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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 가는 길 - 선방의 향기 따라, 선객들의 발자국 따라
정찬주 지음 / 열림원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대학 1학년 때 미팅을 했는데 팝송 제목과 가수로 짝을 맞추었다.
내가 골라든 쪽지엔 빌리 조엘의 '마이 라이프(My Life)'가 적혀 있었다.
빌리 조엘이라는 쪽지를 들고 씩 웃던 부산 D대학 국문학과에 다니는 키가 큰 남자아이.
우리는 그 뒤 학보를 두어 번 우편으로 주고받다가,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을 무렵 우연히
남포동 길에서 맞닥뜨리게 되어 부영극장 뒤 전통주점으로 홀린 듯이 갔다.
거기서 맥주를 마시며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영도에서 아버지가 쌀집을 한다던 그 아이, 방학이면 아버지를 도와 무거운 쌀자루를 이고
배달을 한다던 그 아이.
내 손에 자기가 읽던 책이라며 무슨 절에서 발행된 조그만 책자를 손에 쥐어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반야심경 강의>였다.
그날은 내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그동안의 금기(입학하고 무려 4개월여
술을 입에도 안 댔다 )를 스스로 깬 날이며, 불교 책자를 처음 손에 접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양산에서 국어 선생을 한다는 말을 10년 전쯤 얼핏 전해 들은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가 양산을 지날 때
그 아이가 생각났고,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 나의 강력한 주장으로 제2송도며 태종대를 온 가족이
드라이브하는데 쌀집 간판을 지나칠 때마다 차속에서 몸을 비틀어서라도 그 가게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되었다.
휴가 마지막날, 4층 우리 집 복도에 나와 있는 낡은 책장 속 <반야심경 강의>가 문득 눈에 띄었다.
-- 일대사(一大事)라 함은 오늘 지금 이 마음을 말함입니다.
오늘 하루를 '영원한 오늘'로 보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오늘을 아는 사람입니다.
찰나(刹那)에 영원을 잡는 사람입니다. 무한(無限)을 손안에 휘어잡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야심경강의>중)
그러고보니 나는 이상하게 오래 전부터 절에 가면 대웅전 마룻바닥 구석자리가 그렇게 좋았다.
향 냄새도 싫기는커녕 좋기만 하여 코를 벌렁대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엉겁결에 <반야심경 강의>를 읽고 나서 불교에도 관심이 생겨 기회가 되면
가리지 않고 읽게 되었다.
얼마 전 내 손에 들어온 <금강경 강의>도 성경처럼 한 번 통독하려고 한다.
이 책 <선방禪房 가는 길>은 이번 휴가길에 여동생의 책꽂이에서 빼왔다.
이 책에 나온 어떤 스님의 말씀이 어떻고 어떤 절, 어떤 선방이 좋고 그런 말은 하지 않으련다.
'집착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슬그머니 내려버린 지 오래다.
'집착 좀 하면 어때, 흥!' 하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요즘은......
"당신은 지금 당신 자신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살고 있습니까?"하는 한 선승의 질문에
"그렇습니다!"하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날은 언제 오려는지......그런 날이 과연 오기나 할랑가?
그리고 내가 한 오십 년 유유자적 걸터앉고 싶은 널찍한 바위는 이 세상 어디에 있는 걸까?
산중 꽃은 저 혼자 피어나지만 그 꽃향기는 계곡 아래로 흐르는 법이다. 이 도리야말로 선방 수행자들이
세상에 있어야 할 이유다.(아주 풍성하게 실린 숲길이나 절, 선방 사진과 함께 소설가 정찬주가 공들여 쓴
캡션들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