 없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한 대다수의, 아니 절대 다수의 인류가 불가피하게 빈곤과 고난과 근심이라는 무거운 짐 아래에서 계속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저는 그 짐을 줄일 수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어깨에서 결코 그 짐을 내려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5.자본을 읽자
세계철학을 공부하면서 마르크스 저작을 한 권씩 읽어보자 생각했다. <자본>을 읽기 전후 참고할 만한 알튀세르의 이 책이 마침 북펀딩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여 바로 신청했었다. 사실 읽기 시작한 것은 2월부터인데 어려워서 읽다 쉬다 읽다 쉬다 하다가 3월을 넘길 수는 없다 생각하여 마음 먹어서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자본이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 그 대상의 차이의 담론에 관한 질문을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자본의 담론이 고전파 경제학파 담론과 어떻게 구별되고 청년 마르크스 철학적(이데올로기적) 담론과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알려준다. 후반부에 <자본>에 관한 이론과 수식을 다루고 초중반부에는 인식론과 역사철학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데 역시나 초중반부가 나는 훨씬 더 관심이 높았던 것 같다.
마르크스는 읽기에 관한 방법으로 이중의 독서 방식을 제안한다. 첫번째 독서는 자신의 담론에 입각하여 선구자들의 담론을 읽는 것이다. 두번째 독서(두개의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가정)는 두번째 텍스트를 첫번째 텍스트의 문제와 연결지어 읽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 저작인 <자본> 읽기를 접목해보자면 <자본>에 대한 다른 독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다른 저작의 독서를 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다른 독서에도 이 방법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든다.
6.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거의 15여년만에 읽게 되었나보다.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읽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읽으니 새롭게 보이는 내용들이 많았다. 변함 없이 들어오는 중요한 메시지는 자기 극복에의 의지이다. 이번에 읽으니 겉치레와 허례허식에 대한 비판이 눈에 들어왔고 국가 등 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인상 깊었다. 20세기 들어와 많은 국경들이 생기고 국가가 생겼으나 보호되어야 할 인권은 중요시되지 않고 민족, 인종과 결합하여 오히려 국민을 탄압하는 사례가 많았다(이는 현재도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저자의 차별적인 시선(인종, 민족, 성별 등)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삶 자체가 내게 비밀을 말해 주었다. “보라, 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국가란 위선적인 개다.
인간은 인간 사이에 살면서 인간을 잊어버린다. 모든 인간에게는 너무나 많은 겉치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