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토나 나라의 사원에 가서, 고풍스럽게 어둑어둑한 그러면서도 깨끗이 청소된
변소로 안내될 때마다, 정말로 일본 건축의 고마움을 느낀다.
(...) 어느 정도의 옅은 어두움과, 철저히 청결한 것과, 모기 소리조차 들릴듯한
고요함이  필수조건인 것이다.
나는 그런 변소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 듣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간토(關東)의 변소에는 벽면 맨 밑바닥에 길고 가는 창문이 붙어 있어,
처마끝이나 나뭇잎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석등의 지붕을 씻고 징검돌의 이끼를 적시면서 땅에 스며드는 촉촉한 소리
한결 실감나게 들을 수 있다.(<그늘에 대하여> 13쪽)

 

다니자키 준이치로 하면 왠지 '탐미'라는 단어와 함께 오래 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제목 미상의 무슨 책이 떠오르는데   "추녀의 깊은 정"이라는 그의 표현이 무척 인상 깊었다.
나는 그 표현에 얼마나 전율했는지 앞으로는 절대로 사람들에게 깊은 정을 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ㅎㅎ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산문집 <그늘에 대하여>는 고운기 시인이 번역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오랜만에 한 줄 버릴 데 없는 유려한 문장을 읽어내려 가는 맛이 각별하다.

나는 가끔  "어둑신하다"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이 책에 나오는
'그늘'은 바로 이 "어둑신한 상태"를 뜻하는 듯하다.
며칠 전엔 저녁을 먹다가 남동생에게 한마디 지청구를 들었다.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고 막 들어온 동생에게,

"문을 여니까 김치찌개 냄새가 복도까지 낭자하니 좋지 않더나?"하고 물었던 것.

"가만 보면 누나는 멀쩡한 단어를 이상하게 자기마음대로 끌어다 쓰더라?
'피가 낭자하다' 할 때 '낭자하다'를 쓰는 거지, 누가 음식 냄새를 그렇게 표현한단 말이고!"

듣고 보니 머쓱했지만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이 있는 나는 앞으로도 "어둑신한"이라든지,
"낭자한"이라는 말을 내 맘대로 갖다붙여 쓸 것이 틀림없다.

아무튼 의학전문 기자 홍혜걸은 텔레비전의 어느 프로에 나와서
화장실 조명은 최대한 밝게 하여 자신의 안색과 변의 상태를 때때마다 자세히 살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어둑신한 변소 예찬에 공감한다.

언젠가 은은한 조명 아래서 어느 남성에게 딱 한 번 들었던 "예쁘다"는 칭찬을,
아직도 나는 못내 그리워 하는 것일까?

 







*****별 다섯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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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1-1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뜻 기억은 나지 않지만 형용사를 이상하게 갖다 쓴다고
혼난 적이 있어요...그 느낌에 맞는 뉘앙스를 살려 보겠다는데!
왜 구박인거죠....흑흑
국어병 환잔가봐요 ㅜ.ㅡ
(부시는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대통령이라고
기자들이 English Patient라고 놀렸다죠?)

플레져 2006-01-1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댁에 좋은 조명 하나 놔드려야겠어요...총총...
(아버님댁에 보일러 놔드려야겠어요 버전~)

mong 2006-01-13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어둑신하고 분위기 나는 걸로요
(속닥)

플레져 2006-01-13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너무 밝지 않은 걸로요.
(속닥2)

로드무비 2006-01-13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플레져님, 역시 조명 이야기로 흐르네요.ㅎㅎ

서연사랑 2006-01-13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그런 단어를 구사하시는 게 로드무비님만의 매력인데요?^^

2006-01-13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6-01-13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르기도 하시지. 이거 보관함에 담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사서 읽고 계시다니요.
쟁여놓은 책만 보실거라고 한 거, 역시 농담이었지요? ㅋㅋ

낮달 2006-01-14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둑신함'에 딱 어울리는 풍경은 김동리의 단편 <무녀도> 들머리의 묘사가 아닌가 싶은데, 역시 나는 다소 '음산함'의 의미로 그걸 받아들인 듯하네요. 다시 생각하면 도깨비들이 등장하는 옛말에 슬그머니 등장하는 일몰과 밤의 경계쯤에 해당하는 표현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낭자하다는 표현은 습작시절에 '웃음소리가 낭자했다.' 정도로 써 보았는데, <(물건 따위가) 마구 흩어져 있어 어지럽다.>라는 정도의 뜻이라면 반드시 부정적인 뜻만은 아닌데, 왜 그게 '피'와의 조합으로만 기억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하여간 이런 '택도 없는 얘기'를 해도 되는 이 방은 썩 마음에 듭니다그려.

비로그인 2006-01-14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탱스투하고 꼭 구입하겠습니다.
제 기억에 변소가 무지 컸던거 같은데
변소에서 듣는 빗소리라
이건 좀 제겐..ㅎㅎ
아 김찌찌개 냄새 낭자한 집에 초대받고 싶어요..^^

로드무비 2006-01-14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님,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고운기 시인이 너무 잘 만났어요.
감탄하며 한 줄 한 줄 읽고 있습니다.
땡스투 잊지 마시고요.ㅎㅎ
(김치찌개 냄새 낭자한 집에 초대하죠, 뭐. 인심 쓰듯.^^)

낮달님, 일몰과 밤의 경계, 맞아요.
'웃음소리가 낭자했다'는 표현을 들으니 갑자기
최인훈의 '웃음소리'가 생각나네요.
호콩을 먹던 그레이구락부 멤버도 연이어......
웃음이 낭자하다면 냄새가 낭자한 것도 어쩌면 용납이 되지 않을까요?
(이 페이퍼 카테고리가 마음에 드신다는 거죠? 헤헤~)

블루님, 이 책 저 책 집적대고 있는 형편이라오.
님께 빌린 책 두어 권도 그 대상.
그런데 이제 찐득하니 독서하긴 다 틀린 것 같네요.
책 읽다보면 뭔 생각이 그리 몽글몽글 피어나는지
페이퍼 쓰고 싶어서 달려와 쓰다보면 그날의 독서 끝!^^

endo님, 저는 왜 사전 찾아볼 생각도 안했을까요?
약간의 감수성만 가지고 책을 읽으니 언제나 허덕입니다.ㅎㅎ
제가 '복도까지 낭자'라고 했잖아요.
그게 이런 연관성은 혹 없는지 몰라요.
'복도'를 '낭하'라고 불러보고 싶은데 그건 시인들이나 쓰는
멋진 단어라는 생각 때문에 두 개를 결합하여.ㅎㅎㅎ

속삭이신 님, 그럼 거기가 회사 주소인가요? 갸우뚱.
너무 빠른 재판 돌입 소식은 저도 의외였어요.^^

서연사랑님, 알라딘에만 오면 저는 이렇게 매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하루종일 서재활동만 하고 싶어요.ㅎㅎ

2006-01-14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1-14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투정이라니!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무해한모리군 2006-01-16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글을 한번도 읽은적이 없는데 로드무비님 글을 보니 꼭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문어체로 표현하다가 많이 혼납니다. 저에 비하면 얼마나 문학적이고 좋습니까.. ^^*

로드무비 2006-01-17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방동이님, 처음 뵙는 분이네요. 반갑습니다.
문어체로 말한다고 하시니 '경마장 가는 길'의 문성근이 떠오르는군요.
그리고 저 별로 문학적인 인간 아닙니다요.ㅎㅎ

로쟈 2006-01-20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구입한 책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덕분에 생각이 났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당장에 읽을 수 있는데...

로드무비 2006-01-25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까맣게 잊고 있던 읽을 만한 책 발견하면 무척 반갑죠?
공돈이 생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