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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Kitchien 2
조주희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0년 2월
평점 :
모처럼 한갓진 주말 오후, 한 통 가득 세탁기에 빨래를 돌려놓고
오랜만에 빌려온 두 권의 요리만화를 읽었다.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 3권과 조주희의 <키친> 2권.
'장보기는 사냥과 비슷하다.'
<어제 뭐 먹었어?>의 에피소드 22는 이렇게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된다.
40대 중반의 잘생긴 변호사 시로는 '게이'로 미용사 애인 겐지와 동거 중인데
퇴근길에 시장을 봐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게 유일한 취미이다.
마지막 남은 세일 채소봉지를 누가 먼저 움켜쥐느냐,
그런 의미에서 장보기는 '사냥' 맞다.
그의 애인 겐지는 그날 오후 퍼머를 하는 동안 세상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었던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한 명의 지명손님을 새로 확보한다.
'각자의 사냥을 끝마친 하루', 둘은 사이좋게 마주앉아 시로의 요리를 먹는다.
에피소드 22의 마지막 장면이다.
깔끔하게 잘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와 구성과 다양한 음식 레시피가 세련된 만환데
'파드득나물'이니 '양하'니 모르는 재료들이 많아 건성건성 보아넘기게 되는 게 단점.
조주희의 <키친>은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을 능가하는 요리만화다.
'어제의 카레'라든지 '비엔나소시지'라든지 먹다 남은 카레나 소시지 하나를 가지고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는 훌륭하지만, 5권까지 끌고 오면서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
많아졌다는 것이 <심야식당>에 대한 내 생각이라면,
<키친>은 한 편 한 편의 에피소드가 구체적인 요리와 함께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키친>2의 에피소드 23 '채식 철판구이'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성공한 여성 CEO나 인기배우, 앵커 등의 인터뷰를 전담하다가
난생처음 요리 파트를 맡게 된 야심찬 젊은 여성 기자.
카메라 기자를 대동하고 그녀가 취재하러 간 곳은 프랑스 유학에서 막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전원생활을 하는 한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집과 텃밭.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펼쳐진다.
- 웰빙이 대세! 마지막 남은 블루오션은 농촌이다.
귀농 젊은이의 성공신화, 그녀가 꿈꾸는 세계.
그러나 이 푸드 스타일리스트는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기자의 야심찬 기대와 구상을
마구 헝클어 놓는다.
"채식 철판구이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시겠죠? 채식의 철학이 반영되었다거나..."
"그냥 맛있으니까요. 제일 좋아하는 메뉴예요.
버섯, 브로콜리, 양배추, 가지, 호박(그리고 감자와 고구마는 따로 살짝 익혀서...)
재료마다 냄새가 다 다르죠? 대부분의 요리들은 재료가 섞여지는데
이건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아 좋아요.(88쪽)
다른 사람의 칭찬을 기대하고 만드는 요리들에 질려 자신을 위한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게 그녀의 유일한 꿈.
에피소드 26 '산사의 크리스마스'는 한 행자의 이런 독백으로 시작된다.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밥을 차려주는 만큼 좋은 공덕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난 행자 시절에 평생 할 공덕을 쌓은 셈이다.(133쪽)
비보이 출신의 행자 친구는 어느 날 스님 독경 소리에 몸이 움찔거려 춤을 추고 싶어
견딜 수 없다고 고백하는데.....
'삼라만상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최소한의 밥으로 나를 만드는 것'과
'다른 사람을 위해 밥을 짓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공덕이라는 깨달음을 뒤로 하고
어느 날 그는 선물 받은 누룽지를 들고 산문山門을 나선다.
이야기가 아무리 재밌고 그럴듯해도 그림으로 보는 요리가 신통찮으면
요리만화는 황이다.
그런데 2권의 첫 에피소드 '나이 드는 음식(떡국)'부터 국그릇 속의 떡과 만두과
얼마나 리얼한지 절로 침을 삼키게 된다.
(쏘가리탕에 둥둥 뜬 고추기름은 진짜 고추기름 같다. 영화로 비유하면 '3D' 요리만화!)
소재도 대단한 요리들이 아니라 생활 속 소박한 음식들이라 더 정감이 간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실린 작가의 이야기도 무지 웃기고, 요리 팁도 알차다.
<키친>은 올컬러에, 책값이 만 원이나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딸아이의 책꽂이에 꽂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