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라
정호승 詩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중에서(<포옹> 창비 시집, 2007)
며칠 전에 나온 정호승의 시집 <포옹>을 읽었다.
너무 유창하고 시 한 편 한 편이 딱딱 맞아떨어져서
시인의 진정성이 의심될 지경이었다.
예를 들어 '감자를 씻으며'라는 시는 이런 내용이다.
"감자의 몸끼리 서로 아프게 부딪히면서 흙이 씻겨 나간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도
흙 묻은 감자가 서로 부딪히면서
서로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과 같다"(부분 인용, 46쪽)
아직도 저런 시를 쓸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조금 전 딸아이와 나눈 대화.
학교에서 보내준 영어캠프 안내지를 보고 참가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엄마도 없고 친한 친구도 없으니 누가 자기를 보호해 주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 입에서 나온 말,
"너 스스로 너를 보호해야 하는 거야."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자 그 내용이 그렇게 공허할 수 없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요즘들어 부쩍 이런 일이 잦다.
기껏 입을 뗐더니 하나마나한 말.
정호승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신경림 시인의 극찬대로 한 편 한 편이 근사한데
이상하게 마음에 스며드는 구절이 별로 없다.
새삼스럽게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건지......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라는 제목의 시, 저 심상한 구절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