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라
            
정호승 詩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중에서(<포옹> 창비 시집, 2007)


며칠 전에 나온 정호승의 시집 <포옹>을 읽었다.
너무 유창하고 시 한 편 한 편이 딱딱 맞아떨어져서
시인의 진정성이 의심될 지경이었다.

예를 들어 '감자를 씻으며'라는 시는 이런 내용이다.

"감자의 몸끼리 서로 아프게 부딪히면서 흙이 씻겨 나간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도
흙 묻은 감자가 서로 부딪히면서
서로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과 같다"(부분 인용, 46쪽)

아직도 저런 시를 쓸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조금 전 딸아이와 나눈 대화.
학교에서 보내준 영어캠프 안내지를 보고 참가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엄마도 없고 친한 친구도 없으니 누가 자기를 보호해 주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 입에서 나온 말,
"너 스스로 너를 보호해야 하는 거야."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자 그 내용이 그렇게 공허할 수 없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요즘들어 부쩍 이런 일이 잦다.
기껏 입을 뗐더니 하나마나한 말.

정호승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신경림 시인의 극찬대로 한 편 한 편이 근사한데
이상하게 마음에 스며드는 구절이 별로 없다.
새삼스럽게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건지......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라는 제목의 시,  저 심상한 구절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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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와 연우 2007-09-1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움이 못내 사그라들지 않는 저녁, 술이나 한잔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박자 맞춰주는 이가 그리운걸 보니 늙나봅니다.
언젠가 충청도를 지나갈때엔 한잔 하지 않으시려는지요?

로드무비 2007-09-14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충청도를 지나갈 때, 건우와 연우님과 꼭 한잔했으면......^^
(입밖으로 내뱉어도 공허하지 않은 걸 보니 진심인가 봅니다.)

비로그인 2007-09-14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시군요.
그리고 로드님의 대사도 멋지구요.^^
오랜만입니다~

로드무비 2007-09-19 12:02   좋아요 0 | URL
L-SHIN 님,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저 시집을 읽던 날 혹 내 심사가 사나웠나?
님의 댓글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ㅎㅎ

프레이야 2007-09-14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이래서 님의 글이 좋아요.
내뱉는 글과 내뱉는 말을 생각하게 합니다. 찔끔~
아,오늘도 공허한 소리 하고나 산 건 아닌지..

로드무비 2007-09-19 12:00   좋아요 0 | URL
혜경 님, 그러면서도 이렇게 페이퍼로 내뱉는데요, 뭐.ㅋ
저는 촉새랍니다.=3=3=3
항상 감사.^^



라로 2007-09-14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글은 넘 좋은데,,
넘 찔끔 써주시니,,,,찔끔~ㅎㅎㅎ

프레이야 2007-09-14 22:40   좋아요 0 | URL
팔랑나비님, 그 찔끔~이 아니라구용.
뜨끔~ 이라고 친다는게 찔끔~이라고 쳤네요.
완전 따로 노는 손가락이에요. 로드무비님 죄송^^

라로 2007-09-14 22:44   좋아요 0 | URL
전 찔끔으로 친거에요~~ㅎㅎㅎ
너무 자주 안써주시니까 하는 말이에용~~~호호호


근데 혜경님 뭐하세용????
보고싶네~~~~ㅎㅎ
우리 오늘밤 자주 붙어다니죵????ㅎㅎ

로드무비 2007-09-19 12:05   좋아요 0 | URL
찔끔이든 뜨끔이든 두 분 얘기 나누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헤벌쭉~

그라고 nabi 니임, 저도 매일 페이퍼 쓰고 싶은데
컴이 협조를 안해줍니다.
다정한 말씀 감사하여요.^^

치니 2007-09-1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번 시집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았는지, 너무 잘 알 거 같아요.
그리고 따님에게 뱉은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이유도.
로드무비님의 내공은 가늠이 안되지만, 그걸 글로 표현하는 솜씨는 정말 일품이세요.

로드무비 2007-09-19 11:55   좋아요 0 | URL
치니 님, 시를 좋아하지 않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그런데 참,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되겠어요. 히히~
10년 전에도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아직 끄떡없거든요.^^

balmas 2007-09-16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 로드무비님 글은 여전하시네요. 넘 좋다 ㅎㅎㅎ

로드무비 2007-09-19 13:23   좋아요 0 | URL
FTA반대 발마스 님, 호호, 님의 높은 안목은 바래지도 않는군요.=3=3=3
반갑습니다.^^

릴케 현상 2007-09-21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좋네요.

로드무비 2007-09-22 11:31   좋아요 0 | URL
헤헤, 산책님이 좋으시다니 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