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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와 무늬
최영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머리가 너무 나쁜 것인지 나 스스로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인지 몰라도 어린 시절 일들이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니 어린 시절을 소재로 해서 소설은커녕 손바닥만한 에세이 하나 제대로 쓸 수 없는 인간으로서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산 이 작가의 세세한 기억력에 찬탄하며 책을 읽었다.
<흉터와 무늬>에서 최영미는(작가는 후기에서 이 책이 어디까지나 허구라고 밝히고 있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작가의 얼굴을 장면장면마다 대입하며 읽었다. 단 둘이는 아니었지만 여럿이 어울려 새벽까지 술을 마셔본 적도 있고, 실제로 그녀가 나보다 먼저 택시에서 내린 것도 이 책의 배경처럼 세검정 모 빌라 골목이었다. ) 두세 살 때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셔서 방 안에 사람들이 들끓고 혼자 누운 자신은 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고 말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여 내 인생 중의 그런 장면을 생각해 보면 서너 살 때 꾀죄죄한 런닝 바람으로 꽃밭 앞에 서서 오만상을 찡그리고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남아있을 뿐.
--신이여, 이 글을 썼던 손을 용서하소서. 라고 단 한 줄의 의미심장한(그녀답지 않게 너무 호들갑을 떠는 느낌!) 문장이 적힌 페이지를 뒤로 넘기면 ' 1.거울 앞에서'를 시작으로 '137. 다시 거울 앞에서'로 끝나는데, 차례로 번호를 달고 있긴 한데 대부분 심상하고 무심한 제목들이다. 그 내용은 대부분 '지긋지긋한 집구석'(황지우의 시에서)과, '아무도 안 보면 내다버리고 싶은 식구'(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표현)에 관해서이다. (집과 가족에 관한 이 표현을 꼭 한 번 써먹고 싶었는데 너무 잘 됐다.)
'14. 아무도 무시 못할 몸' '23. 참기름에 볶은 밥' 같은 제목을 보라. 이런 식이다. "오늘 네 생일인데 뭐가 먹고 싶니?"하고 엄마가 물었는데 "참기름에 밥이나 볶아줘!"하고 대답했더니 엄마의 얼굴이 흐려졌다는 것이다. 평소 감상과 과장이 과도하게 들어간 글은 속이 느글거려서 절대로 못 읽어내는 나로서는 평소 이 작가의 냉소와 위악이 적당히 섞인 글이 기호에 맞았다. 그러니 작가의 자전적인 이 소설도 단숨에 읽힐 수밖에......
태어나면서부터 심각한 선천성 심장병을 가지고 태어나 왈가닥 자매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구석에서 골골거리다 열여섯 살에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위장입양, 수술 후 한 줌 재로 돌아온 언니가 이 장편소설을 쓰게 한 동인이다. 그런 피붙이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무시했다는 죄책감. 설령 작가에게 그런 언니가 실제로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짧은 생애를 두 줄로 정리만 해도 가슴 먹먹해지는 그런 규모와 심도의 상처는 언젠가 제대로 정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손에 의해 서둘러 봉합되었던 무수한 상처들.
--장례식은 산 자를 위한 의식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스스로를 달래는 절차를 우리는 생략했다. 꽃도 촛불도 없었다. 우리는 언니를 매장하지 못했다. 독한 향이라도 피우고 식구끼리 얼싸안고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음을 쏟았다면 지금쯤 언니는 희미해졌을 텐데. 우리는 우리를 치유하지 못했다.(261쪽)
작가를 떠올리게 하는 자전적인 성장소설이라면 은희경의 <새의 선물>도 그렇고 몇 편 있지만, 137개의 번호와 제목을 달아 짧은 산문 형식으로 써나간 이런 소설의 형식은 내가 알기로는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신선하다는 느낌을 주더니 중반을 넘다보면 다소 어리둥절해지는 느낌도 있다.(시인은 고육지책으로 이런 소설 형식을 취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슬그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자매들의 캐릭터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처럼 팔을 뻗으면 만져질 것 같은 것도 이 책의 묘미.
아버지의 발길질에 밥상이 날아가던 어린 날을 혹시 슬로비디오로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곰곰 생각해 보면 우리들 지나간 날의 생채기는 흉터가 되었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희미한 무늬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