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뻐?
도리스 되리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책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여태 보관함에만 머물러 있는 책을 결국 어느 님께 빌려 읽었다.
생각해 보면 나에겐 이상한 똥고집이 있다.
그렇게 재밌게 본 영화 <파니 핑크>의 도리스 되리 감독의 소설집인데,
그리고 1994년도에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그의 소설집 <사랑, 고통 그리고 빌어먹을 것들>을 
재작년인가 우연히 구하여  그렇게 재미나게 읽어놓고도.....

--(행사를 주최한) 청년은 하늘에서 찍은 우리 마을이 인쇄된 엽서 몇 장을 주며
외국인 증오에 반대하는 글귀를 써넣으라고 말한다.
메시지를 적은 엽서는 풍선에 매달려 우리나라 방방곡곡으로 날아갈 거라고 한다.
(...)모두들 엽서에 몇 자씩 끄적인다. 레나는 공주 그림을 그린다.
나는 공주가 내밀고 있는 손 아래에 이렇게 써넣는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요.'('트리니다드'  69쪽)

집까지 방문한 청년들의 열의에 다소 마음이 움직여 딸아이와 함께 외국인 증오에 반대하는
모임에 나간 중년의 여성은 힘찬 구호 대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으니 제발 도와달라"는
 엉뚱한 말을 적어 넣는다.
얼마 전 휴가 때 문경 새재 도립공원을 오르며 사람들이 쌓아놓은 소원 비는 돌탑에 연달아
두 개의 돌을 주워 보태며 나는 기원했다.
가족의 건강과 안녕, 그리고 한미 FTA의 무산과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을......
솔직히 말하면 뒤의 기도는 황급히 보탠 것이었다.
'트리니다드'의 여성이 어쩌면 더 솔직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 이뻐?>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 반대로   <사랑, 고통 그리고 빌어먹을 것들>은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절판된 걸 수소문하여 구했다.
바비 인형의 구두 한 켤레를 훔쳐 베갯잇 속에 숨겨놓았다가 어느 날 엄마가 침대 시트를 갈면서
그 구두가 사라져 버리자 어린 소녀는 두 눈이 빠질 정도로 울며 왜 우느냐고 묻는 엄마에게
이렇게 거짓말 한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어려워, 엄마."

'훙 부인에게 새 신을'이라는 짧은 소설은 황석영의 단편  '섬섬옥수'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의 위선과 자기기만에 대한 얘기.
가끔 들르는 별장이 있는 마을에서 마주친 가난한 베트남인 가족에게 자비를 베풀다가
그 가족이 너무 자신들을 믿고 의지하자 무서워서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는 부부 이야기.

인간의 위선과 자기기만이라, 어쩌면 책 제목이나 작가에 대한 확고한 나의 기호도 
바비 인형의 신발에 유달리 집착하는 소녀의 그것이나 가짜눈물과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르겠다.

도리스 되리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막연히 저 너머의 세상에 한쪽 다리를
걸친 이들이다. 그리고 자신도 어느 날 다른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세상이 비루하고 비속하다고, 자기 마음 같지 않다고 대놓고 욕을 할 수도 없다.
비루하고 비속한 건 첫째 자기자신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사랑을 위해 직장과 가정까지 내팽개치고  부랑자의 삶을 선택하면서까지 사랑에 집착하는 
주인공이나,  진짜 사랑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아이를 유괴하거나
남자를 살해하는 식의 파격적인 인물들이 <사랑, 고통 그리고 빌어먹을 것들>에 나왔다면,
<나 이뻐?>는 좀더 일상에 매몰된, 좀더 나이 먹은 인물들이 구슬프게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자기 연민은 꼴보기 싫지만, 어쩌랴,  바로 나의 모습인 것을.......

<나 이뻐?>를 읽고 난 후 <사랑, 고통 빌어먹을 것들>을 찾느라고 침대 옆에 쌓인 책들을
수십 권 들어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맨 밑에 깔려 있었다.)
꼭 그 책이 필요했다기보다 그 순간 나에게 뭔가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정도 수고 없이 인생을 어떻게 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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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8-08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책정리는 자주 꼬박꼬박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어요...=3=3=3

건우와 연우 2006-08-08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이 수고로운만큼 빛이 난다면, 사는게 좀더 공평하게 느껴질까요...^^

2006-08-08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6-08-08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 정도 수고 없이 인생을 어떻게 살려고......" ㅎㅎㅎ
괜히 이 말을 보니 힘이 나는거 있죠?
이 정도 수고 없이 인생을 어찌..... 쌩뚱 맞지만...홧팅!^^

밥헬퍼 2006-08-08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이쯤 와야 생생한 리뷰를 읽을 수 있군요. 글을 읽다보니 정신차려야 할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나로군요. 요즘 돌아다니느라 읽고 있는 책이 거의 없는지라 책읽는 감이 훨씬 떨어져 있지만 이 글로나마 적잖게 자극이 됩니다. ... 평안하시길.

에로이카 2006-08-08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이 되는 건 사회 속의 나와 내 속의 나가 일치되어 밖으로 드러나도록 훈련하는 과정 아닐까 싶어요. 억압과 자기검열의 내면화와, 그럼에도 계속 꿈틀꿈틀 거기에 저항하는 '리비도'랄까... 그 둘 간의 부적응, 긴장과 갈등을 올바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둘 간의 역관계에서 늘 한 쪽이 우위에 있거나 (따라서 한 쪽의 논리로 다른 쪽을 종속시키거나), 아니면 무척 용기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책과 리뷰내용을 잘 이해한건지..헤헤... 어쨌든 가끔 로드무비님 페이퍼에서 이 용기를 본답니다... ^^

waits 2006-08-09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관함에 오래 묵혀두고 있었는데... 마지막 구절에 마음이 괜히 간절해지네요.
사람마다 살아가며 들이는 수고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어쩐지 그 말 속에 나보다 더욱 수고하는 사람들에 대한 염치 같은 게 느껴져서 좋아요. 전 요즘 뻔뻔한 게 아주 질색이랍니다..,;;

로드무비 2006-08-09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TA 반대 나어릴때 님, 이 세상에서 수고를 좀 더 많이 하는 사람이
좀 더 많은 몫을 가져가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설령 제가 좀 더 가난해지더라도요.
게으르고 방만해서 그러기 십상이지만.....

에로이카님, '친구 찾기' 프로그램에서 뮤지컬 가수 박혜미가
얼마나 눈빛이며 행동이 당당하고 거침없는지 감탄을 하며 보다가
난 세상에 언제 저렇게 한 번 행동해 보나, 중얼거렸더니
마이 도러가 그러더군요.
"용기가 있어야지 저렇게 되지!"
님의 댓글에서 다른 어려운(!) 말은 귀에 안 들어오고
'용기'라는 단어에 눈이 꽂힙니다.
전 가끔 '오기' 같은 게 생겨요.ㅎㅎ
양처럼 순한 아줌만데.=3=3=3

밥헬퍼님, 너무 오랜만입니다.
생생한 리뷰라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바쁘셔서 요즘 책을 많이 읽지 못한다고 하시지만
밥헬퍼님만큼 다양하게 책 읽으시는 분 많이 못 봤습니다.
여름 잘 나시고요.
선선한 가을에는 밥헬퍼님이랑 서재에서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클라인수선 님, 책 몇십 권 들어내기가 귀찮았는데
그렇게 하길 잘했군요.
잠시나마 우리 수선님 힘이 나게 만들었다니!
수선님도 파이팅!!^^

서너 권 남짓 님, 별 걱정을 다하십니다.
기한을 정한 건 사실 나 때문이었는데.(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천천히 마음 편히 읽기로 하지요.
일단 8월말로 그래도 정해놓고요.^^

건우와 연우님, 수고로운 만큼 빛이 나는 그런 공평한 세상을
꿈꿉니다.
님도 저와 비슷한 꿈을 꾸시더군요.^^

메피스토님, 왜 아니겠습니까.
책정리를 좀 하고 싶은데 너무 더워서 엄두가 안 나요.
<사랑, 고통 그리고 빌어먹을 것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중
메피스토님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 한 명 있더군요.^^*

2006-08-09 0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8-09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8-09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무사히 님, 어제 말씀 잘해주셨어요.
대충대충 버릇의 대가는 바로 접니다.
응당 물어봐야 할 일의 경우, 묻는 일조차 귀찮아 하니까요.
별것 아닌 것 가지고 되려 제가 번거롭게 해드린 감이...^^

노 에어컨 님, 우짜꼬! 이 더위에......
잘 챙겨드시고요.
최대한 농땡이 치세요.^^

플레져 2006-08-09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을 읽으셨군요. 기뻐요.
다시 리뷰 쓰라고 하면 잘 쓸텐데 (뭘 모를때 읽고 리뷰 써서 거시기함 ㅋ)
다시 쓸 기력은 없으니... 로드무비님 리뷰로 위로받습니다.
나 이뻐,의 그 깜찍한 악동 소녀의 욕망이 문득문득 떠올라요.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하는 소녀의 건너편에 서서
이런 방법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요.

로드무비 2006-08-0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재밌게 읽었어요.
님이 쓰신 그녀의 최근 영화 페이퍼 내용도 떠올리면서......
묘하게 사람을 위로해 주는 책이랄까?
모두 힘들고 외롭다고.......^^


Mephistopheles 2006-08-0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엑,,,,그 책을 구해 읽을 수 없는 지금 시점에서 그 주인공이 어떤인간인지
알 방법이 없다보니...궁금증만 증폭되고 있군요..로드무비님 미버요~

아키타이프 2006-08-09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비인형 구두가 없어져서 우는 여자애의 거짓말이 어쩌면 솔직한 심정이었는지도... 어렵게 훔쳐서 꽁꽁 숨겨놨는데 허망하게 놓쳤으니... 참 고약한 인생이구나,라고 느낀건 아닐까 하는... 읽은 책도 아닌데 이렇게 적어도 될려나 모르겠네요. 님의 리뷰를 잘 읽어놓고는 엉터리 댓글 적고 갑니다.

로드무비 2006-08-09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이프님, 겸손이 지나치면 뭐가 되는지 아시죠?ㅎㅎ
왜 아니겠습니까.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하고 혼자 되뇌이는데,
사실은 그게 진짜 마음일 때가 있지요.
저도 님처럼 그렇게 읽었습니다.
인생은 피곤한 거잖아요.
훔치는 것도, 감추는 것도, 없어져서 우는 것도......^^

메피스토님, 우연히 만난 아내의 여자친구에게 반해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캐릭터인데 어떤 부분 인상이 님이랑 좀 겹치더군요.
그냥 그 정도로 아세요. 히히~~
(매력적인 부분이 겹친 거니 입 쑥 내밀지 마시고요.)

산사춘 2006-08-09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파니핑크 감독이 쓴 거 아니었음 제목 때문에 안샀을 거예요. 인종이나 나이에 의한 대비가 계속 나오는데도 허위의식일지 몰라도 증말 내 일상처럼 느끼게 하더라구요.

2006-08-10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ndcat 2006-08-10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로드무비 님, <내 남자의 유통기한> 리뷰는 안 올라올랑가요?

2006-08-10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8-10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영화사님, 모처럼 님과 이런저런 얘기 나누게 되어 신났어요.^^

샌드캣님, <내 남자의 유통기한>은 아직 못 봤답니다.
커피담배도 그렇고 보고 싶은 영화 모두 놓치게 생겼어요.
아참, 휴가 잘 다녀오셨나요?^^

산사춘님, 맞아요.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든가, 나이 인종 등에 대해
이 작가도 뭔가 갑갑한 틀이 구축되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전달돼요.
마치 내 문제의 하나를 건드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