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절반쯤 남겨둔 김형경의 책을 읽었다. 2년 전인가?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다가 지겨워서 그만뒀었는데 어쩌자고 이 책을 또 산 것일까?

1990년인가 91년도에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주최하는 독서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독서란 오로지 혼자 하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골방형 인간인 내가 그 무렵엔 어쩌자고 안 쑤시고 다닌 데가 없다.  '영화공간 1895'에서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물어>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일본영화들과  <카이로의 붉은 장미>니 <시민 케인> 등을 관람했고 , 또 xxx직장청년연합에 가입해 1년 남짓  자발적으로 모임과 각종 시위에 참여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의외이다.

늦가을 어느 날 그 독서모임에서  대성리로 1박 2일의 엠티를 갔다. 늦은밤, 김남주 시인께서 우리를 격려해 주기 위해 오셨다. 발제니 토의니 준비해간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자 당연히 술이 몇 차례 돌고 몇 사람이 먼저 뻗었다. 나도 그 중 1인이었다. 엄청나게 큰 방에서 남녀 가릴 것 없이 널부러져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내 귀에 들어왔다.

"선생님, 피곤하고 바쁘실 텐데 이 오합지졸을 위해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신 것 감사드려요."

"오합지졸이라니! 나는 젊은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요."

하마터면 나는 벌떡 일어나 내 또래 모 중학교의 국어선생이라는 그녀의 뺨을 한 대 갈길 뻔했다.(아직까지 내 인생에 누군가의 뺨을 갈겨본 일은 한 번도 없다.) 존경하는 시인에 대한 고마움이 사무쳐 인사를 차린답시고  한 말이라고 백번 양보해 보아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오합지졸과 계속 섞이고 싶지  않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형경의 <사람 풍경>을 읽고 나자 12,3년 전 새벽의 그 불쾌한 느낌이 떠올랐다. 그녀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 정신과 의사와 오랜 기간 상담을 하고, 스스로 명리학을 공부하고, 가진 거라고는 집 하나뿐인데 그 집을 팔아 세계각국을 떠돌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왔다 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다. 방랑벽이 있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던 예술가들은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고, 다른 사람에게 유난히 친절하고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해서라고?(그녀는 어느 독자의 이런 반발까지 예상했는지 어떤 사람이나 사안에 발끈하는 그 심리의 기저란 이런 것이다, 하고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구석을 마련해 두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솔직해지기로 했으며 그토록 구박하고 돌보지 않았던 자신의 몸과 여성성을 한껏 돌보고 즐기기로 했다니 축하할 일이다. 모쪼록 그녀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잘 가꾸어가길 바란다.

그런데도 내게는 이 작가의 목소리가 12, 3년 전 새벽에 사람들을 싸잡아 오합지졸로 매도하던 그 목소리와  겹쳐져 약간의 불쾌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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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2-22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책 읽느라 바쁘셨군요.. 아님 다른 일이라도?

비록 님께는 불쾌한 기억을 불러 일으킨 책이었지만, 저는 님의 글을 볼 수 있어 좋군요..^^* 하지만 저도 저런 류의 책은 읽고 싶지 않아요....

로드무비 2004-12-2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친정부모님이 며칠 와계셔서요. 오늘 아침 내려가셨어요.

잘 지내셨죠?

마음 가는 대로 책을 읽는 것이 그 중 좋더군요. 날개님처럼......^^




반딧불,, 2004-12-2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요.

저는 그 말이 그렇게 받아들여지지는 않거든요.

그냥 명망있는 시인 앞에서 조금 낮춘 겸양의 말은 아니었을까요??

스스로에게도 참 박한 편인 분인지라...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닌지...

일부러 기분 나쁘게 하신 것은 아닌 듯 한데...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실은 전 그 퍼주는 것이 존재증명이라는 말에 조금은 동감하거든요.

백프로까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인 듯 합니다.

로드무비 2004-12-2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반딧불님이 그 여성 아니세요?ㅎㅎ

제가 자기애가 좀 강한 인간이어서요.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그리고 파고들어보면 사랑을 퍼주기만 하고 뭘 나눠주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 심리의 뿌리가 일정부분 그런 것이라 해도 그렇게 단정지어버리면 안되죠.

그건 그 사람들을 모욕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뭐든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에서 끝냈으면 좋았을 거라는 거죠.^^

내가없는 이 안 2004-12-22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 작가의 소설들은 대체로 로드무비님한테 대우를 잘 못 받을 것 같아요. 맞죠? ^^

로드무비님, 올해 잘 보내시구요, 내년에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

반딧불,, 2004-12-22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말씀에는 동감합니다.

사실 저도 조금 나눠주지 못해서 안달하는 인간형이거든요ㅠㅠㅠ



가끔 그러거든요. 아...이건 병이다.

알라딘만큼 잘 나눠주시는 곳은 없었던 듯 해요.

그래서 얼마나 좋았는데요. 저같은 이들이 또 있구나 싶어서요.



그리고, 언젠가 들은 말을 생각한답니다.

세상에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답니다.

스스로에 대해 단점만을 말하는 인간, 장점만을 말하는 인간.

저는 분명 전자에 속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글을 보니 상당한 자기애를 표현하고 있더군요. 가만 있어야 할 때 가만있지 못하는 병도 같이 있지요.



그리고, 김형경...음..버겁긴 하지만, 예전에 참 좋아했었는데..요새는 안읽히네요.

허긴 최근에 책을 읽었어야 말이지요ㅠㅠㅠ

니르바나 2004-12-22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글 속에서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가져야 할 예의를 읽었습니다.

불쾌한 감정이 남아 있으면서도 편견없이 책을 대하시는 자세에서

저는 또 한 공부하였습니다.


반딧불,, 2004-12-2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쓰다보니 이것

김형경 소설에 나왔던 글인가...아닌가...



여하튼 그녀의 글은 마음이 무겁기만 하지요.

읽고 나서 개운한 적이 없었던 듯 해요.



밝은 음악 한 곡 들었음 좋겠네요.

나른하게 늘어집니다.

kleinsusun 2004-12-22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람 풍경>을 샀는데, 첫 몇장을 출근길에 읽다가 잘 안 읽혀서 접어두고 다른 책을 읽고 있어요. 로드무비님의 글을 읽으니 밀려 있는 수많은 책들 중 <사람 풍경>의 순위가 더 뒤로 밀려날 것 같아요.ㅋㅋ

kleinsusun 2004-12-22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 나눠주지 못해서...누군가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들 있쟎아요.

항상 누구나에게 너무도 잘해 주다 보니까 고맙다는 말도 못듣는....

" 재는 원래 저래." 하며 감사 보다 오히려 좀 무시를 받는....

제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이 생각나서 가슴 아파요.

자신의 "존재증명"만을 위해서는 아닐텐데...

그 사람도 참 많이 상처 받거든요.

더 아이러니한건 때론 그 사람의 over가 주위 사람을 숨막히게도 한다는 거죠.

쓰다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헉

로드무비 2004-12-22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 님은 어떠세요? 김형경 씨 책들이......

전 꽤 재미나게 읽는 작가였는데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부터

뭔가 지루해지기 시작했어요.

저한테 대우를 잘 못 받을 것 같은...이라는 표현에 약간 찔끔하게 되네요.

이안님도 올해 잘 마무리하시고 내년에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반딧불님, 우리 이런 얘기 하면 밤샐 것 같으니까 언제 따로

속닥속닥하게 해볼까요? 본격적으로다가......^^

니르바나님, 그렇게 어마하게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편견, 안 가지려고 노력은 하는데 그게 잘 안되어요.

이미 제 말하는 뽄새 보면 알고 계시겠지만......^^;;;

저야말로 님에게서 뭘 좀 배워얄 것 같아요.

수선님, 김형경 씨 억울하겠네요.

저 때문에 좋은 독자의 독서 순서에서 밀려서......^^
그리고 수선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사람은 꼭 주변에 한 명씩 있어요.
남에게 뭘 줘놓고 좋은 소리도 못 듣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정신차리고 사람들을 냉정하게 대해보세요.
그게 또 얼마나 섭섭하다고요.
하여간 인간의 심리는 알 수가 없어요.^^

로드무비 2004-12-2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우린 꼭 한번 만나야 혀요.^^

icaru 2004-12-22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사람 풍경>을 읽었는데... 나름대로...좋았었거든요~ ^.^
리뷰를 올릴 즈음부터 알라딘 서재 리뷰며 페이퍼며...곳곳에서 저 작품에 대한 사려깊은 혹은 호평을 하는 관련글들이 제 눈에...보이기 시작하는 바람에... 쉽게...리뷰를 못 쓰겠다는 말입지요 ㅠ.ㅜ 저의 오죽잖은 글이 다른 것들과 쩜 비교가 될듯해서용 ㅠ.ㅡ ... 뭐 오죽잖은 글이면 좀 어떤가...있는그대로 느낀 그대로 쓰면되지..그냥...(근데 그걸 못해요 ㅠ.ㅜ)

플레져 2004-12-22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씨의 초기작들을 좋아해요. 사랑을 선택하는... 에서부터 작가의 힘든 삶과의 투쟁, 기록이 낱낱이 소설에 스며들면서 그녀의 소설은 좀 다른 색깔이 나기 시작했어요. 사람 풍경, 사놓고 앞에만 조금 읽었어요. 그녀가 소설가와 의사의 경계에 들어서려는 것 아닌가 하여 가슴이 아프네요. 하지만, 전...끝까지 김형경씨만은 좋아할거예요. 왜냐면... 언젠가 그녀가 제게 한 말이 있거든요. 저만 기억할테지만...^^

로드무비 2004-12-22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님, 제가 좀 삐딱한가봐요.

누가 뭘 단정짓듯이 얘기하면 재미가 없어요.

저도 사실 꽤 재밌게 읽었으면서 말이에요.

전 마냐님의 밑줄긋기와 리뷰를 읽었는데 제가 밑줄을 긋는 부분은

또 다른 곳이더라고요. 그러니 감상도 뭐 제각각이겠죠.

전 복순이 언니님의 이 책 리뷰가 궁금한데요?^^

플레져님, 언젠가 그녀가 님께 한 말이 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책을 읽고 약간의 불쾌감이 남았달 뿐 김형경 씨를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플레져님도 꽤 의리파이시구만요.^^


내가없는 이 안 2004-12-23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 씨가 대우를 잘 못 받을 것 같단 말은 제 얘기가 반쯤 들어 있는 건데요. 뭐.

전 그 작가 소설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뭐 딱히 싫다고 말할 것까진 없지만 읽을 때마다 편치 않아서 내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 이 책은 서점 가서 몇 번을 들춰보면서 읽어보기로 했어요. 작가가 집 팔아서 떠난 여행이라니 왠지 더 마음이 안 좋아지기도 하구요...

마냐 2004-12-2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리뷰야 그렇다쳐도, 밑줄긋는 부분도 그리 제각각이라니, 조금 놀랍습니다. 하지만, 님이 전해주신 에피소드는 정말 속뒤집는 내용이군요. 나중에 리뷰도 올려주세요. 기둘리겠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