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창 가수 너훈아와 한 골목에 살았던 적이 있다. 내 남동생과  대학에 다니는 사촌 둘과 넷이 자취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작은 연립 이층을 전세내어 대장(?) 노릇을 하며 살던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제일 홀가분한 시절이었다. 너훈아는 길모퉁이 연립의 반지하에 살았는데 무대의상을 세탁소에 맡기러 가는 그와 여러 번 마주치기도 했고 아무래도 반지하이다 보니 얼기설기한 들창 사이로 농짝이니 싱크대니 집안살림 같은 것도 보였다.  집앞에 세워진 남편의 고물차를 정성껏 물로 씻는 그의 아내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어느 대기업 문화재단의 직원이었다. 월급 명세서를 보면 비서실 소속. 말이 좋아 문화재단이지 그 기업 총수의 어머니가 뭘 좀 해보겠다고 아들을 졸라 사무실을 하나 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직원들도 전부 그 어머니와 친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한 명씩 갹출(?) 한 사람들. 나는 출판사 직원으로 한 원로문인 댁을 드나들다가 술을 매너있게 잘 마신다는 그 이유 한 가지로 사랑을 흠뻑 받았다. 어느 날 잘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틀어박혔는데 그 원로문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음날 어디로 가보라고. 단 한 벌 있는 치마를 떨쳐입고 갔더니 세상에나, 처음 보는 귀부인이 나이 서른이 다 된 내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귀엽게 생겼네." 뭔가 좀 이상한 분위기다 했지만 취직을 하지 않으면 보따리를 싸서 당장 집에 내려가야 하는 분위기였으므로 그냥 거기 다니기로 했다.



직장생활은 널널했다. 딱히 할 일이 정해진 것도 아니어서 어느 달인가는 서고의 <공간> 잡지를 창간호부터 모두 꺼내어 정리하는 것이 나의 일인 적도 있었다. 미술, 무용, 음악, 건축에 대한 기사로 넘쳐나는 잡지였으므로 몇호에 무슨 중요한 기사가 실렸는지 체크하는 정도의 그 일은 내게 식은죽먹기였다. 어떤 날은 어머니에게 드릴 그달의 용돈 봉투를 직접 가지고 온 기업 총수의 얼굴을 보기도 했다. 사모님의 비서인 언니에게 물으니 한달 용돈이 2천만 원이라고 했다.



너훈아와 한 골목에 살면서 나훈아에 대한 묘한 애정도 생겨났다. 이건 무슨 심리일까? 어쩌면 당시 재밌게 읽은 가수 윤복희의 책이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훈아와 라이벌이었던 남진의 한때 아내였던 여인. 그녀의 자서전에 헤어진 전남편은 비열하고 치사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훈아의 아내였던 김지미의 입에서는 전남편 나훈아를 비난하는 듯한 발언은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마찬가지 이유로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소설가 송기원을 나는 내동댕이쳤다. 나훈아 때문이었다. 인도에서 체험한 고행이 어쩌고 하는 그의 장편소설을 기대에 차서 읽어나가는데 느닷없이 가수 나훈아가 천박해서 봐줄 수가 없다느니 오로지 그에 대한 비난으로 점철된 한 페이지 분량의 대목을 만났던 것이다. 그건 나훈아가 아니고 내가 좀 싫어하는 연예인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을 심하게 모욕하는 사람을 봐줄 수가 없었다. 인도에 가서 고행을 백날 하면 뭐하냐구! 그 이후로 나는 송기원 씨의 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그 골목에 살 때 제일 좋았던 건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러 가서 나의 이웃인 너훈아를 화면으로 만났을 때이다. 아아, 나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를 그 영화에 등장시킨 임순례 감독의 선택은 탁월했다. 유명한 사람과 한 골목에 사는 기쁨이라니!



너훈아와 한 골목에 살던 시절 재밌는 이야기는 끝이 없는데 이것도 카테고리 하나로 잡아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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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1-27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주변에는 재미남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군요.. 인복인가 봅니다..^^*

조선인 2004-11-2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미디언 이주일씨의 옆블록에 산 적과 조용필씨 아파트랑 같은 이름을 가진 아파트에 살아본 적은 있는데, 이야기 풀 자신은 없네요. ㅎㅎㅎ

nugool 2004-11-2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아주세요! 잡아주세요!! "그 시절 그 골목.." ^^ 정말 어찌나 맛깔스럽게 글을 잘 쓰시는지!! 그나저나.. 소설가 송기원님에 대한 이야기는 저도 공감되는데요? 나훈아가 천박해서 봐줄수가 없다니.. 헉.. 로드무비님 말씀대로 다른 사람에 대한 모욕도 봐줄 수가 없는데.. 저는 나훈아라서 더욱 봐줄 수가 없어요.. 나훈아 노래가 얼마나 좋은데요!!!

진/우맘 2004-11-27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테고리요, 아예 예전에 인연이 닿은 유명인사 얘기만 한 곳에 모아주세요~ 장정일하고 전화통화 한 얘기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가난한 (그렇지만 가난하지 않은) 시인 얘기 같은거요!!!!

내가없는 이 안 2004-11-27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주세요! 저도 나훈아 너훈아 다 좋아하거든요. ^^

2004-11-27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훈아 노래는 아니지만 전 현철의 사랑의 이름표 좋아해요..어느 날 버스에서 들었는데 그렇게 가슴에 와 닿더라구요..재밌게 읽었어요^^

플레져 2004-11-27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릴 때, 송대관 아저씨가 리싸이틀 끝나고 우리 동네 들렀는데요, (한참 인기 있을때였다는군요..) 동네에서 놀고 있던 제게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니네 집에 밥 없니? 밥 좀 주라~!!!! " 누룽지 박박 긁어서 드렸던 적이 있어요. ㅎㅎ 로드무비님... 맛있게 잘 읽었어요. 님의 글만 읽으면 배고파요. 넘 맛나게 후루룩 먹어버렸나봐요. 흐흐...

니르바나 2004-11-27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미모가 출중하신가 봅니다.

어른들은 예쁜 모습을 그리 표현을 잘 하시잖아요.

나훈아의 그늘로 밥먹고 사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나훈아씨는 참 좋은 가수시네요.

마치 나훈아씨의 노래처럼 구성진 로드무비님의 글을 읽는 제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그시절 그노래' 기대할께요.

깍두기 2004-11-2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이 만나신 유명인사 모두에게 싸인을 받아놓았더라면 지금 박물관을 차렸어도 됐을텐데.....아쉽다, 쩝.

그건 그렇고....귀엽게 생기셨단 말이지요?^^

로드무비 2004-11-27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왜 좀 못생긴 사람 보고 할 말 없으면 '귀엽다'고 하잖아요.

그런 차원인 줄 아뢰오.

그리고 제가 고작 남의 싸인 가지고 박물관 차리겠어요? 흥=3

니르바나님, 미모에 대한 답변은 안해도 되죠?

구성진 글이라는 표현 정말 구성집니다.

앞으로도 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요.(저 칭찬에 무지 약한 인간입니다.^^;;)

플레져님, 옛날엔 송대관이 이유없이 싫더니 요즘은 모습도 노래도

구수하니 좋더라고요? 어린 플레져가 송대관에게 누룽지를 갖다줬다니

너무 신기합니다.^^

참나님, 현철은 인간성 좋기로 소문났어요.

자기 집 앞 빗자루 들고 치다가 동네분이랑 쿵짝 맞으면

연쇄점 평상에서 술판도 곧잘 벌인데요.

그리고 저도 그 노래 신나더라고요.^^

이안님, 나훈아도 너훈아도 다 좋아하신다니 반갑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훈아만 좋아하거든요.

진우맘님, 카테고리 문제 고민 좀 해볼게요.

그런데 유명인사들과의 그 신통찮은 일화 갖고

독립시킨다는 것이 좀 얍삽하게 보이지 않을까요?^^;;;

너굴님, 제 글이 좀 구수하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송기원 씨는 나훈아에 대한 글 잘못 썼다가 로드무비나 너굴 등 여러 좋은 독자

잃어버리게 된 사실을 알까요?^^

조선인님, 부촌에 사셨나 봅니다.

이주일 씨 옆 블록이라니 몇 번 마주치기도 하셨겠네요?

날개님, 인복은요.

외로워죽겠습니다.^^;;;


2004-11-27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1-28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4-11-28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3--->요건 무슨 뜻인가요? 저는 현철을 좋아합니다. 그냥 어머니가 현철 팬이라서

로드무비 2004-11-2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정말 =3 뜻을 몰라서 물으신 건지?

도망갈 만한 발언을 하고 콧김을 내뿜으며 내빼는 표시인 줄로 아뢰오.

그리고 저도 현철 좋아해요. 사람만......^^

릴케 현상 2004-11-28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와아~ 정말 그러네요. 매직아이 같아

로드무비 2004-11-2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사실인데요? 호호.

딸기 2004-12-06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나훈아를 모욕하는 작가라니! (근데 송기원이 누구죠?)

그런데요

-윤복희가 남진 부인이었군요

-김지미가 나훈아 부인이었군요

새로운 사실들...(저한테만 새로운 거겠죠?)

로드무비 2004-12-07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연예계에 대해 궁금한 것 있으면 제게 물으세요.(으쓱으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