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양철지붕 아래서
오병욱 지음 / 뜨인돌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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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사진을 찍어 올린다. 화가의 얼굴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이다.

-내가 아는 오병욱은 특별한 귀재이다. 그는 화가이기 전에 시인이고 철학자이며 사진가이고 음악가이자, 일찍부터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 머무르면서 자연의 언어와 빛깔 그리고 자연의 냄새와 소리를 익힌 사람이다.(화가, 김병종)

(**클릭해서 큰 사진으로 보시면 좋아요.)

--양철지붕집이라 여름엔 덥다. 그래도 우리집에 다녀간 사람들은 여름이 제일 좋단다. 양철지붕 아래서 듣던 소나기 소리 때문일까?(17쪽)

화가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1990년 5월, 할머니 혼자 살고 계시던 경북 상주의 빨간양철지붕 집으로 기어들었다. 식솔을 이끌고......

우편함을 하나 대문간에 매달았더니 딱새가 알을 낳았다. 딱새 집이라 크게 써주고 그 옆에 새로 우편함을 하나 달았다.

--새끼가 날아오르기 좋도록 팔을 쭉 뻗고 가만히 손을 폈다. 손바닥을 차고 날아오르는 순간에 약한 무게감과 가슬가슬한 발톱을 느낄 수 있었다. 좋겠다. 쟤네들은 하루만 연습해도 저 정돈데 우린 이게 뭔지 모르겠다.(29쪽)

사진은 양철지붕집의 어둑신한 방. 목침을 베고 늘어지게 한숨 자도 좋겠고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봐도 좋겠다.

--상주 시내에 있는 커피가게 주인한테 삭발한 전시 포스터를 한 장 주었더니 다음날 바로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놓았다. 재즈 뮤지션들 사진하고 잘 어울린단다.(34쪽)

'마음 한없이 고요하여라. 그 위에 향기로운 일감이 오다.'
이중섭이 원산 화실에 써 붙였다는 이 말은 빨간 양철지붕집 화가의 마음속 등불이 되었단다.

왼쪽이 암컷 '쏭(Song)'이고 오른쪽이 수컷 '칸(Khan)'이다. 여름엔 개들이 더울까봐 등나무 아래로 개집을 옮겨준다. 쏭이 낳은 강아지 네 마리 이름은 도,레,미,파. 짧고 간단하고 기분좋은 이름이다.

--우리는 시골생활의 이런저런 단점과 불편을 뜻밖에도 쉽게 받아들였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우린 그저 '잠깐 소풍을 나온 것처럼 가볍게' 살았던 것이다. 나는 내가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건 웃으며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중요한 한 줄기만 확보되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122쪽)


--모 국립대학엔 가서 부임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교수보다 백수가 좋다고 했다. 난 지금도 그림 이외에 다른 직업을 갖는 일을 부끄러워한다. 그 결벽 때문에 내 인생은 힘들어졌다.(124쪽)

한쪽 벽에 책이 가득 쌓여 있고 기타가 나뒹구는 화가의 널찍한 방. 방문 창호지 하나도 어쩜 저리 멋들어진지......

'나의 희망' . 1998년의 수해로 인근 폐교 화가의 작업실 그림들이 몽땅 떠내려가고 망가졌다. '나의 희망'이라는 제목 덕이었는지 단 한 점 멀쩡하게 보존된 그림.

"저...... 건너편 초등학교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요. 이번...... 그림이 떠내려가서......피해신고를 하라기에......"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자 면사무소 직원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런 거는 나중에 면사무소로 직접 나오세요. 그리고 집이나 논밭이나 축사 같은 부동산이 보상 대상이지, 그림이나 돼지 같은 '동산'은 보상 대상이 아닙니다."
그림이나 돼지? 차라리 잘 됐다. 일단 빨리 여기서 도망치자.(97쪽)

'내 마음의 바다.' (2004, 200호 캔버스 두 개의 그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날이 있다. 그런 날 이 책 속의 화가를 만나면 좋으리라. 화가가 직접 찍은 그의 시골집 풍경과 이러저러한 사진들과 유려한 글이 위로가 될 것이다.


(**이 책을 낸 출판사와 아주 약간의 관계가 있지만 책이 너무 좋아 포토 리뷰로 당당하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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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5-23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 두 마리 앉은 사진이 젤 좋아요. 시원하고 은밀해 보이는 나무그늘 아래 개집, 개집 앞에 우아하고 꼿꼿하게 앉은 두 마리 개... 근데 책을 누른 저 빨간 건 뭘까 하는 분위기 깨는 궁금증이... ^^

Phantomlady 2005-05-23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 표지의 담배 피는 대머리 아저씨가 화가예요? 스타일 멋지시네~~ 이런 멋진 분인 줄 알았으면 책을 살 껄 그랬나.. 저도 다음에 사기로 하고 서점에 서서 후다닥 책을 읽었는데 (..)(") '커피 가게 주인한테 삭발한 포스터' 어쩌구 하는 글과 함께 사진이 실려서 그 커피 가게 주인인가 했다는 ^^;

강남의 유명한 입시학원을 물려준다는 것도 사양했다니 그 예술적 결벽성이 대단할 따름입니다 예술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 거 같아요..

urblue 2005-05-23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세상엔 재밌게 사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인터라겐 2005-05-23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를 마다하는 사람이 진정 챔피언입니다... 뭔소리? 사람은 물욕에 약한데... 저도 저런 마음가짐을 배워야할터인데...

로드무비 2005-05-23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엊그제 노래방 가서 우리 남동생이랑 주하가 불렀는데...ㅎㅎ
책읽고 잠시잠깐 그런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습니다.^^
블루님, 저 화가 너무 매력적이에요. 글도 얼마나 잘 쓰는지...^^
스노드롭님, 서점에 서서 도대체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왔능기요?
저도 저 포스터 가지고 싶어요.
그리고 예술가, 그거 아무나 못하죠.^^;
숨은아이님, 새끼들 사진도 있는데 올릴까 하다가...
님 이 사진 이 책 좋아해 주실 줄 알았구먼요.^^
그리고 저 빨간 건 고래 모양이 뻥 뚫려 찍히는 뭣인데요.
이름이 기억 안 남.;;

chika 2005-05-23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전에도 책 주문하고 왔는데.. 정말 서재질이 늘어나면서 느는건 지름신의 강림...
ㅠ.ㅠ

로드무비 2005-05-2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아무리 책이 많이 쌓였더라도 이 책 꼭 사세요.ㅎㅎ
땡스투 누르시고요.^^

2005-05-23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5-2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워요..빨간 양철지붕..근데 쥔장의 쌍라이트가 너무 눈부셔요! 게다 저렇게 책을 쌓아놓으면 낭중에 보고 싶은 책을 빼내려 할 때, 저거 다 무너지는데..

히피드림~ 2005-05-23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나 돼지"? 언제부터 그림과 돼지가 한 문장 안에서 서로 다정하게 동급이 됐죠? 화가자신도 면사무소에 찾아간 자신이 참 순진하게 여겨졌겠네요...

로드무비 2005-05-24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님, 수해로 집을 잃은 촌로들 앞에서 화가는 자신이
그림 그리는 사람이란 걸 부끄러워하더군요.
그 심정을 잘 알 것 같았습니다.
복돌이님, 늦게라도 엽서 내놓으세요.
ㅎㅎ 쓰고 싶으실 때...공선옥 씨 책 선물은 님께 아직 유효합니다.^^
속삭이신 님,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무지 신기하네요.^^

잉크냄새 2005-05-30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철지붕위의 소나기 소리...찜통같은 오후, 그 말만으로도 시원해집니다.

로드무비 2005-05-3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좋아하실 줄 알았네요.ㅎㅎ
양철지붕 아래의 서정을 님말고 누가 또 그렇게 잘 알겠습니까요.
(오랜만에 뵈니 반가워서 아부가 절로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