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그녀는 겉으로 너무 씩씩해 보이는 게 문제였다.
1957년에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6개월이나 9개월"이면
작품이 완성된다더니 1966년 3월이 되어서야 탈고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배수관이 막혔다든지 부엌에 쥐가 생겼다든지 하는 등의 집안 문제로
집필이 늦어졌다고 하면서도 아주 재미있는 사건을 이야기하듯 전했다.
진을 직접 만난 뒤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그녀에게 그런 일들은 끔찍한 사고였다.
그녀는 정상인의 범주를 넘어설 만큼 일상에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사고가 벌어지면 넋을 잃곤 했다.(132쪽)

--이처럼 무능력하고 불완전하게 보이는 여자가 어쩌면 그렇게 또렷하고 우아하고
힘이 넘치는 작품을 남길 수 있었는지에 얽힌 수수께끼는 지금도 해결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태어난 카리브해 동쪽의 섬나라 도미니카를 알게 된 이후,
진이 삶에 서툰 이유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 <그대로 두기>  다이애나 애실 著, 134쪽)



뻔한 말이지만 어떤 사람의 겉모습, 표정, 그 입에서 나오는 말 등으로
그를 속단하면 종종 낭패를 당한다. 
특히 작가들!
영국 안드레이 도이치 출판사에서 평생, 그러니까 70세를 넘길 때까지 일한
다이애나 애실의 여성 편집자로서의 자서전 <그대로 두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위에 소개한 주인공은 진 리스( Jean Rhys)라는 여성 소설가.

많은 작가들을 가까이에서 만나는 건 독자들로 봐서는 편집자의 특권에 속할 텐데
사실 그 편집자의 역할이라는 게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예전엔 심하게 말해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을 때도 더러 있었다.

나는 출판사에 오래 근무하진 않았지만 직업의 특성상 작가들을 단기간
가까이에서 많이 만났다.

한때 절친하게 지낸 한 소설가는 오밤중에 자는 사람을 깨워 칠순의 어머니가
제습제를  설탕인 줄 알고 커피에 넣어 마셨는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나의 대답, "물을 많이 마시면 되지 않을까요?"

십몇 년 전 전화기에 부착하는 음성녹음기가 처음 나왔을 때
어떻게 해야 음성이 녹음되는지 집에 와서 좀 봐달라고 하여 퇴근후 달려간 적도 있다.
문제는 내가 글도 쓰지 않는 주제에 그 방면의 무능력자여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것.

언젠가 스페인 여행 중 플라멩코를 추는 한 무희에게 반해 돌아와 싱숭생숭해 하더니
그녀를 만나기 위해 다시 스페인행 비행기표를 끊은 여성 작가도 있었다.
새로운 사람에게 무섭게 열중하고 가차없이 등을 돌리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다 보니
나중엔 그 열정이라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동서양 사상과 철학, 명상과 선禪, 구도에 대한 책이 사방 벽을 덮은
어느 여성 시인의 서가를 보고 감탄했더니, 다음날 술집에서 취하여 사소한 다툼 끝에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며 친구의  머리채를 잡고 뒹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가들의 열정과 집착, 좋게 말해서 그렇고, 불성실하고 무능한 면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지긋지긋한 구석이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아예 종자(!)가 다른가?'  하는 의심을 품기도 했으니......

아무튼 그 시절에도 친구로 교류한 사람은 몇 안 되고 지금은 모두 연락이 끊어졌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속을 터놓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그 일을 했다면 명맥은 이어 나갔겠지.

내가 가까이에서 잠시 지켜본 혼자 알고 있기 아까운 문인들에 대한 일화를
언젠가 실명으로 글을 써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십거리밖에 안 될 바에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책에서는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넘어서 영혼을 이해하려는 편집자 다이애나 애실의
균형감각과 노력과 자질이 돋보인다.
한수 배우는 느낌이랄까. 뒤늦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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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2 1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02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DJ뽀스 2006-07-02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읽어보고 싶네요. ^^:

치니 2006-07-0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안목'은 역시 쉽게 생긴 것이 아니었군요.

바람돌이 2006-07-03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제 주변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사람으로만 가득찬 느낌이 드네요. 약간 재미없어요. ^^

중퇴전문 2006-07-03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쉽거리, 적극 환영. 실명과 사건들의 공개를 두려워하지 않는 증언 문화가 하루빨리 정착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nada 2006-07-03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반가워라. 무비님을 뵌 적은 없지만 이 책 읽으면서 왠지 무비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다이애나 애실처럼 인간적이면서 화끈하고 유머러스한 분일 거 같아서요. 저도 나이폴과 진 리스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던데.. 진 리스의 삶은 정말 안타까워요.

(종자가 다르다는 데 한 표 던집니다...)

로드무비 2006-07-0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양배추님, 씨네21에서 김소희 기자가 신간을 소개했고요,
님의 리뷰 읽고 바로 주문한 책인데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그녀의 샤프함, 통찰력, 균형감각, 유머, 인내심 등에
경탄을 금치 못했어요.
전 뭐 편집자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문장 고치는 일 위주로만 일을 해서 책 제작과정도 모르고
얼치기입니다.('종자'라는 표현 산뜻하죠?)

중퇴전문님, 그게 거시기한 것이 주로 어두운 쪽,
치부에 속한 일이라 글로 쓰기가 거시기합니다.
제가 지껄인 말에 누가 상처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가끔 생각나는 대로 페이퍼에 재미난 일화 소개할게요.
이니셜로...

바람돌이님, 글쎄, 전 상식적이면서 지루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더라고요. 님도 그러시죠?^^

치니님, 헤헤, 안목이라고 하시니, 정말 그런 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깨를 으쓱해 봅니다.=3=3=3

DJ뽀스님, 이 책 무지 재미나요.^^

이런 경향님, 저라고 왜 저런 점이 없겠습니까.
특히 남녀관계는 냉혹한 부분이 있어요.
먼저 끝내고 싶을 때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상대를 배려하는
센스가 필요한데, 어려워요.
자신의 열정도 한 걸음 떨어져서 빤히 바라보는 과정도 필요하고.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인간관계.;;

2006-07-03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7-03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월 한달은 님, 알았어유.^^

건우와 연우 2006-07-03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리뷰는 심하게 지름신을 부추기십니다.^^

sandcat 2006-07-03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가끔씩 새어나오는 이런 비화들만으로도 충분히 즐겁습니다. 제가 좀 소박한 편이라 =3=3

로드무비 2006-07-0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드캣님, 예상과 달리 엄청 소박하시군요.ㅎㅎ

건우와 연우님, 이 책은 바로 지르시기를!
(땡스투 확인 잊지 마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