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밤 산책자>라는 책을 집어들고 읽으면서 예전 교토 여행이 떠올랐다.
'여행을 가는 것은 장소가 주는 힘이 큰 것이어서'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때 함께 했던 이들, 주변의 공기, 풍경들이 남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때의 느낌이 긍정적이었든 부정적이었든 느낌이란 건 참 오래가는 것 같다.
교토를 총 2번 다녀왔다. 일본을 총 4번 다녀왔는데 교토를 2번 갔으니 내겐 더 특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느덧 오래 전 일이 되어버려 어떤 장소를 다녀왔는지도 가물거린다.(불과 어제, 그제, 일주일 전 기억도 나지 않는데 기억이 온전할 리는 없다) 사진을 뒤적였다. 여행을 다녀와서 포토북을 만들어두었던 첫 번째 교토 여행은 어딜 다녀왔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덕분에 명확히 보인다. 두 번째 다녀온 여행은 너무나 새로웠다. 그 때 포토북도 만들지 않았고, 인화한 사진들도 없고, 기록도 하지 않아서 사진을 보기 전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사진에는 위치 정보도 없으니 어느 곳엔가를 갔었나보다 중얼거린다. 하지만 사진을 보지 않았어도 어느 곳에 앉아서 술을 마셨던, 그 때가 너무 좋았는지 그 느낌만은 또렷하다.
교토를 처음 갔을 때 겨울이었다. 내 생일 무렵 즈음이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급작스럽게 준비하고 떠났던 여행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기요미즈데라가 있는 것을 알았다. 금각사는 워낙 유명한 곳이라 알고 있었고. 사실 이 두 곳만 봐도 목표는 달성하는 것이었으나 기온과 니조성까지 4군데를 오전부터 시작해서 반나절 안에 다 돌아보았다는 것이 놀랍다. 이 날 내 다리에 족저근막염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과욕을 부렸지.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교토에 최소 1박을 했더라면 그렇게 처절하게 돌아다니지는 않았을 것인데 시간의 압박에 쫓겨 충분히 즐기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쉽다. 덕분에 옆지기와 싸울 뻔도 했었다.
기요미즈데라는 듣던 대로 장관이었다. 연애점으로 유명한 곳이었다는 것은 몰랐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네. 나는 기요미즈데라를 올라 광장 같은 무대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아. 이래서 여길 오는구나.' 마치 높은 산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며 도심을 바라보는 것 같달까. 만약 내가 고소공포증이 없었다면 자유낙하의 상상을 해보지 않았을까.
기온은 가게들을 구경하는 맛이 있는 곳이었다. 다만 내가 돌아다녔던 시간은 일요일 한낮이 되기 전 무렵이어서 가게 주인과 관광객들의 모습만 보게 되어 아쉬웠을 뿐이다. 거리는 께끗했고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지도 않아서 구경하기에도 좋았다.
금각사는 말 그대로 황홀경이었다. 건물이 수면에 비친 모습이 장관이었고 저 금붙이들을 보고 있자니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다만 건축의 재료 뿐만이 아니라 1, 2, 3층의 건축 양식이 모두 달라서 가치가 있다 느껴졌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아주 오래 그곳에 머물며 금각사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많았고 시간은 없어서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간 것을 후회하지 않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니조성은 마지막에 급하게 결정된 곳이었다. 헌데 무엇 때문에 리스트에 넣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니조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지어진 성으로 궁전과 여러 개의 정원들, 해자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대결에서 최종 승리하며 이 성에 들었지만 짧은 역사를 뒤로 하고 이 성은 막부 말기까지 중앙 무대에서 내려온다. 나는 화려한 니노마루 궁전의 정문과 넓은 해자, 잘 꾸며진 정원, 본당의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건축 지식이 얕아서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오반자이라고 하면 '교토 가정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 가정식이라는 말에 걸맞게 가게 내부가 좁다. 짧은 카운터와 테이블은 두어 개에 그칠 때도 많다. 예약 손님만으로 가게가 다 차기도 한다. 구글맵에서 주변의 식당이나 술집을 찾을 때 오반자이 전문 식당이고 밤에 영업을 한다고 나와 있으면, 대개 이런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단골 장사를 하는 집들도 많아, 앉아서 술을 곁들여 이것저것 먹고 있으면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서, 마스터와 친숙하게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두 번째 여행은 3월이었다. 매번 춥거나 더운 계절에만 여행을 했던지라 꽃이 피는 봄을 선택한 것이다. 3월 마지막 날 무렵이어서 벚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대부분 그때쯤 만개를 한다 들었고. 하지만 역시 체험은 다른 것이었다. 막상 도착하니 이제 꽃망울이 올라오고 있었다. 만약 내가 일주일쯤 교토에 있었다면 만개한 벚꽃을 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러기엔 이번에도 교토 스케줄은 반나절 뿐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돌아보아야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때의 여행은 사진 말고 남은 게 없어서 어딜 갔다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만개한 벚꽃을 보지 못하고 시기를 놓친 아쉬움이 기억을 통째로 날린 건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비교적 많이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 썩소를 날리며 사진을 찍고 평상에 앉아서 술을 마셨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흩날리는 벚꽃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쌀쌀한 날씨이긴 했으나 볕이 따뜻해서 날씨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 때의 사진이 마음에 들었는지 윈도우 계정의 프로필 사진은 그것 중 하나로 여전히 사용중이다. 그래도 어딜 다녀왔는지는 알아두어야겠지. 사진을 기반으로 열심히 검색을 했다. 내가 다녀온 것은 바로 은각사와 마루야마 공원이었다. 그러니까 술을 마셨던 곳은 마루야마 공원의 어느 평상이었던 셈이다. 은각사가 떠오르지 않았는데 내가 일본식 정원에 다녀왔다는 것을 사진을 보고서야 알았다. 아! 이곳이 은각사의 정원이었어.
은각사의 정원은 특별했다. 일본식 정원의 진수를 보여준다. 하얀 모래로 그려놓은 그림, 주변의 돌들, 나무들, 꽃들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 감탄을 자아낸다. 사다리꼴 모양을 한 거대한 모래탑(후지산을 본떴다고 한다), 잘 꾸며진 연못, 관음전을 돌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금각사는 사실 건물만으로 이목을 끈다고 한다면 은각사는 건물을 비롯한 정원과 자연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일본식 정원의 백미를 느낄 수 있는 훌륭한 곳이었다.
마루야마 공원은 순전히 벚꽃을 보기 위한 장소였다. 벚꽃은 비록 덜 피었어도 충분히 좋았다. 벚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이 곳이 벚꽃 명소임을 깨닫게 했다. 볕이 따뜻해서 호젓하니 산책하기에도 좋고 사람들 구경하는 맛도 있고 무엇보다 평상에 앉아서 볕과 바람을 느끼며 마시는 맥주의 맛은 일품이었다. 그 때가 오후 4시 넘은 무렵이었는데 어느새 해가 좀 기울고 있을 때였다. 얼마나 마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때 찍은 사진들은 하나 같이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좋은 감정은 사진으로도 나타난다. 이 때의 느낌이 참 좋았어서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가볼 수 있을까.
인생은 너무나 자주 애매한 곳에서 갈등하도록 생겨먹었다. 돌아가지도, 앞으로 가기도 애매하다. 나의 인생은 왜 매번 이러한지. 이런 갈등이 없는 때가 바로 벚꽃 철학의 길이다.
작정하는 방식의 특성상 정원을 완성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 특히 계절이다. 일본 정원의 작정 철학은 자연을 인공적으로 조성하는 데 있다. 나무를 둥글게 깎아 모양을 다듬거나 뒷배경을 차단해 정원을 좀 더 통제 안에 둔다. 키 큰 나무들을 병풍처럼 둘러 세우는 경우도 많다. 한편 중국은 자연에 근본을 두되 자연보다 나은 형태를 만들고자 하고, 한국은 담양 소쇄원처럼 지형을 살려 정원을 조성하고 건물을 올린다. 이것을 인지제의因地制宜라고 한다.
책은 교토의 봄을 즐기는 법, 정원, 가게와 볼거리, 맛집 같이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관련 장소에 어울리는 책이나 영화 등을 소개하여 독자로 하여금 흥미를 돋운다.
여행 주제로 쓴 책은 많지만 가이드는 1, 2년만 지나도 예전 것이 되어 새로 사보아야 하는 아쉬움이 있는 반면 에세이는 설사 책에 등장한 건물이 실상 없어졌다고 해도 글과 사진의 조각을 통해 독자를 그 길로 인도하는 행복을 준다. 이 책은 후자의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하게 해주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