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김새로 남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들은
느껴본 적도 없을 그런 쓸쓸함.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만큼도 남자들은
여자의 내면 따위는 돌아봐주지 않았다.
(릴리 프랭키 <너덜너덜해진 사람에게> '대마농가의 신부' 중에서)

오래 전 일이 있어 고려대 문과대 한 교수실을 방문했을 때
이 건물  어딘가에 김화영 교수와 소설가 송하춘 선생이 계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김화영 교수의 글은 평소에 좋아하니 그렇다 치고
소설가 송하춘이 생각난 건 의외였다.
그의 소설은 <은장도와 트럼펫> 한 권을 읽어본 것이 고작인데.
어쩌면 문예지에 실린 단편을 읽은 건지도......

그의 소설에 관한 나의 기억도 정확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기차 여행중인 한 커플에 대한 묘사가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져
검게 녹아드는 껌처럼 내 머리통에 철썩 들러붙었다.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여자를 외면하는 남자와
그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애교랍시고 부리고 있는
못생긴 여자가 우연히 주인공의 시선에 잡히는 장면이 꽤 길게 이어졌다.
그런데 정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리얼한 묘사였다.

그 소설은 내 인생에 안 좋은 쪽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안 그래도 애교랑은 거리가 먼 인간이었는데,
깨끗이 남은 애교를 포기한 것이다.

송하춘의 그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필요에 의해 애교를 계발해
훨씬 매력적이고 괜찮은 여성이 되었을지 모른다.
소설 한 편 잘못 읽어  평생 뚱한 표정으로 살아온 꼴이라니!

결혼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눈이 맞은 남편과
어영부영 단둘이 만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우리의 데이트 코스는 영화관과 식당, 술집이 전부였다.
인사동의 모깃불이 끄슬리고 어쩌고 하는 이름의 주점에서 만났는데
송하춘 교수의 그 소설 장면을 중년의 한 커플이 재연하고 있었다.

얼굴이 사납게 생긴 데다가 입성이 초라한 데다가 마흔을(아마도) 넘긴 여성의 
취중의 애교는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자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남자도 보아하니 뭐 신통한 게 하나도 없는데 잔뜩 찌푸린 얼굴로
여자 앞에서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마음 먹었다.
'저 나이에 나는  친하지도 않은 남자와 술집을 전전하지는 않으리라.
차라리 집에 처박혀 책이나 읽으리라!'
초라하기 짝이 없는 오죽잖은 결심이었다.

--나는 나를 원하는 사람을 원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원한다.
그런 것이 없었던 탓에 어지간히도 굴욕을 겪어 왔다.
('대마농가의 신부' 10쪽)

결혼정보지에서 농촌신부를 모집한다는 기사를 발견하고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맞선을 보기 위해
시골 농가로 가는 도쿄의 사무원 다에코.

대마 농가는 아니지만 내 친구 중에도 오래 전 선을 봐서
일본 시골의 농부와 결혼했다가
3년 만에 맨몸으로 쫓겨나다시피 돌아온 친구가 있었다.
전공(식품영양학과)과는 무관하게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더니
일본으로 시집 가려고 그랬구나, 감탄했는데.

무슨 공부를 하고 어떤 일을 하게 되고 사람을 만나고 하는 인생의 일들을
운명적인 것으로 연결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별것 아닌 경우가 많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을 때려치웠다.
그러고 나니 인생이 그리 홀가분하면서도 허탈할 수 없었다.

내 친구의 일본 시어머니는 걸핏하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우하고는 살아도 곰하고는 못 산다."
그 말을 전해듣고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나더러 어쩌라고!!'

<너덜너덜해진 사람에게>.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제목에 끌려 주문하긴 했지만 별 기대 없이 집어들었다.
그런데 홈빡 빠져들어 읽었다.

가와카미 히로미의 <선생님의 가방>처럼
리뷰로 쓰기 차마 아까워(?) 페이퍼로 기록을 남긴다.

--지식을 펼치면 모가 난다. 정에 잡히면 휩쓸린다.
고집을 부리면 옹색하다.
아무튼 인간세상은 살아가기가 어렵다.
('오사비시 섬' 중에서,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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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1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로드무비 교수님의 글이 제일 좋습니다.

로드무비 2007-08-19 17:46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 님, 이런 맛에 학력을 위조하나 봐요.=3=3=3
오랜만이죠? 반갑습니다.^^

2007-08-19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9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8-19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나더러 어쩌라고?
여우로 거듭 나고픈 곰이 인사 드려요, 로드무비님! ^^

로드무비 2007-08-20 10:47   좋아요 0 | URL
헹=3 진짜 여우시군요. 혜경 님.ㅋㅋ

마노아 2007-08-1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맛에 로드무비님의 글을 기다려요. 더운 날에 해갈을 주시는군요^^

로드무비 2007-08-20 10:46   좋아요 0 | URL
혹여라도 제가 못생기고 애교가 없다고 오해하시는 건 아니죠?=3=3=3

2007-08-19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8-20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8-20 16:08   좋아요 0 | URL
캄사합니다, 민서 님.^^

비자림 2007-08-20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곰이랍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잘 표현을 못 하고 무뚝뚝해요.
로드무비님,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무더위에 건강하시길!

로드무비 2007-08-24 12:46   좋아요 0 | URL
비자림님,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 되어요.
하긴, 애교의 모양도 각양각색일 테니까요.
(아쉽게도 방학이 끝났네요.^^)

비로그인 2007-08-20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하춘님의 바로 그 작품 저도 읽어보고 싶군요.

로드무비 2007-08-24 12:44   좋아요 0 | URL
<은장도와 트럼펫>에 실린 것인지, 문예지에서 본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새초롬너구리 님, 괜히 읽고 저처럼 되지 마시고 애교로 밀고 나가시길.^^

waits 2007-08-2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미모와 애교라니, 저랑 거리가 먼 두 가지라 내용은 패스~ㅎㅎ
책장수님과 자주 가셨던 그 주점은 혹시 '모깃불에 달 끄스릴라'였나요?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끔 가던 곳인데, 오랜만에 떠올리니 반갑다는.
잦은 비에 폭염에... 잘 지내고 계시지요? ^^

로드무비 2007-08-24 12:42   좋아요 0 | URL
그 주점 지금도 있나요?ㅎㅎ
나어릴때 님이 보시기에 어쩌면 소설 속 저 여성의 역할을
어느 날 제가 열연했는지도 모르겠군요.=3=3=3

nada 2007-08-22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마지막 인용구. 인상적이어요.
아무래도 저도 남은 애교나마 남김없이 포기해야 할 것 같은..- -;;
인생 참 뭐 같네, 에잇.

로드무비 2007-08-24 12:36   좋아요 0 | URL
안돼욧,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 '')이상하다. 애교가 줄줄 흐르던 페이스로 기억하는데...

건우와 연우 2007-08-23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모와 애교...
저의 아킬레스건이로군요.^^

로드무비 2007-08-24 12:34   좋아요 0 | URL
그러시구나아.( '')=3=3=3

산사춘 2007-08-25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술안주로 자식을 희롱하는 아부지 때문에 애교를 갈고 닦게 되었는데...
지금은 제 애교를 '폭력'이라 부르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간만의 제 애교를 무서워하지 말아주세염~ 아잉~

로드무비 2007-08-30 14:13   좋아요 0 | URL
춘 님의 애교를 제가 감히 무서워하겠어요?
좀더, 더, 더, 자주 보여주세용, 아잉~

플레져 2007-08-26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책이 있었군요. 제가 한참 경주 여행중이었을 때 페이퍼 올리셨군요 ^^!
땡스투 했습니다. 제목은 역시 로드무비님 스타일이에요.

로드무비 2007-08-30 14:11   좋아요 0 | URL
헤헤, 로드무비 스타일.^^