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기 소년 창비아동문고 232
유은실 지음, 정성화 그림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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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을 재밌게 읽고 이름을 기억해 두었던 작가, 유은실.
덕분에 아이의 책꽂이에 없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들을 하나씩 사서
내가 먼저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작품이 <마디타>.
어린 자매가 맞는 크리스마스와 강림절에 대한 묘사가 톱밥난로 불빛처럼 따뜻한 작품이었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학급문고를 만든다며 책 한두 권씩 기증해 달라고 요청하셨다.
좀더 알찬 문고를 위해 책 제목은 추후 지정해 주시겠다고.
그렇게 해서 주문한 <만국기 소년>이 오늘 오후 우리 집에 왔다.

- 내 이름은 백석이다. 우리 아빠가 지어줬다.
아빠는 시장에서 닭집을 한다. 별명은 닭대가리다.

백석 시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나오는 나타샤가
미국 여잔 줄 아는 시장통 닭장사 아버지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는 단편
<내 이름은 백석>으로 시작되는 창작동화집.
조그만 컨테이너에서 여섯 식구가 사는 전학 온 소년 진수는
첫 인사가 끝난 뒤 담임 선생님이 노래든 뭐든 잘하는 것을 해보라고 하자
다짜고짜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외우기 시작한다.(표제작 <만국기 소년>)
한 편 한 편의 짧은 동화가 사람을 이렇게 웃기고 울리다니!

<보리방구 조수택>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파에 누워 읽고 있는데 우리집 강아지 츄투가 달려오더니
긴 혀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공부도 못하고 더럽고 냄새 나서 짝이 되는 것을 모두 기피하는 소년 수택이.
겨울에도 혼자 보온도시락이 없어 찌그러진 양은 도시락에 허연 깍두기만 사오는
수택이의 밥숟가락 위에 어느 날, '고춧가루랑 젓갈이 넉넉히 들어가서
빨갛고 먹음직스런 깍두기'(132쪽)
를 짝궁 소녀가 살며시 올려준다.
수택이는 그런 깍두기를 생전 처음 먹어본다.

6학년 때 우리반에서 제일 공부 못하고 용의가 단정치 못했던 을문이가 생각났다.
보리밥을 먹고 방구를 자주 뀌어 '보리 방구'라는 별명이 붙은 수택이처럼
을문이는 아이들에게서 '을지문덕 장군'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중학교에 진학을 못한 것인지 우리 동네 시장통에 복숭아 리어카를 끌고 다녔는데
나도 뭐 예쁘고 공부 잘하는 소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는데
을문이만 보면 괜히 도도하게 굴었다.

아이의 새 담임 선생님은 아침마다 10분씩 동화나 동시를 읽어주신다고 한다.
어제는 이 창작집에 실린 <손님>을 읽어주셨다고.

- 손님이 오신다고 했다.
집을 옮기고 석 달 만에 처음 오는 손님이다.(110쪽)

로 시작되는 이 매혹적인 작품은 구구한 설명 따윈 전혀 없지만
아파트를 팔고 작은 연립으로 이사온 '갑자기 가난해진 가족'이 석 달 만에
처음 손님을 맞는 정경을 차분히 보여주고 있다.

- 혹시 손님이 책상을 열어볼까?
(...)
의자를 뒤로 밀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좀 떨어져서 내 책상을 보았다.
어딘가 좀 허전했다. 나무필통에 형광펜이랑 키가 작은 연필만 꽂혀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서랍에 넣어둔 새 연필이 생각났다.
고모가 프랑스 여행을 다녀오면서 선물로 준 것이었다.
(...)
에펠탑 연필 다섯 자루를 꺼내어 깎았다. 새 연필을 필통에 꽂으니까 똑같은 키로
나란히 서 있는 게 좀 어색했다. 나는 연필 두 자루를 부러뜨려서 다시 깎았다.
한 자루는 한 번 더 부러뜨려서 또다시 깎았다.
나머지 한 자루는 수학 문제집 틈에 꽂아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115~116쪽)

학원에 다녀온 딸아이와 함께 석 달 만에 처음 화장을 하는 소년의 엄마와
그녀가 튀기는 고구마 튀김과 에펠탑 연필, 그리고 자신의 책상을
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년의 설렘에 대해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아이와 함께 오랜만에 나누는 수준 높은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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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0 1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0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0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1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kddns7777 2011-09-2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참 너같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